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중편소설

 

여자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이정표를 확인한 뒤 갓길에 차를 세웠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온몸의 힘이 쭉 나져나갔다.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오후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점점 내려앉고 있었다. 가방에서 약도를 꺼내든 여자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감겼다.
거의 다 왔어요.

깊게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그를 향해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흐릿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여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왜, 이런 후미진 곳까지 왔어.

여자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구두를 벗고 조수석 쪽으로 몸을 옮기더니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까칠해진 그의 볼에 입맞춤했다.

순간, 그의 눈까풀이 개미의 더듬이처럼 움찔거렸다. 여자가 그의 어깨를 껴안자, 눈동자에 얇은 유리조각 같은 핏줄이 설핏 돋았다.

당신, 많이 힘들었군요. 보여줄 게 있어서 여기에 왔어요. 우리가 영혼의 꽃을 보게 된다면 곧 마음이 가벼워 질 거예요. 이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편히 쉴 수 있는 집으로요.
나직하게 흘러나온 여자의 목소리가 가닥가닥 갈라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의 입술이 밀치고 들어섰다. 여자의 열 손가락이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각지를 꼈다. 여자는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온 체취를 맡으며 한동안 몸을 풀지 않았다.
그만, 이제 마무리 짓고 싶어요.

여자가 목울대에서 걸쳐있는 속울음을 컥컥 토해내기 시작했다. 여자가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무엇을 마무리 짓겠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바로 이곳 근처예요. 조금만 쉬었다 가요. 몹시 가슴이 답답해요.

그가 두 팔을 벌려 여자의 작은 몸을 와락 껴안았다. 여자의 눈동자에 물방울이 어렸다. 물고기가 파드닥 튕겨져 나올 듯 눈이 깊어졌다.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여자의 치맛자락에 떨어진 물방울이 아래로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 때, 부 웅 하고 트럭 한 대가 그 옆을 휙 지나갔다. 그러자 차가 덜컹하고 흔들렸다.

울지 마. 더 이상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늘 미안 해. 좋은 남자 만나서·······. 그런데 보여 줄게 뭐야? 그곳으로 빨리 가는 게 좋겠어. 여긴 좀 위험하고 시끄러워.

여자는 몸을 일으켜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여자는 룸 밀러를 보며 눈두덩이 아래를 톡톡 두드렸다. 얼룩진 화장품이 엷게 퍼지면서 흘러내린 눈물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때서야 여자는 시동을 걸고 한적한 도로를 따라 핸들을 돌렸다.

여자는 다시 우측으로 핸들을 꺾어 무궁화 공원이라고 쓰여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쉽게 발견하기 힘든 곳이었다.

무궁화 공원이라는 푯말이 45도 각도로 누워 있었다. 푯말에 쓰여 있는 이름과 달리 무궁화는 한 그루도 없었다. 보도블록이 깔린 작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짧은 벚나무 터널이 나오고 청동상이 서있는 광장이 드러났다.

작은 학교의 운동장만 했다. 그곳에는 제멋대로 자란 넝쿨장미와 등나무 넝쿨이 땅 아래로 길게 뻗어 있었다. 나무 사이로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공원 분위기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 바로 저 청동상이에요. 당신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분명 저것은 케이가 말한 22번 토우를 본떠 만든 청동상이에요. 그가 영혼에서 피어나는 하얀 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여자는 그 청동상 앞에 바짝 차를 주차시켰다. 하지만 선뜻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여자의 눈에는 그 청동상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빛나는 업적을 남긴 위인들의 동상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청동상은 서슬이 퍼런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았다. 무궁화 공원에 서 있는 청동상은 여자에게 있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여자는 애써 그 앞에서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자와 달리 청동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왜 이런 곳으로 여자가 오자고 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깨진 시멘트 의자와 깡통 그리고 소주병, 또는 흩어져 있는 휴지조각들이 널려져 있을 뿐, 공원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마치 비행 청소년들의 집합장소 쯤으로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가 왜 이곳에 오자고 했는지 의아스러울 따름이었다. 분명 관리자가 있을 법 한데도 무방치 상태로 놓여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남자가 인상을 잔득 찌푸렸다.

그가 곧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청동상 앞에 서 있다가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여자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여자는 그의 신호를 읽고 있었으면서도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고민 끝에 오게 된 무궁화 공원이었다.

그런데 정작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까,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누군가 여자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불안감은 케이의 작업실에서 겪었던 악몽 때문일 수도 있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말 케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돈을 건넸으니까, 그동안 케이가 한 일에 대한 수고비는 치르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케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케이를 만난 이후, 잠시 흥분 속에 감겨 지냈다. 솟구치는 세포의 일렁임은 일종의 쾌감과도 같았다. 아니 쾌감이라기보다는 복수심에 중독된 상태라고 보면 더 정확했다. 통제가 불가능 했던 여자의 행동은 케이의 조언을 너무도 쉽게 받아들였다.

자유롭고 싶다. 그만 그물처럼 얽힌 굴레를 벗어던지고 훨훨 날고 싶어. 그런데도 소통, 소통, 소통. 세상으로 난 길과 소통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지 저 사람뿐이야.
늘 여자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었다.

언뜻 나무 사이로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몇 발자국 아래로 내려간 그가 지퍼를 내려 오줌을 갈겼다. 여자는 차 안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어깨 위에 눈발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낯설지 않은 그의 뒷모습, 그는 날마다 버릴 수 없는 관습을 겹겹이 껴입고 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의 뒷모습이 무겁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가 뒷좌석 차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이 내리네. 이러다가 고속도로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갇히는 거 아니야.
여자가 뒷좌석으로 건너가 그의 곁에 앉았다. 그의 옷 솔기를 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토우, 아니 청동상라고 말하는 게 맞아요. 당신은 저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글쎄, 어느 무명 조각가가 만들었겠지.

저 청동상은 여느 작품과 달라요. 왜냐하면 몸 안에 영혼이 잠들어 있는데, 조금씩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하얀 꽃을 피운데요.

무슨 그런 생뚱맞은 소리를 해.
꼭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것만이 당신과 내가 살 길이에요. 그 옆의 빈자리가 보이지요. 그곳이 곧 23번 토우가 들어설 자리에요. 저 청동상을 잘 살펴보면 분명 어딘가에 구멍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볼 것 같지도 않는 이런 후미진 곳에 뭣 하러 청동상을 또 세운다니?
후미지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니까 세우는 거지요.
그건 예산 낭비야.

여자가 스커트를 걷고 속옷을 벗어 내렸다.
그냥 당신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요.

그가 힘없이 혁대를 풀고 여자를 그 위로 올려놓았다. 여자는 스커트를 넓게 펼쳐 그의 무릎을 모두 덮었다. 그들의 살점이 하나도 보이진 않지만 예민한 부분이 나사처럼 꽉 맞았다.

전혀 전희가 없는 섹스, 단지 온기를 느끼기 위한 것이라고 여자가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가 어깨를 잠시 부르르 떨며 여자의 어깨에 두 팔을 감았다. 그 역시 마음이 몹시 추웠던 것이다.
당신의 몸속은 어렸을 적 누워 잤던 엄마 품속 같아. 그래서 좋아.

