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선원 법현스님

 

행복에 관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목표가 바로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기도하여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도 행복의 모습이고, 수행하여 부처가 되는 것도 행복한 모습이다. 바이블에서는 행복한 사람에 관하여 비교적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0절까지 말씀을 읽어보면 쉽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며,

슬퍼하는 사람은 위로 받을 것이며,

온유한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만족할 것이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며,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며,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 하고, 자비를 베풀며 마음을 깨끗이 해 평화를 위해 일하면 행복의 주체인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한다. 곧 행복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참으로 이해하기도 쉽고 우리 삶의 목표를 정확히 제시해주기도 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닮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극작가 폴 제랄디(P. Geraldy)는 말했다.

“ 행복은 우리 집의 화롯가에서 자라나는 것이지 남의 정원에서 따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화로(火爐)가 두 개 있는 집은 화목하지 않다고 한다. 아릿한 기억 속의 그 시절, 화로는 단순한 난방기구가 아니었다. 화로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오순도순 정을 나눌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생각과 성격이 제각각인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화목(和睦)의 구심점(求心點) 노릇을 톡톡히 했다. 화로가 한 집에 두 세 개씩 있다는 것은 어쩌면 가족 간에 대화와 정이 끊어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그래서 화롯가에서 행복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화롯가를 노변(爐邊)이라고 번역했는데 노변(路邊)이라고 잘못 알아들은 이도 있다. 화로에 불이 들어있으면 모여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고구마를 묻어놓았다가 놀놀하게 익으면 꺼내서 껍질 벗겨 먹으면 그 얼마나 맛이 있었던가?

그런 것이 행복인가? 행복을 영어로는 happiness라고 한다. 그것은 happen 즉 일어난 것, 일어난 일을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어나는데 어디서 일어난 것이냐 하면 바로 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뜻이 있다.

불경에서는 더욱 더 구체적으로 행복을 얻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와 가까이 하지 말고 슬기로운 이와 친하며 존경할만한 사람을 섬겨라. 분수를 지키며 공덕을 쌓지 않았다 생각하며 스스로 올바른 서원(誓願)을 세워라. 널리 배워 기술을 익히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바른 말을 하라. 부모를 잘 섬기며 처자를 아끼고 보호하며 올바른 생업에 정진하라.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지키며 친족에게 인정을 베풀고 비난 받을 일을 하지 말라. 악업을 즐거움으로 삼지 말며 술 마시고 분수를 잃지 말며 게으르지 말라. 다른 이를 존중하고 스스로 겸손하며 만족을 알고 은혜를 생각하며 시간 있을 때면 가르침을 들어라. 참아내고 온순하며 자주 수행자를 찾아가서 진리에 관해 물어라. 스스로를 통제하고 청정한 행을 닦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깨닫고 마침내 열반을 이룰 수 있으면 그것이 인간에게 최상의 행복이다.”

이렇게 해서 찾아지는 행복은 어떠한 비방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무언가를 얻고 얻지 못함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며 걱정도 분노도 없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고 『숫타 니파타』의 「대길상경」에서 말했다. 『숫타 니파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공 지영씨의 장편소설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불교의 초기경전이다.

“하지만 행복은 이미 지나가 버린 그림자이다. 어리석은 자만이 현재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고 영국의 시인 F.톰슨은 말한다.

시인의 감성으로 말한 것이겠지만 불교적으로 말하면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행복 또한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것을 현재화 하여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행복이 무엇이든지 그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행복하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수행한다. 그런데 행복하기 위해 하는 공부와 일과 사랑과 기도와 수행이 행복한 느낌으로만 다가오는가? 그렇지 않다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행복도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행복의 반대인 불행을 다 써 버리면 그 끝에 행복을 온전히 가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왔다. 그래서 행복을 유보(留保)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행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늦춘다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꼭 그렇지 않지 않는가?

그렇다면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아니 알기보다는 규정해야 한다. 어떻게 되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어떤 상태가 되어야 행복한가? 부자가 되는 것인가? 명예를 얻는 것인가? 유명한 것인가? 지식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인가? 난 사람(famous man)이 되는 것인가, 든 사람(knowledge man)이 되는 것을 말하는가, 된 사람(enlighten man)이 되는 것인가? 그 어떤 것도 바른 것이며 또한 바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의 규정이 가장 바른 것이다. 다만, 어떤 것을 행복이라고 규정하든 그것이 오래 지속되어야 참 행복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고 행복해 하면 행복한 것이다. 행복해 하라! 행복이 그대 것이다!

(불기2554년 12월 26일 열린선원 해넘이 법회)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