성지스님 중국 구화산 성지 순례기

“내가 열반한 뒤 내 몸을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어 두었다가 새해가 지난 뒤 열어보아라.
만일 그때까지 썩지 않으면 그대로 개금하여라. 스님의 유언에 따라 새해 뒤에 돌함을 여니 얼굴은 살아있는 듯 했고 살갗은 부드럽고 향내음이 구화산(九華山)을 진동했으며 뼈마디에서 황금자물쇠 흔드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지난 10월, 이틀간의 한중일 불교우호 교류대회를 성황리에 마친 한국대표단은 20일부터 구화산(九華山)을 시작으로 성지순례를 하였다. 새벽부터 짐을 꾸려 무호(無湖)로 이동하여 광제사를 참배했다.

광제사는 김교각 스님께서 구화산(九華山)으로 가시기 전 3년간 수행하셨다는 사찰이다. 광제사에서 기념촬영 후 무호를 출발하여 청양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있을 구화산(九華山) 일대 지장성지순례를 위해 일찍이 휴식에 들어갔다.

21일 날이 밝았다. 오늘은 불교 사대성지중의 하나인 안후이성(安徽省) 츠저우시(池洲市) 칭양현(靑陽縣) 서남쪽에 위치한 구화산(九華山)을 돌아볼 예정이다. 구화산은 지장보살(地藏菩薩) 도량, 안후이성은 북으로는 양쯔이강을 굽어보고 남으로는 명산인 황산(해발1873m)과 마주한 곳이다.

구화산(九華山)은 원래 구자산인데 당나라시인 이백에 의해 구봉(九峯)의 아름다움을 아홉 개의 연화에 비유한 후 구화산(九華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화산(九華山)은 아열대지대에 속해 있지만 전반적으로 지대가 높아 온대의 산간지역기후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늑하고 쾌적한 자연환경덕분에 사계절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속성이 김씨이고 이름은 교각인 김 교각 스님, 구화산(九華山)의 지장보살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전에 태어난 신라인으로 33대 성덕왕의 맏아들이다.

신라의 왕자출신으로 24세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중국에 건너가 각지를 돌며 수도 생할을 하다가 양자강 남쪽 구화산(九華山)에 화성사를 짓고 불법을 설교한다.

명성이 높아져 중국 각지는 물론 신라에서까지 불법을 들으러 옴으로써 구화산(九華山)은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794년 99세의 나이로 제자들을 모아놓고 작별인사를 한 뒤 참선 중 입적하였다.

3년이 지나도록 시신이 썩지 않아 등신불이 되었는데, 아직도 구화산(九華山) 지장보전에(地藏寶殿)에 그의 등신불이 봉안되어 있다.

 

한국대표단 일행은 고배(古拜)경대를 향했다. 산에 오르기 전 관광버스를 진입시킬 수 없다하여 대표단일행은 관광버스에서 내려 10분정도를 그곳 작은 차량으로 옮겨 타고 가서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차가 올라가는 동안 길이 굴곡이 많아 우리나라 옛 대관령길을 연상케 했다. 케이블카로 산에 오르는 동안 오를수록 산새는 더욱 험해지고 산봉우리들 사이로 구름바다가 형성되는데 그 아래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검은 기와에 흰 벽 건물 이었다.

옛고(古), 절을 한다는 배(拜)자로 지어진 교배경대 사찰은 김 교각스님께서 화엄경을 읽던 곳으로 한자를 읽고 한번 절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경건함의 극치인데 스님께서 무릎 꿇고 그 곳에 경을 읽으셨다는 곳에 지금도 커다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몇 해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길함을 지닌다고 하여 신발을 벗고 맨발로 그 발자국을 밟아 보았었는데 유리관으로 보호를 해 놓아 그 길함을 눈으로 받아올 수밖에 없어 아쉬웠지만 1,200m의 고배경대에 이르니 속세를 멀리 벗어난 듯 한 느낌을 받아 너무 좋았다.

우리 일행이 참배하고 나오는 도중에도 일보 일 배로 고배경대에 오르는 참배객들을 볼 수 있었으니 지장보살의 화신이신 김 교각스님의 명성이 중국에서도 어떠한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데 있다는 천태사는 구화산(九華山) 두 번째 정상 천대에 자리 잡은 절로서 그 절경과 감동은 글로 표현을 하기 힘들 정도로 오묘하고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이 천대에 오르기 전 셀 수 없는 계단을 중국의 두 비구니스님께서 일보 일 배로 계속 오르고 있었다. 존경스럽고 그 수행에 박수를 보냈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관광버스로 오기까지 굴곡이 심한 길을 쏜살같이 달려버리는 승합기사 때문에 멀미로 몸이 고통스러웠지만 구화산(九華山)의 아름다움이 머릿속에 남아 참을 수 있었다.