그의 입에서 간헐적으로 흩어져 나온 숨소리가 차안 가득했다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오르가슴은 전혀 없었다.
우리에게 집이 없듯이 더 이상의 오르가슴은 없어요.
여자가 허벅지에 뭉쳤던 힘을 슬그머니 풀었다.

이상하네. 전화가 올 때가 지났어요. 당신과 나의 오르가슴을 앗아간 더블유에게서 신호가 올 때가 지났단 말이에요. 벌써 23번 토우가 된 것은 아닐까요.

23번 토우는 다 뭐니? 토우가 된다는 말은 다 뭐야. 우를 잃어버린 당신 마음은 잘 알아. 하지만 이제 정신 차리고 그만 마음 추슬러. 아이는 또 가지면 되잖아.

어떻게 아이를 가져요. 당신도 오르가슴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를 갖는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우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23번 토우가 필요한 거예요. 당신은 그냥 제 옆에 있기만 하면 돼요. 모든 건 제가 다 알아서 하겠어요.

여자는 차창에 입김을 불어 넣어 W를 깊게 새겨 넣었다.
그때였다. 그의 바지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여자가 흠씬 몸을 떨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역시 더블유였다.

숨는다고 숨어질 것 같아. 어차피 내 손바닥 안이야. 이번엔 그 년을 30층에 숨겨 놓았던데 좀 높지 않냐? 난 높은 곳은 딱 질색이야. 조만간에 찾아가서 모조리 부숴 버릴 테야.

그가 알았으니 집에서 이야기하자는 말만 연신 내뱉었다. 무엇을 알았다고 하는 것인지, 여자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여자는 몸속에 있던 그의 성기가 줄어들 것을 염려해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래도 오르가슴은 없었다. 계속해서 더블유의 악담은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어차피 더블유의 신경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가 핸드폰을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흥분한 더블유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튀어나왔다. 여자가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여자의 말처럼 온기를 느끼기 위한 몸짓에 불과 했다. 핸드폰에서는 더 이상 더블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몹시 피곤하다며 눈을 감았다.
어제 밤에 한숨도 못 잤어. 십 분만 눈을 붙일 게.
여자는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한숨을 뱉었다.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자고 싶어.
여자의 무릎에 엎드린 그가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인지 거친 숨소리를 냈다. 차창으로 보이는 동상을 올려다보며 여자의 손이 희끗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너무 지쳐버렸어.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여자는 지하실에서 케이를 만나고 돌아온 뒤로 날마다 악몽을 꾸었다. 때때로 지글지글 살점이 타는 냄새가 아파트 구석구석 날렸다.

꼭 더블유를 제거해야한다.
그녀의 일념은 오직 더블유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 목표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
오늘 아침, 그를 만나기 위해 막 현관문을 나설 무렵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망설이다가 혹시 그가 아닌가하고 여자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막 수화기를 들으려는 순간 번호 숨김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수화기를 맥없이 내려놓았다. 그것은 더블유가 여자를 발견했다는 표시였을 수도 있었다.
 
더블유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 때 번호를 숨겼다. 몇 번이고 찾아와 집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을 때도 번호 숨김이라는 로고가 먼저 떴다.

여자가 거실을 가로질러 뚜벅거리고 나오면서 23번 토우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 토우는 장식을 달지 않고 심플하게 빚어 있었는데, 커다란 토우를 만들기 전의 샘플인 셈이었다.

둥근 얼굴에 눈, 코, 입이 뻐끔하게 뚫려져 있었고, 머리는 맨머리에다가 눈썹은 선각으로 나타나 있었다. 하체에 있는 성기는 움푹 들어간 채 음부의 자국만 조금 남겨두었을 뿐 그다지 특이해 보일 것도 없는 토우였다.

그런데도 여자는 장식장 위에 세워둔 토우를 바라보고 있으면 죽어버린 오르가슴을 꼭 되찾게 될 날이 올 것 같은 예감, 아니 확신이 들었다.

그 토우를 여자에게 만들어 보낸 사람은 바로 케이였다. 이름은 김 아무개로 시작한다지만 자신을 케이로 불러 달라고 하면서 신분 노출을 하지 않으려고 꽤나 신경을 곤두세웠다.

케이는 여자의 심리를 꿰뚫어 보았다. 누군가를 몹시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여자는 더블유를 피해 달아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때 차에 함께 타고 있던 아들 우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는데, 그만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여자는 타박상만 입고 멀쩡하게 살아났다.

그는 뇌를 검사해야한다며 여자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여자가 완강히 거부했다. 아들 우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렸는데 그녀 자신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게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케이에게 굳이 그런 사건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여자의 눈빛에서 절박함을 읽어낸 것이다. 오히려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는 여자의 눈빛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케이는 다른 일을 모두 미뤄 두고라도 여자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겠다고 굳은 약속을 했다. 그래서 23번 토우 샘플이 여자의 집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토우의 샘플에는 23번이란 번호가 찍혀 있었다. 여자는 케이에게 23번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너무도 어이없는 소리를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쁜 일들이 대부분은 23일에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에게 있어 그 숫자는 금융기관에서 받은 대기번호와 다를 바 없었다.

여자는 23번이란 숫자가 더블유에게 더 큰 의미가 있는 번호표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자와 케이 뿐이었지만 말이다. 23번 토우는 얼핏 보기에도 더블유를 몹시 닮아 있었다.

단지 사진 몇 장을 케이에게 건넸을 뿐인데, 더블유의 표정을 완전히 빼박은 토우를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여자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비상구가 없었다. 더블유만 없었다면 우를 잃지 않았을 것이며, 햇볕이 잘 드는 집을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더블유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서운 집착이었다. 그런데도 그와 여자는 멈추지 않고 만났다. 두 사람의 수십만 개 세포가 불꽃을 피우려는 순간, 더블유에게서 신호가 걸려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지 놀랄 지경이었다. 언제나 더블유는 결정적인 찰나에 벨을 울렸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 것인지. 그와 여자는 벌거벗은 자신들의 몸을 멍청하게 내려다볼 뿐 더 이상 섹스를 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가 핸드폰을 꺼놓기를 바랬다. 하지만 결코 핸드폰을 끄는 일이 없었다. 왜였을까. 여자는 그 때마다 그를 원망했다.

여자가 현관문을 닫자, 세이콤이 철커덕하고 걸렸다. 여자만 알고 있는 번호라지만 눈 감고 아웅 하는 짓이었다. 누구나 간단한 보조 장치만 있으면 얼마든지 잠금장치를 풀 수 있었다.

그런데도 최소한의 벽을 쳐두고 싶었다. 도둑을 피해서라기보다는 더블유가 찾아왔을 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자는 속셈에서 몇 겹의 잠금장치를 설치해 둔 것이다.

여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일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가 30층 숫자를 물고 올라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여자의 구둣발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자, 드르륵 하고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잠시 기우뚱했다.

가끔 이상 현상이 일어나서 늘 경비실에서 눈을 떼지 않는 라인이었다. 감시 카메라 앞에 여자가 정면으로 섰다. 무심코 카메라를 힐긋거린 여자가 사각지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본능처럼 카메라를 피했던 것이다.

