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종 목사

나는 목사치고는 기도를 별로 안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느님께 드린 기도는 거의 기억을 합니다.
그런 내게 지금 떠오르는 기도가 하나 있습니다.
벌써 오래 전의 일로,
한 십여 년쯤 지났는데,
아직도 그 때의 일이 마치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 무렵의 나는 몹시 어리석은 데다가,
조급하며 옹졸하고,
혈기는 정수리를 뚫고 솟구칠 만큼 뻗치고 있었으며,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세상을 다 아는 척 떠들어대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주제에 정의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서슴치 않겠다는 객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내가 마침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렸고,
마침 파란 불이 켜지자 성큼 발을 떼었습니다.
한 발자국 들여놓았는데,
내 왼쪽 차도에서 짐차 한 대가 쏜살같이 내달았습니다.
자동차는 신호를 무시하고 달렸고,
그 바람에 뒷거울이 거의 내 귀를 스치듯 지나쳤습니다.

아찔한 상황,
하마터면 그 뒷거울이 내 뺨을 칠 수도 있었고,
그랬더라면 차의 속도로 볼 때
내 왼쪽 얼굴이 심하게 깨졌을 것임은
계산할 것도 없이 나오는 답이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저만치 달아나는 차의 꽁무니가 보였습니다.

그 순간 내 뒷목이 빳빳하게 곤두섰고,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거친 욕이 튀어나오고 있었습니다.
'저 씨' 하는 강세가 높게 붙은 욕의 첫 마디가
막 새어나오는 순간
'잘못은 차 운전사가 했는데 왜 내가 망가지려고 하느냐'는
말 한 마디가 튀어나오며 머리를 쳤고,
이내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이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생기는
맑은 가을날 아침에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솟아오르는 편안함까지.

이 모든 일어난 것이 일 초 정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입 밖으로 나오려던 욕이 녹을 때의
감격이라고 할 수 있는 기쁨,
그 순간의 경험이 손으로 잡아 본 것처럼 또렷하게 남아서
지금도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상황이 그대로 그려지곤 하는데,
그 자리에서 길을 건너기 시작하며 드린 짧은 기도.

'하느님, 나처럼 속 좁고 어리석은 것에게 이런 마음을 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순간의 감격은 참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내가 너그러워진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된다'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면서 그 느낌을 즐기는 데 여러 날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다 문득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그리 바쁘다고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길로 들어서야 했느냐는
꾸지람을 듣게된 것은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달도 더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때때로 느림의 미학을 즐긴다고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음,
느림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의는 하지만
몸에는 전혀 익지 않았음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때 내가 알게 된 것은
'말에서 행동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지,
지식이 삶이 되는 데까지는
얼마나 길고 아득한 과정들이 필요한 것인지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거리를 좁히는 일들에 관심을 가진 이들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들에는 거의 무관심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제 이런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눈에 거슬리는 것을
많이 보고 듣습니다.
소위 '잘못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그것을 '잘못'이라고 느끼는 것이 바로 거슬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슬림을
순전히 잘못을 저지르는
'저 사람'의 탓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때로 그런 사람을 꾸짖기도 하고,
또 많은 경우 입방아의 대상으로 삼아
그걸 흉보면서 즐기기도 합니다.

모두 설익은 감정의 표출입니다.
그런 입방아나 꾸지람으로
태도를 바꾼 사람이 있다는 말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로 고칠 사람이라면
그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넉넉히 고쳤을 사람이라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언젠가 청주여자교도소에 특강을 하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낯선 데 들어서서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서 처음 든 생각은
'세상의 온갖 좋은 말은 교도소 벽에 다 붙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말이 없어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일들은
이처럼 곳곳에서 일어나고,
또한 볼 수 있습니다.

말로 남을 고친다는 것의 어려움입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생각해 볼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거슬리는 무엇인가를 보면서
그것을 거슬린다고 느끼는 내 감정의 문제입니다.

내가 판단이나 시각이 정확하다면
다른 사람의 행위나 몸짓을 거슬림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그만큼 적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과 이성이 조화롭게 작용하는 것이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하고,
실제로 감정이 춤출 때 이성은
거의 뒤쪽으로 밀려나서 제 역할을 못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거슬림의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거슬림에 있어 문제의 선후를 따진다면 먼저는
언제나 거슬리는 짓을 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걸 거슬림으로 느끼는 나,
내 안의 가시들이 서걱거리며
서로 부딪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찌르는 자해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 바로
거슬림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시돋힌 자아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의 가시들을 녹여낼 수만 있다면
대상의 문제를 바라보는 눈길이
한결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눈길이 부드러워지면 입에서 나오는 말도
훨씬 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럴 때 말을 한다면 상대가 받아들일 가능성은
그만큼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말입니다.

그러면 가시를 녹이는 방법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다른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겁니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감정의 일어남과 스러짐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일이 일어나고 있는 바깥이 아니라,
그런 감정이 일어나고 있는 자신의 마음 작용을 말입니다.

어떤 것이 눈에 띌 때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곧바로 좋다고 하거나 싫다고 할 일이 아니라,
'아하, 이런 경우에는 내가 이렇게 반응을 하는구나' 하고
자신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해 주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정의 춤사위는 훨씬 부드러워지고,
그렇게 부드러운 춤사위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
보는 이 또한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거의 아주 많은 사고가
감정의 조절을 실패한 데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스릴 줄만 안다면
삶이 그만큼 넉넉하고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 때 얻은 것은 모든 것이 다 쓸만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리 용이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
그것은 우리의 감정에 제동장치를 설치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 제동장치는
본디 우리에게 있던 것이니 설치가 아니라,
쓰지 않던 것을 손질하여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루는 법이 몸에 배도록 때때로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구나 감정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내가 이런 경우에는 이런 걸 원하는구나',
'저런 걸 보면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하고
수시로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곧 이 제동장치를
익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제동장치를 잘 활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슬기롭게 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숨을 가볍게 한 번 내 쉬어 봅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들이 떠올라 춤을 추었는지를
천천히 되짚어 보는 겁니다.
이제 다시 숨을 부드럽게 들이쉬면서
감정을 대상으로 하며 말을 건네 봅니다.

'고운 춤사위, 부드러운 몸짓,
거칠거나 날 선 것으로는
나도 다치고 남도 아프게 하니, 잘 가도록 하자.'

그리고 다시 일상.
행복여행의 계속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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