점심 공양 후 한국대표단 일행은 구화산(九華山)중심부에 위치하는 화성사를 참배했다. 화성사에 도착하니 입구 연못엔 금붕어 떼들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반월형으로 된 이 연못은 김 교각스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으로 지장의 어머니가 아들이 보고파서, 그도 그렇듯이 신라를 떠나 중국 땅에 도를 닦고자 떠나 돌아오지 않으니 어머니의 마음이 다를 바가 없는지라 그의 아들이 보고파서 날이면 날마다 중국 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여동생 둘을 보내어 아들을 설득해서 데려오려고 했으나 도리어 두 여동생은 지장인 오빠에게 설득당하여 지장의 제자가 되어 출가를 하여 도를 닦게 되었으며 어머니 또한 기다리다 못하여 아들을 데려오려고 구화산(九華山)으로 직접 가게 되어 구화산(九華山) 화성사에서

아들을 만나게 되니 너무나 반갑고 감격하여 부둥켜 앉고 울다가보니 눈이 멀어졌다고 하는데 효성이 지극했던 지장은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 연못의 물로서 어머니의 눈을 닦아드려 그 어머니의 눈이 다시 뜨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연못이다.

모든 불자들의 방생지로서 두 분의 숙부와 두 여동생이 지장을 데리고 가려고 구화산(九華山)까지 왔으나 도리어 네 사람이 모두 다 제자로 출가하게 되었으며 어머니 또한 아들이 보고팠던 그 마음이 너무나 복받치어서 아들의 큰절을 받고 두 모자가 3일 밤낮을 울고 나니 눈이 멀어졌으나

지극한 지장의 정성으로 그 연못의 물로서 그 어머니의 눈을 닦아드려서 다시 그 어머니의 눈을 뜨게 되었다하여 낭랑지 또는 명안천이라고 불리고 있다.

절에 들어서니 구화산(九華山) 역사문물관이 있었고 그곳엔 교각스님의 행적과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행적은 12폭의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었고 대웅보전 안에도 스님의 유물이 같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화성사에 김 교각스님이 쓰시던 신발, 모자등 유물이 모셔져 있고 스님의 일대기가 도편으로 전시되어 있는 것은 이 절이 구화산(九華山) 지장도량의 개산지(開山地)이기 때문이다.

개산조사(開山祖師)인 화성사는 본래 당나라 지덕2년(757년)에 지어졌는데 교각스님이 석굴에서 고행하는 모습을 제갈절(諸갈節)이라는 촌노에 의해 전해지면서 지장스님이 잘 수행 할 수 있도록 지어 정한 곳이지만 교각스님은 이곳에서도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은 네 겹의 뜰로 된 전각과 뜰 민가에 조합된 건물로 정교하게 비탈을 따라 층층이 높아져 가는 전경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화성사 편액은 당 덕종이 하사 하였다 하며 대웅보전을 지나 장경루에는 교각스님의 가사가 모셔져 있다. 대표단 일행은 참배를 끝내고 보행으로 화성사에서 걸어서 5분정도 가는 육신보전(肉身寶殿)으로 향했다. 99세에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한 교각스님은 입적 후에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한국 대표단일행은 팔각으로 된 칠층 보탑 안에 육신이 모셔져있는 탑 앞에서 불보살님의 화신인 김 교각 지장보살님께 법회를 올렸다. 필자는 육신보전을 참배 올리면서 한국인 스님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뿌듯한 감동이 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중국이어서가 아니고 김 교각스님의 생애를 돌이켜 재조명해 볼 때 수행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총무원장 인공스님과 원로스님이신 설봉스님, 관음종 총무원장이신 홍파스님, 진각종 통리원장 혜정정사님 등의 일행은 모노레일을 타고 백세궁을 향해 산에 올랐다.

백세궁(百歲宮), 바이쉐이궁은 중국 명나라 만력제(1573~1619)시절 구화산(九華山)에 있는 사찰인데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혜옥스님이 찾아와 높은 등에 절벽꼭대기에 작은 움막을 짓고 수도하기 시작하였다. 혜옥스님은 28년을 들여 설혈(舌血)과 금분(金粉)으로 대방광불화엄경 81권을 쓰시고 126세에 입적하셨는데 열반 3년후의 모습이 생전과 같아 활불로 모셔지고 전신 개금하여 백세궁에 안치된 곳이다.

혜옥스님에 의해 명나라 만력황제 이전에는 제성암으로 불렸던 곳이 혜옥스님의 도량으로 변하면서 백세 궁으로 고쳐졌다.

생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머리 숙여지지만 열반하신 후에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더욱 좋았다. 청나라 당시 구화산(九華山)에 큰 화재가 발생해 스님들이 혜옥스님의 육신금화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꼼짝하지 않자 혜옥스님이 움직일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좌상 앞에 엎드린 스님들이 움직이지 않으시면 함께 타죽겠다고 읍소했더니 혜옥스님이 팔을 앞으로 들었고 그 즉시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사찰의 화재가 진압되었다고 한다.

혜옥스님(무하선사)의 금좌상은 지금도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두 팔을 올리고 계셨다. 이제 그 팔을 내리셔서 평안하시길 기도드렸다. 백세궁을 만년선사(萬年禪寺)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백세 궁에서 남쪽방향에 웅장한 오백나한 당을 참배 후 순례 단은 모노레일을 타고 하산, 하루 종일 구화산(九華山) 사찰을 참배하면서 구화산(九華山)은 화현에 의한 다른 성지에 비해 실제인물이 만든 도량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음을 새삼 새기며 구화산(九華山) 성지순례를 마치고 마지막 날 순례지인 황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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