케이를 만나고 돌아온 후부터 그런 증상이 심해졌다. 23번 토우의 샘플이 나오자, 곧바로 케이에게 삼백 만원을 건넸다. 선수금이자 계약금인 셈이었다.

혹시나 해서 이백 만원을 더 찾아 지갑에 넣어 두었다. 그런데 케이는 돈보다는 일 자체에 더 흥미로워했다. 여자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검은색 승용차를 향해 버튼을 눌렀다. 재빨리 차에 올라탄 여자는 잠금장치부터 눌렀다. 음습하고 컴컴한 주차장에 들어서면 오싹함이 등골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혹 뒤에서 누군가 숨어 있다가 냅다 달려들어 여자의 목을 비틀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더블유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눈을 매섭게 치켜들며 노려보는 더블유를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더블유 보다 선수를 쳐야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자가 그를 만난 건 5년 전이었다. 여자는 그에게 빠져드는 감정이 일시적인 가벼운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산다는 자체가 버거워서 잠시 위로를 받는 관계일 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서로의 감정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가 남긴 유산을 처리해서 서점을 개업했다. 대학 다닐 때 잠시 아르바이트를 해 본 경험 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의 행동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세상물정 모르는 초보자의 오만에서 나오는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겁 없이 뛰어들었지만 예상 밖의 매상을 올렸다. 대형 서점에 밀려 동네 서점들이 사라지고 없는 주택가 한가운데 서점을 열었다. 여자는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책 한 두 권쯤 가볍게 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재빠르게 알아챘다. 그래서 크게 홍보하지 않았는데도 손님이 늘어났다.

그는 여자가 운영하는 서점 건물 주인이었다. 나이는 40대 초반, 자칭 늘 외롭고 쓸쓸한 남자, 좀 더 멋있게 표현하자면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중년 남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여자의 귀에다 대고 그리움은 그리움을 낳는다며 조근 거렸다. 여자는 수시로 들어오는 도서 물량을 정리하면서도 그의 넋두리를 받아주었다.

때로는 그의 얼굴에 걸린 수심을 걷어주고 싶단 생각까지 했다. 하마터면 그에게 다가가 두 볼을 감싸면서 ‘당신은 정말 외롭군요. 어쩐다지요? 힘들면 잠시 제 어깨에 기대세요.’ 라는 말을 건넬 뻔 했다. 그 무렵 여자도 몹시 지쳐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었던 것이다. 어둡고 칙칙한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빨리 어른이 된다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의 생각은 자라지 않고 늘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었다.

여자의 부모는 그녀를 40대 후반에 낳았다. 아들 하나를 놓고 불임이 되어버린 탓에 더 이상의 자식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부모의 나이는 환갑을 훌쩍 넘었다. 늙은 부모는 딸을 잘 키워보려고 온갖 노력을 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딸이 또래 집단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의사소통도 점점 어려워졌다. 딸은 점점 부모와의 세대 차이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래 아이들보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아무리 살갑게 가꾸고 어여쁜 옷을 사준다고 했지만 젊은 엄마들의 감각을 따를 수는 없었다.

여자는 하루 빨리 늙은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여자는 유치원 졸업과 재롱잔치, 초등학교 졸업식과 학예 발표회 그리고 가을 운동회를 거치는 동안 점점 조숙해졌다.

늙은 부모의 희끗한 머리카락이 펄펄 날리는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급기야 늙은 부모가 결혼기념일을 기념하여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 집으로 돌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저도 젊은 엄마, 아빠를 갖고 싶어요.
그런데 부모는 얽히고설킨 감정의 고리가 풀리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었고, 더 이상 여자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자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오빠는 어린 여동생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회사에 매달려 지냈다.

여자는 그를 보는 순간, 늙은 부모의 희끗한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그래서 여자는 그를 통해 불귀의 객이 된 늙은 부모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했다. 쉽게 그에게 잠시 쉬었다가라고 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자의 말대로 부모는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도 여자는 크게 울지 않았다. 부모의 죽음은 책임에 대한 회피이며,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겼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여자는 결코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도 자신의 점포에 세든 여자를 보고 건물주와 세입자의 관계로만 생각했었다. 흑심이 깔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어찌 되었든 그 이상이 되었다가는 의부증이 심한 아내의 히스테리를 견딜 재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내는 그의 모든 것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호흡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데도 십 년을 같이 사는 동안 적응이 되었는지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추고 살았다.

햇빛이 잘 드는 아파트, 외제 승용차, 그리고 부부 동반 모임과 쇼핑, 가끔씩 외국 여행을 다녀왔지만, 생각처럼 괴롭다거나 따분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그들에겐 아이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위해 기꺼이 직장에 사표를 쓰고 처가에서 물려받은 부동산을 관리하며 지냈다. 남들은 지독하게 운 좋은 놈이라고까지 말했다.

질긴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한, 낡은 결혼 사진첩 속에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한, 그는 투명한 시간 관리를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다. 그는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잘 짜진 시간 속에는 오로지 아내를 위한 스케줄만 존재했다.

맨 처음 여자도 건물주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 쟁반 위에 찻잔을 얌전하게 올려놓았다. 때로 그들은 짬뽕이나 자장면으로 늦은 점심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는 국수 가락을 후루룩 넘기면서 여자의 따뜻한 눈빛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리고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접근할 때는 쓰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가 생각한 접근 방법 중 그 첫 번째의 단계, 여자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첫사랑의 주인공을 무척 닮았다며 모성애를 자극한다. 두 번째 단계, 자신의 아내로부터 전혀 연애 감정을 못 느끼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심지어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느니, 수녀님 같다는 둥, 지리멸렬한 궁상을 떤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로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사랑 자체가 ‘노 프로브럼’이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일단 여자를 넘어오게 만든 다음……. 그 다음은? 말 그대로 대책이 없는 것이다. 모든 책임은 일단 넘어온 여자의 책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게임을 훤히 꿰뚫고 있던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이 계획했던 방법으로 여자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가 일반 남자들과 다르게 행동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여자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몇몇 남학생과 사귀어도 봤고, 어설픈 섹스도 해보았지만 모두 미성년자들과 잤다는 미진한 느낌만 들었다. 그래서 그는 전혀 다른 느낌의 남자이었으면 했다. 어쨌든 만남은 그렇게 시작 되었지만 과정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상가 번영회 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책방에 문제가 생갈 때마다 나타났다. 처음 시작하는 사업이라서 전문가의 조언이 절실히 필요했다.

오빠하고는 상속문제로 시비가 엇갈리는 바람에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간판을 달고, 광고를 하는 일까지 그가 거들어주었다. 심지어 자신의 주머니를 헐어 밥까지 사주며 책방 로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몹시 술에 취한 그가 여자의 원룸으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여자와 진지한 관계가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사는 건 정말 지겹다고,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날따라 그의 와이셔츠 솔기에는 묵은 때가 얼룩져 있었다. 또한 날이 선 바지도 입지 않았다. 여자는 그런 그를 선선히 받아주었다.

