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대담] 보은군 학림교회 은촌 이근태 목사
[힐링대담] 보은군 학림교회 은촌 이근태 목사
  • 이경
  • 승인 2019.04.2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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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군 학림교회 은촌(隱村) 이근태 목사의 둥지를 방문한 시간, 조팝나무 꽃 하얗게 흩날리고, 산등성이마다 산 벚꽃들이 만개한 계절이다.

이근태 목사의 집은 ‘울도 담도 없는 그림 같은 집’ 마치 노랫말처럼 동화 속과 같은 풍경이다.

이근태 목사는 서예가, 정원 관리사, 집 잘 짓는 목수, 하모니카 잘 부는 목사,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릴 만큼 재주 많은 종교인이다.

이근태 목사의 작업실로 향했다. 파란 보리밭 샛길로 접어들자, 은촌루(隱村樓)현판이 보였다. 흙토망집에는 이근태 서예가의 예술 혼이 깃든 세간들이 저마다의 사경(寫經)을 쓰고 있는 듯 경건한 자세로 결려있다.

잠시, 뜰에 앉아 이근태 목사와 한 몸처럼 느껴지는 토방집과 재래식 화장실을 훑는다. 불편을 자처하는 예술가의 흔적이 보인다.

이근태 목사가 붓을 잡는다. 성경과 금강경을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사경하는 그 모습에서 오래 묵은 인내의 흔적이 엿보인다.

‘오래묵은 인내의 흔적’ 목회자로써 살아온 긴 시간, 무릎을 꿇고 통곡의 기도를 드렸어도 아직도 신과의 대화가 끝나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이근태 목사의 나이 겨우 4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 전쟁으로 생사를 알 길이 없는 아버지, 너무 어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혈을 타고 밤마다 목사를 찾아온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 잘 키워보겠다고 서울로 떠나고, 어린 아들은 작은 어머니, 외숙모 집을 떠돌며 천덕꾸러기로 유년의 시절을 보내야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 잘못만난 탓이라고 수없이 회유의 시간을 가졌지만 칠순을 넘긴 목사의 가슴에는 아직도 상처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침침한 눈을 부비며 밤마다 사경(寫經)을 하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은 토방집 짓기에 혼신을 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토방집은 어머니 품속이다. 유년 시절 제대로 안겨보지 못한 어머니의 품속, 그래서 이근태 목사는 집짓기를 아직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편집자 주
 

1,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보은군 보은읍 학림리 학림교회 은촌(隱村) 이근태 원로 목사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목사님께서 학림리에서 교회의 터를 잡으신 일화가 있으시면 들려주시지요?

1980년대 맨 처음 학림리에 찾아들었습니다. 교회 앞마당에 초가집 한 채를 겨우 장만해 목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양로원 사업을 하겠다고 타지로 나갔다가 잘 안되어 다시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2, 서예를 아주 잘 쓰는 목사님으로도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붓을 잡게 되셨는지요?

저는 고향이 괴산입니다. 하지만 보은 학림리가 두 번째 고향이기도 합니다. 양로원 사업을 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 지인 한 분이 서예를 쓰면 어떻겠느냐고 조언을 했어요. 그때 운곡 김동연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사사를 받게 되었는데, 붓을 잡기 시작하면서 생활에도 안정을 되찾았고 목회 활동도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3, 학림교회 내부 건축물과 정원이 몹시 아름답고 정성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시기까지의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짓기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손재주가 남다르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으니까요. 어쩌면 너무 가난했기에 내 집 장만하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도 있었지요. 한국 전쟁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자, 어머니는 돈 벌겠다며 서울로 올라갔고, 저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라게 되었습니다. 참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소풍 한번 가보지 못하고 자랐으니 말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가, 한 번은 너무 배가 고파서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잠이 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참 풍요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곳 학림리에 교회를 세우고 사저를 짓기까지 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일일이 제 손으로 짓다보니 혼이 가득한 집이 된 듯합니다. 특히 조경에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무 박사가 다 되었지요.

4, 목사님은 다양한 종교인들과 교류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웃 종교 간의 화합과 교류를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 해 주시지요?

누구나 모든 종교를 인정하고 교류한다면 싸움이 벌어지겠습니까? 3.1운동 때에도 종교를 초월해 한마음 한 뜻으로 삼천리강산 모든 국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일본과 대항해 독립을 외쳤지 않았습니까?

이제 이념을 떠나, 정당의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가 되어야만 국가가 안정됩니다. 먼저 우리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선구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게나마 학림 교회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종교 초월한 모든 종교인들이 교류활동을 벌여왔습니다. 그 시작은 예술 활동이 가장 좋습니다. 각자의 목소리로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5,종교화합을 기원하며 금강경을 사경(寫經)하였고, 12폭 병풍으로 표구하여 불기 2563년 부처님 오신날 대성사에 전달하신다고 하는데, 금강경 사경을 시작한 연유는 무엇인지요?

하나님 말씀, 부처님 말씀 모두가 착하고 인간답게 죄 짓지 말고 살라는 뜻 아닙니까? 또한 예술의 혼은 종교를 초월합니다. 그러다보니 불경을 사경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옥천 대성사는 타 종교와의 교류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에 그 절에 기증하기로 한 것입니다.

6, 그동안 보은군 학림리에서 종교 활동을 하면서 평생 잊지 못할 인연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분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지요?

제가 이곳에서 터를 잡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지요.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3회 입선과 국내외 회원전과 개인전, 그리고 협회전을 통해 만난 무수한 사람들이 모두 저를 도와준 은인들입니다. 또한 저를 뒷바라지 해준 아내의 힘이 컸습니다. 목회자의 사모로써 살아온 그길 또한 험난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지요.

7,목사님 작업실에는 전기와 수도가 없고 화장실 또한 재래식을 고수하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풍요롭고 편안한 생활만 고집하지요. 그래서 저는 작업실에서 기거하면서 생활은 다소 불편하지만 그 안에서 붓을 들고 보니 편안해지더군요. 부족한 듯한 생활이지만 자유롭고 편안했던 것입니다.

8, 목사님의 앞으로의 계획이나 소망이 있다면 한 말씀해주세요.

저는 교회에서 은퇴를 했지만, 학림교회의 예배당에서 찬송가 소리와 기도 소리가 멈추지 않길 바랍니다. 이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소원이 더 있다면 죽는 그날까지 국가의 안위와 제 2의 고향인 보은군의 안위를 위해 붓을 들길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