묵은 때가 낀 와이셔츠 때문이거나 아니면 날이 선 바지를 입지 않은 탓이었을까.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여자와 짧은 시간을 보낸 뒤, 옷을 툭툭 털며 조용히 돌아갔다.

여자의 서점은 버스 승강장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런 탓에 잡지를 비롯해 간혹 소설책과 시집을 찾는 손님이 많았다. 여자는 책방에 들른 사람들을 컴퓨터에 기록해 두었다가 사람의 취향에 맞는 책을 선별해 주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문과 잡지의 광고에서 보았던 책과 연예인의 뒤를 캐는 잡지에 먼저 손이 갔다. 그래서 서점에 들어온 사람들의 취향을 재빨리 파악한 뒤 책을 권했다. 차츰 그 방법이 먹혀들었다. 전면 유리창에는 손님을 유혹하는 문구를 붙여놓았다.

예를 들면, 잠이 오지 않을 때 보는 책, 우울할 때 보는 책, 죽고 싶을 때 보는 책, 연애할 때 보는 책, 이별 한 뒤에 보는 책, 남보다 튀고 싶을 때 보는 책, 실패 했을 때 보는 책, 가난하다고 생각할 때 보는 책 등이었다. 사실 고리타분한 타이틀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 모양인지 심각한 표정으로 목록을 훑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낮부터 내린 비가 밤늦도록 멈추지 않았다. 그날은 무슨 일인지 그가 상가에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던 사람이었다. 웬일인가 싶어 핸드폰을 몇 번 걸었다. 하지만 전원이 꺼져있었다. 서점을 정리하고 막 전등을 끄려는 순간이었다.

한 여자가 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떡 벌이진 어깨, 그을린 얼굴, 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보통 여자들 보다 커다란 체구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경계를 풀고 그녀 앞으로 다가가 무슨 책을 찾고 있느냐고 물었다.

무슨 책이냐면 남의 남자 가로채는 여자 처리하는 책을 찾아.
그녀는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했다. 급기야 여자의 머리카락을 휘어잡더니 상가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상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녀의 손이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

주먹으로 가슴과 복부를 치자, 여자의 몸이 물웅덩이에 쳐 박혔다. 그 때였다. 그가 헐레벌떡 뛰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몸 위에 엉겨 붙어있던 그녀를 뜯어냈다. 금세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 서점으로 들어간 여자는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했다.
뭣 하는 짓이야!

이제야. 나타나셨구먼. 내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딴 짓을 하니? 누구 덕에 이 재산을 굴리고 사는데?
유치하게 왜 이래. 집에 가서 이야기 해.

순간,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쳤다. 그때서야 여자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매번 그가 짧은 성애를 마치고 성급하게 돌아가야 했던 집, 그 집 주인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세탁소 여자를 비롯해 문구점 여자, 꽃집 여자들이 어금니를 앙 물고 서 있는 그의 얼굴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희열에 들떠 있었다.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싸우는 모습을 보았으니 결코 공치는 날이 아니었다는 표정들이었다.

여자가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며 일어났다. 그와의 관계를 곧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리고는 어둠 속을 홀로 걸어 나아갔다. 여전히 비는 내렸고, 바람까지 몹시 불었다. 여자의 찢겨진 옷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여자의 몸에 새 생명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와의 관계가 연리지처럼 붙어버린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돈의 전부를 모두 쏟아 부은 서점을 쉽게 정리 할 수 없었다.

생각처럼 인수자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투자한 원금은 건져야 한다는 생각에 마땅한 인수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에 몇 번인가 그의 아내가 나타나 서점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점점 배가 불러왔고, 혼자 우를 낳았다. 하지만 여자는 웃었다. 팽팽한 싸움에서 여자가 당당하게 이겼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어린 핏덩이가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자는 사뭇 달라진 자신을 발견했다. 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뻐근하게 가슴이 저려왔다.

우가 태어나자, 그는 날마다 아기 용품을 사들고 여자의 집을 배회했다. 드러내놓고 자신의 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지만, 외면할 수도 없었다.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지도 못하는 상황을 몹시 괴로워했다.

그는 결코 아내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부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더블유에게 길들여져 있었던 탓이었다. 여자는 서둘러 헐값에라도 책방을 정리하고 그들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와 우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주 잠시 그와 여자 그리고 우는 숨어 지냈다. 남들 눈에는 몹시 단란한 가족으로 비춰졌다. 적어도 더블유가 여자와 우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날마다 세이콤 경보기를 올려놓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하지만 그 평화는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더블유가 여자를 찾아낸 것이다.

아파트 거실에는 세 명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양란은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엉덩이에 잔뜩 살이 오른 사내아이가 동화책을 열심히 읽다가 놀란 눈으로 더블유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를 닮은 아이였다. 우악스럽게 집안으로 달려들던 더블유는 눈에 보이는 집기들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이젠 독립하고 싶어. 당신에게서 벗어나고 싶단 말이야.

뭐라고? 독립! 무슨 독립.
당신은 지금 정상이 아니야.
더블유가 움켜쥔 주먹으로 여자의 배를 사정없이 쳤다. 여자가 더블유를 피해 욕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밀치고 들어오는 더블유의 몸에 부딪쳐 욕조 안으로 나동그라졌다. 또다시 더블유의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턱턱 숨이 막혔다. 여자의 비명이 집안 가득했다.

우가 욕실 문을 붙들고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더블유의 주먹은 여자의 배를 몇 번이고 더 강타했다. 여자가 입고 있던 치마에 붉은 핏물이 스며들었다. 그 모습을 본 우가 자지러질 듯 울어댔다.
우야, 어서 방으로 가. 어서 네 방으로 들어가.
멈추지 않고 커다란 더블유의 손이 여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머릿속이 흔들렸다. 입안에 고인 핏물이 흘러나왔다. 여자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쓰러졌다. 여자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우를 생각했다.

우가 보고 있으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우의 울음소리가 뚝 멎어 있었다. 여자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더블유의 가슴을 주먹으로 냅다 쳤다. 그러자 커다란 더블유의 몸뚱이가 힘없이 좌변기 쪽으로 나동그라졌다. 그 사이, 여자는 우를 데리고 차 키가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도망쳤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시동을 거는 순간, 성큼성큼 더블유가 아파트 입구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핸들을 꺾어 출구 쪽으로 내달렸다. 그때, 마주오던 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리고 모든 게 캄캄해졌다.

여자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천천히 청동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청동상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석조 위에 서 있는 청동상의 두 눈은 살기마저 느껴졌다. 마치 혈이 돌 것 같은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바짝 다가선 여자가 눈을 크게 치켜뜨고 다시 보았다. 얼마 전, 케이의 작업실에서 보았던 청동상의 눈빛과 같았다. 케이가 만들고 있는 토우의 모델은 극악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점점 청동상의 눈빛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각진 이마와 날카롭게 치켜든 눈썹, 그리고 꽉 다문 입술, 가름한 얼굴선, 분명 낯이 익었다. 그 얼굴은 케이를 닮아있었다. 아니, 진시 황릉에서 출토된 문관용 토우의 얼굴이 느껴졌다.

문관용은 진시 황릉의 내성 안쪽에 위치한 갱에서 발견된 토우였다. 그러고 보니까, 케이의 작업실에 서 있던 토우들과 청동상은 하나같이 진시 황릉에서 발견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케이의 설명을 들었을 때만해도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다. 여자는 오직 더블유만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진시 황릉과 문관용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케이를 몇 번 만나 계획을 나누는 동안, 그는 이 천년 동안 잠들어있던 토우에 대한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지, 여자는 그런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케이가 가져온 자료를 펼쳐 보면서도 귀찮기만 했다. 그런데도 케이는 진시 황릉에서 나온 토우에 관한 자료를 잔뜩 건네주고 갔다. 도무지 23번 토우에 어떻게 영혼을 불어넣을 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시 황릉에서 나온 토우와 청동상에 대한 지식은 구태여 케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서점을 개업하고 얼마 후였다. 진시황제에 대한 열풍이 불었다. 더구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시 황릉에서 발굴한 유물전시를 열었던 탓에 책이 쏠쏠 팔렸다.

약 2200년 전, 기원전 3세기 후반의 인물이었던 진시황제의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그 여파가 한국에까지 밀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케이처럼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진시황제는 자신의 지하무덤을 지키기 위해 실제 크기의 수비대와 동물 모형과 마차, 심지어 궁궐에 있던 신하들의 모형을 그대로 본떠 토우를 제작해 묻었다.

그런데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까마득하게 묻혀 있다가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케이가 관심을 보인 것은 진시황제가 사후의 세계에 심취했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의 샹시 지방에 영묘를 만들기 위해 36년 동안 7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동원했다니 엄청난 사업이었던 것이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고,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소유했으면서도 영혼이 쉴 집을 짓기 위해 그토록 안간힘을 썼다는 게 놀랄 일이었다.

알고 보니 왕좌를 상속 받은 13세 때부터 영혼의 안식처를 짓기 시작했다. 그런 행각은 재위 12년 동안 전국을 순행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로부터 이천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진시황제의 유물을 보면서 저마다의 안식처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가 진시황제 유물 중에서 유독 문관용(文官俑)을 기억하는 것은, 그 토우의 눈을 본 사람들 중에는 신비로운 경험을 체험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문관용 토우는 진시황제 가까이에서 서사(書寫)를 기록했던 인물이었다. 문관용의 눈을 보고 기적이 일어났는데, 몸이 아픈 사람이 병이 낫는가하면, 일이 꼬였던 사람들은 실마리를 찾아 성공했다는 것이다.

우를 잃었다는 분노는 여자를 잔인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더블유를 제거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

케이를 만나가로 한 그날, 여자는 우의 장난감을 부둥켜안고 몇 시간 동안 울었다. 구석구석 우의 그림자가 묻어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아파트를 빠져나가 6차선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네거리에서 우측 깜빡이를 넣었다. 압구정역에서 이백 미터 쯤에 있다는 약속장소를 쉽게 찾을지 걱정이 되었다. 언제나 케이와의 미팅은 아파트 근처 커피숍에서 이루어졌는데, 작업실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이다.

어떻게 토우를 만드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사실 약속 장소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출발했다. 케이는 핸드폰이나 사무실 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핸드폰 복제와 전화기 도청은 일반인들도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조심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

여자는 케이를 인터넷에서 알게 되었다. 우를 잃고 미친 사람처럼 지내던 여자는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인터넷에 매달려 살았다. 어렵게 인터넷 속에서 케이를 소개 받을 수 있었다. 케이는 ‘인간사랑’이란 회사의 대표였다. 인간사랑, 정말 그의 직업에 딱 어울리는 로고였다.

케이는 역할 대행업을 한다고 했다. 좀 더 솔직하게 설명하자면 청부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든 대화는 은어로 대신했다. 그래야만 사이버 경찰수사대의 범망을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인터넷상이었지만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할 만큼 긴장감이 돌았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이 이루어졌다.

한남대교를 지나 압구정동 쪽으로 차를 몰았다. 압구정역을 지나 가로수 길 쪽으로 들어가라고 쓰여 있는 메모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감각이 없었다.

그 때, 차창 유리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일단은 유료 주차장에 정차시키고 약속 장소를 찾아가는 게 빠를 듯 했다.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지만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핸들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 편의점을 지나 문을 닫은 카페 앞을 지나갔다.

생각처럼 유료 주차장을 찾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밀집해 있는 주택가 쪽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갔다.

여자는 약속 시간을 이미 30분이나 넘기고 있었다. 주택가 빈터에 차를 주차시키고, 식당이 줄지어 서 있는 상가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상가 유리창마다 검은 색으로 코딩을 해서 그런지 인테리어가 독특하단 생각이 들었다.

정원에 무덤을 만들어 놓고 사는 일본의 작은 도시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웬일인지 지나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중국 음식점을 지나, 인도 음식점, 그리고 일본 음식점을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인간사랑’이란 작은 아크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글씨체가 너무 작아서 고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 고생을 덜고 케이의 사무실을 쉽게 찾았다는 우쭐함 때문인지 마치 보물찾기에서 성공한 기분이었다.

둥그런 쇠 턱이 촘촘하게 박힌 나무 계단을 내려가자, 방음장치가 설치된 문이 나타났다. 잠근 장치가 무려 3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벨을 길게 눌렀다. 냉기가 풀썩 발아래에서 올라왔다.

오싹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문이 열리고 검은 작업복 차림의 케이가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케이는 여자를 기다리다가 그만 깜박 잠들었다고 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흙냄새와 약품 냄새가 뒤섞여 날렸다. 몇 개의 조명등이 천정에 매달려 있었다.

흐릿하게 보였던 물체들이 점점 선명하게 떠올랐다. 여자는 오래된 무덤 속이라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양쪽으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던 토우들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자가 벽을 따라 들어섰다. 뒤를 따라오던 케이가 겁먹을 거 없다고 말했다. 더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자, 테이블이 희미하게 보였다. 케이가 조명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컴컴했던 주위가 갑자기 환해졌다.

와! 이것들이 모두 당신 작품들인가요?
그렇소.
다양한 모형들로 가득하군요.

여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토우를 보았다.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토우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작은 것은 이십 센티미터 정도였고, 큰 것은 이 미터는 족히 되어보였다. 서 있는 토우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품의 샘플들이지. 하지만 여기에 있는 토우는 속이 텅 빈 것들이야.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죄수의 형상을 한 것도 있고,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보았던 수배자의 얼굴도 있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진시 황릉에서 출토된 토우의 기법을 차용했다는 거야.

머리를 몸과 분리해서 만들었으며, 공기구멍을 몸통이나 사타구니 쪽에 터놓음으로 해서 흙이 갈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 확실한 것은 죄를 지은 자들의 얼굴만 빚었다는 거야. 모두 지친 영혼을 담아내지 못해 울부짖는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가. 아직은 모두 허깨비들이야. 당신은 토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

단지 토제의 인형 정도라고 알고 있는 건 아니야? 고대의 토우는 주술용의 우상으로 만들거나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용 토우, 그리고 장난감용으로 사용했던 토우가 대부분이었지. 흙뿐 만 아니라, 돌과 뿔 그리고 뼈를 이용해서 만들기도 했어.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토우는 이런 토우의 개념과는 약간 달라. 만드는 방법도 다르지만 부장용과 주술용을 겸하고 있어. 부장용 토우는 죽은 자의 봉사자이며, 무덤에서 시중은 드는 자라서 무사(武士)나 기예 (技藝)를 제작해서 묻어버리지. 주술적인 경우 유방이나 엉덩이를 과장하여, 아이를 잉태한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해. 또한 그것은 풍요를 비는 대지의 여신을 의미해. 출산의 신비나 존경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해. 하지만 현실은 그런 토우가 가당키나 한가.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

어지고 갈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야.
여자는 케이에게 도시 한복판에 이런 사무실을 차려 놓는다는 게 불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곳은 토우를 전시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본 게임을 하는 작업실은 따로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갑자기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내가 당신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주면 당신도 나를 도와줄 수 있는가.
무슨 일인데요.

아주 간단하지.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집을 찾고 있어. 사실 23번 토우를 이용해 내 집을 지을 생각이야.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나는 이곳에 믿을 사람만 부르지. 내 계획에 협조해줄만한 사람 말이야. 이곳을 찾아오는 길목이 미로처럼 뒤엉켜 있어서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어. 인간 사랑이란 푯말도 꼭 필요할 때만 걸어두지. 당신이라면 내가 만들고 있는 토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당신은 절대로 나를 배신할 것 같지가 않아.

한마디로 노우! 예요. 저는 단지 더블유를 처리하면 그만이에요. 필요한 돈을 모두 주겠어요. 감쪽같이 처리만 해주세요. 그이한테도 비밀로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아요.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요?

더블유를 닮은 토우를 제작한 뒤에, 그 본으로 거푸집을 만들고 동을 녹여 청동상을 만들 거야. 그리고 그 속에 영혼을 담아 무궁화 공원에 세우면 끝이야.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여자는 케이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우의 원한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처음엔 다들 몹시 두려워하지.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해서 찾아온 사람들이야. 겁먹을 것 없어.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내가 이런 일을 하기 전, 나도 당신처럼 누군가에게 나의 고통을 의뢰했던 적이 있었지. 아주 오래전 일이야. 내가 의뢰한 사건은 양부모를 제거하는 일이었어. 우리 삼남매를 키우겠다고 자청한 그들은 어찌나 우리를 학대했는지 몰라.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어. 여동생은 양아버지로부터 성적학대를 당했어. 양어머니는 이유를 불문하고 우리를 사정없이 매질했어. 그들은 정말 저질들이었지. 그들을 제거하는 일이야 말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역사적 사명이라는 의식까지 들었으니깐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토우를 만들기 시작했어. 사실 토우가 뭔지 어찌 알았겠어. 손재주가 남달라 무엇이든 만드는 일을 좋아했던 것뿐이었어. 처음엔 문방구에서 사온 찰흙으로 인형을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어. 그런데 그게 나의 천직이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어. 꽉 찬 스무 살이 되던 해였던가. 역사적인 거사가 이루어졌지. 일이 성공하기까지 몇 번의 고비를 넘겼어. 나도 인두겁을 쓴 인간인데 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겠어. 난 멈추지 않고 토우를 빚었어. 그래서 지금의 내가 되었던 거야.

여자는 무엇에 홀린 듯 넋이 나가 있었다. 자신에 찬 케이의 목소리 때문인지 잔뜩 주눅이 들었다. 케이의 눈동자 안에는 검은 돛대를 단 배 한 척이 둥둥 떠 있기라도 한 듯 검은 물빛이 가득했다. 여자는 뒷목이 뻣뻣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럼 당신은 조각가인가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제거된 캐릭터의 표정과 똑같은 토우를 만들어 고온에서 구워내지. 물론 그 토우 안에는 박제된 영혼이 담겨져 있어. 흔한 작업은 아니야.

일본이나 상가포르 그리고 대만으로 팔려 나가는 토우들은 대형 작품들이지. 병원이나 사무실의 실내장식으로 쓰이기도 하고, 개인이 소장하기도 해. 주문에 비해 물량이 턱없이 부족하지. 작품의 재료는 당신처럼 부탁해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양해지는 거야. 캐릭터의 얼굴 표정은 어떤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 일그러지는 정도가 달라져. 인간이 어쩌면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의 죄를 지은 자의 얼굴이야말로 작품의 극치를 맛볼 수 있으며 고가로 팔려나가. 알고 보면 그들은 나약한 겁쟁이들이야.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야. 그래서 그들은 잔인한 무기로 자신을 포장하곤 해. 나를 비롯해 두 명의 동생들은 고통스러워하는 토우의 얼굴이 나올 때마다 몹시 희열을 느껴. 일종의 정신적 치유라고 생각해도 좋아. 에이 더러운 놈들.

갑자기 케이가 혀를 끌끌 차더니 카페 바닥에다 침을 홱 뱉었다. 그리고는 눈동자를 돌려 옆을 째려보았다. 여자는 케이의 행동이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개인적 취향이려니 했다.
그럼 제거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건가요?

영원히 토우 속에 갇히게 돼. 구천을 떠도는 영혼은 결코 쉴 집이 없게 되는 거야. 모든 작업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가마에서 두 동생이 맡아서 하고 있지. 매우 신비한 일은 많은 사람들이 완성된 토우 앞에 서 있으면 행복해한다는 것이야.

죽을 것 같이 괴로웠던 사람들도 토우를 바라보면 기분이 업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특히 어려서부터 학대를 받았다든가, 죽음의 위협을 당한 사람들은 반응이 빨리 오지. 그런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손을 잡기 시작했어. 당신이 여기까지 오는데 만났던 사람들도 모두 피해자들이야.

그들도 토우를 하나씩 소장하고 싶어 하지만 완성된 토우는 겨우 스물두 개뿐이야. 영혼을 조각으로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의 토우에 한 개의 영혼만 심는 게 나의 철칙이지. 하지만 23번의 토우에는 내 영혼을 심을 작정이야.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토우가 완성될 것이야.

23번 토우가 완성되면 당신에게 받은 계약금을 돌려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제거해달라는 더블유는 죄질이 약한 편이라서 좀 걱정이지.

죄질이 약하다니요? 그녀가 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듣고도 그러세요?
그녀는 집착증에 가까운 의부증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흔한 병이지 않는가. 특별할 것도 없고. 더욱이 그 죄질이 약해서 토우의 표정이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어. 악질들이 세상에서 하나 둘씩 사라질 때마다 밝은 기운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내가 하는 일은 인류 평화를 위한 일이야. 자, 내 손을 잡아봐.

케이의 손은 무섭도록 차가웠다. 여자는 케이가 던진 인·류·평·화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결코 부담주진 않겠어. 조금만 도와주면 돼. 당신을 처음 만나던 순간, 왠지 감이 왔어. 당신이라면 나를 도와 줄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케이는 다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자에게 그곳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여자가 들어간 공간은 토우 소품을 만드는 작업실이었다. 흙과 작업도구들이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다.

작업대에는 반쯤 만들다만 토우가 일그러져 있었다. 작업실 내부는 훨씬 밝았다. 케이가 흙덩이를 뛰어넘어갔다.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물건 앞에 서더니 천을 와락 벗겼다. 미완성으로 보이는 토우가 나타났다. 처절하게 슬픈 눈빛,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입술, 미세한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앙상한 볼, 모두가 케이와 더블유, 아니 여자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당신 얼굴이군요. 아니 더블유의 얼굴이군요. 아니, 내 얼굴을 닮은 것 같기도 하군요.
여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토우의 머리 뚜껑을 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머리만 비어 있는 게 아니야. 사타구니 성기 끝 부분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가마에 구울 때 터짐을 막기 위한 숨구멍을 만든 것이야.

사소한 물건들조차 숨구멍이 있는데 하물며 흙의 숨구멍을 막아 놓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마에서 구워낸 토우는 캐릭터의 분진이 들어가 있을 곳이야.

그래서 금이 가면 안 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우를 청동으로 마감을 해. 무궁화공원은 내 고향이 보이는 곳이야. 그곳은 내 소유야. 앞으로 그곳에다 영혼이 쉴 수 있는 공원으로 만들 작정이야.

그곳에 세워진 청동상은 영혼을 잃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줄 거야. 23번 토우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빛을 내 뿜게 될 거야. 샘플들의 표정을 보라. 간절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않는가.
당신이 점점 무섭군요.

케이는 한쪽 구석에 만들다만 토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24번 토우가 될 거라고 했다. 곧 24번, 25번, 26번, 27번 토우를 빚을 예정이며, 이것들은 해외로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무궁화 공원, 나의 영원한 안식처. 그곳에는 이미 22번 토우가 세워져 있어. 약도를 줄 테니까, 한 번 찾아가봐라. 그런데 주의해서 볼 게 있어. 서 있는 청동상의 다리 사이 즉 성기가 있는 부위를 잘 살펴봐. 그곳에 작은 구멍이 있는 데 이쑤시개 크기 정도의 구멍이 뚫려있어. 그곳은 영혼이 빠져 나오는 곳이야. 손가락으로 비벼보면 하얀 분진이 묻어나는데 그게 바로 영혼이 만들어낸 꽃이야. 그 영혼의 노래를 듣게 되면 당신은 분명 살고 싶다는 희열을 맛보게 될 거야. 나에게 일 맡긴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야. 자, 여기 미완성인 24번을 보라. 당신이 주문한 더블유의 토우보다 먼저 시작했으

나, 당신의 고통스러워하는 눈빛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
24번 토우는 전문 카드깡을 하고 있는데, 연체료를 갚지 않으면 인신매매를 하거나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른 인물이야. 25번 토우는 돈 냄새를 맡고 있는 듯 탐욕스러운 얼굴 표정으로 빚을 거야.

돈을 벌기 위해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른 위인이지. 몹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26번 토우는 개인의 정보를 훔쳐서 선량한 사람들의 등을 쳐서 먹고 사는 인간이야. 입수한 정보를 이용해 얼토당토않게 돈을 뜯어내는 자야. 그도 곧 제거 될 것이야. 26번 토우의 눈을 다른 어떤 토우에 비해 광채가 뿜어져 나도록 제작하려고 해. 27번 토우는 나이가 많은 여자야. 그 늙은 여자를 제거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바로 여자의 딸이야. 30년 동안 가출 여성들을 이용해 화대를 뜯어먹고 살았어. 늙은 여자의 입술은 어린 영혼을 빨아먹는 흡혈귀의 입술처럼 피돌기를 돌출시켜서 제작할 작정이야. 청탁해오는 의뢰인의 진술이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뒷조사를 해. 당신이 부탁한 캐릭터의 뒷조사도 이미 끝냈어. 더블유는 당신말대로 불임이었어. 남편의 아이를 낳은 당신을 죽이려고 이미 손을 쓴 상태였어. 그놈의 혈육이 뭔지. 내 양부보도 불임이었는데, 졸지에 고아가 된 우리 형제들을 입양하고도 시험관 아기 시술을 여러 번 시도했지. 그 때 내 나이 여덟 살, 동생이 여섯 살, 그 밑 여동생이 네 살이었어. 우라질, 내 친부모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고 사라졌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겠지만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아. 양부모는 우리를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처음에는 몹시 좋아했어. 한꺼번에 셋이나 되는 애들을 얻었으니 말 그대로 축복이었지. 그런데 그들은 멈추지 않고 애를 낳으려고 노력했어.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신에 성공하지 못하자, 결국 우리에게 그 화살이 돌아왔어.

여자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정말 케이의 말이 사실인가도 싶었다. 그 때 창고 같은 곳에서 뭔가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가 그 곳으로 다가가더니 문을 발로 꽝하고 찼다.

당신이 할 일은 23번 토우 캐릭터를 불러내 감정이 극에 치닫도록 신경을 자극하는 거야. 쉽게 말하면 그 여자가 가장 잔혹한 감정에 치닫도록 하는 것이야. 싸움을 해도 좋고, 흉기를 사용해서 협박을 해도 좋아. 그 찰나에 내가 그녀에게 수면제 들어있는 주사를 놓겠다.

현실에 대한 애착이 많은 여자라서 쉽게 죽여서는 안 돼. 그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악에 받친 감정이라니 어렵군요. 점점 자신이 없어져요.

캐릭터의 뇌에 적신호가 들어왔을 때 숨통을 끊어놓아야만 영혼의 꽃이 하얗게 피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6번과 10번 그리고 19번 토우가 우연하게도 의뢰인과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숨을 끊어놓았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 그 토우 앞에 서면 다른 토우에 비해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경험해. 내 영혼의 꽃이 피는 토우를 만들고 싶어. 내 눈 밑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보라. 양부모에게 빼앗긴 영혼을 전부 돌려받지 못해서 생긴 흔적들이야. 그러니까, 이곳을 나가는 대로 무궁화 공원을 찾아가보도록 해. 그곳에 가면 내 말을 곧 믿게 될 것이야.

여자는 거무스름한 케이의 눈 밑을 올려다보며 벌벌 떨고 있는 손을 맞잡았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옆방의 문이 갑자기 덜컹거리더니 신음 소리까지 났다. 그 소리는 짐승의 신음소리에 가까웠다. 여자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케이가 커다란 토우를 그 문 앞에 세워두었다. 다시 잠잠해졌다.
그 안에 누가 있나요?
아무 것도 아니야. 신경 쓸 것 없어.
사실 여자는 더블유를 만나 피터지게 싸울 자신이 없었다.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당신이 했던 말처럼 영혼의 꽃을 피운다는 말도 생소하고 섬뜩해요. 그렇다고 제 계획이 변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시간을 주세요.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싫든 좋든 일을 처리해야 해.
갑자기 케이가 바지 주머니에서 접혀 있는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나이프를 세워 자신의 손가락을 베었다. 붉은 피가 솟구치며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무슨 짓이에요?

난 다른 사람들과 달라. 23번 토우는 마치 피돌기가 살아있는 토우를 만들 거야.
여자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막 지하 문을 밀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문이 덜컹거렸다. 그러자, 앞에 있던 토우가 퍽하고 깨지면서 뭔가 밖으로 튕겨 나왔다.
아직도 살아 있었군.
제발 살려 줘요. 이곳에서 꺼내 줘요.

울부짖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케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그 곳을 빠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긴 쇠갈고리 같은 바람이 목덜미를 자꾸 잡아당겼다. 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몇 칸 올라섰을 때였다.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에서 결투라도 벌이고 있는 모양인지 시끄러웠다. 토우가 퍽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석회 벽을 기대고 서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때, 갑자기 발바닥이 묵직해졌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벽 쪽에서 흥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송진처럼 생긴 액체였다. 발을 들어 올리자, 끈적끈적한 것이 들러붙어 있었다. 케이를 만나기 위해 지하로 들어갈 때만해도 없었던 것이었다. 여자는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비명이 문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순간, 피투성이가 된 케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는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구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흙벽돌 무늬가 그려져 있는 셔터가 내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온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신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출구에서 쏴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여자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뛰기 시작했다. 문은 사람 하나 빠져나갈 정도의 틈새만 남아 있었다. 바짝 엎드려 다리부터 밀어 넣었다. 여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계단 밑바닥에 쓰러져 있는 케이의 몸이 희미하게 보였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날렸다.

고름이 흐르는 더러운 인간들의 몸을 만지기가 싫어.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난 죽은 영혼과 결합할 수밖에 없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거. 무슨 조화속인지 몰라도 선과 악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가고 있어. 악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건져내는 일은 하얀 영혼의 꽃을 피우는 일이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케이가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게 분명했다. 여자는 셔터 틈에 끼어 있었다. 셔터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지만 무게를 감당하기 힘겨웠다. 완전히 틈새에 끼어 있는 꼴이었다. 계단은 마치 무덤으로 들어가는 긴 터널처럼 보였다. 여자가 바짝 엎드려서 몸을 뺐다. 그리고 그곳을 빠져나와 무조건 택시를 잡아탔다. 온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차를 어느 곳에 주차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 여자는 케이의 작업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시 황릉에서 출토된 토우는 속이 텅 비어 있던 것과 달리, 이곳 청동상은 속이 꽉 차있었다. 더구나 토우의 눈동자가 보는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달랐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는 예리한 칼날 빛이 뿜어져 나왔고, 측면에서 보면 수심이 가득하게 보였다. 머리에는 긴 관을 쓰고 상반신은 두 겹의 긴 저고리와 하반신은 긴 바지를 입고 네모난 형태의 발판 위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그 무엇인가가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다리와 다리 사이, 정확하게 말하면 성기부분이었다. 그 부위가 도드라져 있었다. 더구나 귀두부분에 동그란 단추처럼 생긴 것이 매달려 있었다. 여자가 그것을 잡아당기자, 하얀 분말이 주르르 쏟아졌다. 깜짝 놀란 여자가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났다.
차 안에서 잠들어 있던 그가 차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가 잠에서 덜 깬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있었다. 여자가 그의 손을 와락 잡아끌고 청동상 앞으로 다가섰다.

하얀 가루가 묻어나는군요. 당신도 이곳에 손을 대 봐요. 신기하게도 손가락 끝에 하얀 꽃잎이 떠올라요. 아, 기분이 몹시 좋아져요. 토우가 피워내는 영혼의 꽃일지도 몰라요. 어쩜 당신과 나의 안식처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번뜩이는 여자의 눈빛을 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엉겁결에 청동상의 성기에서 흘러나온 하얀 가루를 만졌다. 곧 구멍을 막고 있던 마개가 터져버렸다.

앗, 이게 다 뭐야. 밀가루 같아.
여자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또 다시 흠씬 놀랐다. 여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청동상의 왼팔과 몸체 사이에 있는 구멍이었다. 오래전에 그 구멍은 대나무에 글씨를 써서 끼워두는 곳이었다. 진나라 때 글씨를 쓰는 재료는 대나무였으며, 그 구멍에 끼워둔 서류는 황제에게 보고할 서류였던 것이다. 구멍 속에는 붉은 종이가 꽂혀 있었다. 여자는 구멍 속에서 종이를 뽑아들었다. 붉은 종이는 빳빳했다.

마치 이 천년의 세월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 죽간(竹簡)을 뽑아들었을 때의 느낌이 그랬을 것도 같았다. 여자는 종이에 쓰여 있던 글씨를 읽고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케이가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의 뒤를 밟고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케이의 작업실을 빠져 나온 이후, 줄곧 누군가의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빨리 빠져 나가야해요. 케이가 오고 있어요. 어서 당신이 차 시동을 걸어요.
누가 온다고?
케이가 나를 죽이려고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집으로 가봐야 해.
더 이상 집은 없다고 했잖아요.
그는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도대체 그 종이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케이의 생각이 바뀐 게 분명해요.
케이가 누군데?
케이가 누구인지는 나도 몰라요. 그는 파우스트에 나오는 영혼을 먹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같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이곳으로부터 멀리 떠나야 해요.
여자의 손은 여전히 붉은 종이를 잡고 있었다. 무궁화 공원을 겨우 빠져나왔을 무렵, 여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붉은 종이를 펼쳐들었다.

‘23번 토우는 바로 너야. 어린 아들과 여자의 성기 그리고 집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네가 제격이야. 그 정도면 가장 잔인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셈이지. 증오심으로 활활 타고 있는 너의 눈빛을 보았어. 거기에 비하면 더블유는 너무 약해. 내 영혼을 담을 만한 그릇이 못되지. 단지 남편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어두워 성깔을 부려대고 있을 뿐, 그녀의 영혼은 텅 비어 있어. 한 번의 기회는 주겠다. 내가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버린다면, 널 놓아줄 생각이야. 왜냐고? 난 게임을 좋아해. 쉽게 얻은 영혼에게서는 매력이 느껴지지 않거든. 시간이 없어. 네가 무궁화 공원에서 이 쪽지를 발견하는 순간, 나는 더블유를 데리고 너를 향해 가고 있을 테니까.’

여자가 가방을 열었다. 그곳에는 23번 토우의 모형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23번 토우의 얼굴은 여자를 닮아 있었다. 여자가 거실을 걸어 나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방 속에 넣어둔 것이다. 23번 토우 옆에는 며칠 전에 찾은 이백 만원도 얌전히 들어 있었다.
좀 더 빨리 가요. 그가 오고 있다는 느낌이 와요.

그가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도로 안전 턱에 걸려 차가 덜컹거렸다. 그때, 맞은 편 차선으로 검은색 승용차가 무궁화 공원을 향해 들어오기 위해 우측 깜빡이를 켰다. 운전석 차창이 아래로 내려지고, 케이와 더블유의 얼굴이 힐끗 보였다. 막 구워낸 토우처럼 얼굴빛이 몹시 붉었다. 여자가 몸을 바짝 엎드렸다. 순간, 버석 가슴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손바닥도 갈라지고 피부 곳곳에서 진흙가루가 흩어져 날렸다.

아, 그녀는 오래 전부터 23번 토우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든 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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