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곡스님은 무엇이든지 개념(槪念)을 먼저 파악하고 기본을 바로 한 뒤에 그것을 응용하든지, 방편을 써서 활용하든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불교학개론서를 읽어야 하는데 본인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종단적인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반드시 김 동화박사와 황 성기박사가 저술한 <불교학 개론>을 권하고 지금도 그 책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불교학 개론>은 김 동화박사의 <불교 범론>을 보완한 것이다. 5~60년대 불교법란을 겪을 시절에 종단의 입장을 올곧게 정리하고 많은 이들이 법복을 바꿔 속복을 입을 때 당당하게 불교조계종 즉 태고종을 주장하고 선(禪)과 교(敎) 그리고 정토(淨土)에 모두 정확한 해행(解行)을 했던 황 성기박사 즉 고봉스님의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운곡스님이 강의를 하고 있거나 했던 곳에서 작성한 일지나 인터넷 게시판을 살펴보면 스님의 언행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다. 강의를 시작하면 반드시 개념을 정립하고 과목을 분단한 뒤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는 정통 강의법을 구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강의나 설법 뿐 아니라 염불을 하거나 종단의 행정을 하거나 불사를 하거나 중앙종회의 회의를 하더라도 정확성이 지나칠 정도여서 적확법사(的確法師)라고 불리는 것이다.

스님이 태고종 총무원의 교무부장을 하실 때 밑에서 모시고 살았다. 그 때 스님은 봉원사의
법사(法師)소임도 맡고 있을 때여서 백중(百衆)법회를 대신 보라고 해서 스님의 사찰인 홍천 안양사(安養寺)로 갔다.

안양사는 홍천읍 결운리 군부대 뒷산에 있는 사찰인데 높은 곳에 있어서 전망이 좋았다.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법당에 오르니 법당의 이름이 좀 달랐다.

안양사라면 중심법당이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전각이고 그 법당의 이름은 대개 미타전(彌陀殿)이라 하거나 부석사처럼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안양사는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고 씌어 있었다.

아미타는 인도말을 중국글자로 바꾼 것이고 아((阿)는 영어의 a처럼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이므로 아((阿)를 빼면 문법적으로 반대의 듯을 가지게 된다.

즉 미타는 수명(壽命) 또는 광명(光明)을 뜻하므로 아미타는 무량수(無量壽) 또는 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수명이 무한한 부처님’ 또는 ‘광명이 무한한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국어로 뜻 번역한 무량수전 또는 무량광전이라고 하지 않으려면 인도말 소리 번역인 아미타전이라고 해야지 그냥 미타전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법회를 본 뒤에 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뭐 그렇게 꼭 남들과 달리 아미타전이라고 해야 합니까?”

그랬더니 특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무신 소리여어! 말이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고 생각과 말따라 행동이 정해져서 부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인데 정 반대의 것을 머리 떼고 말하면 어떡하라고? 꼭 붙여야 한다고 불교학 개론시간에 안 가르치던가, 교수들이?”

하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그냥 한 번 을러 본다는 것이 교수들까지 욕 먹일 뻔 했다. 그렇게 정확하신 분이다. 뒤에 보니 도원스님이 주지로 있는 김제에 있는 청운사의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도 무량광전(無量光殿)이라고 편액을 달았고, 선진규법사가 대표로 있는 봉화의 정토마을도 수광전(壽光殿)이라고 이름했다.

운곡스님은 법주사에서 월산(月山)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법주사의 암자인 탈골암 위의 복천암(福泉庵)에서 치문(緇門)과 사집(四集)을 배우고 사교(四敎)와 대교(大敎)과정은 금강산 건봉사의 서울 포교당인 충신동 감로암(甘露庵)에서 수학하였다.

스님을 지도한 강사는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학승이자 태고종 종정을 역임하신 보성(寶城) 정 두석(鄭 斗石)스님의 사형인 세봉스님이었다. 치문의 모든 이력(履歷)을 마친 종장(宗匠)으로서 더욱 공부에 매진해 돈암동 신흥사에 계신 인간문화재 48호 단청장인 원 덕문스님에게 불화단청을 배워 이수자가 되었으며,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포교에 대한 원력은 그야말로 부루나존자의 그것과 닮았다.

다른 사람은 한 번도 가기 싫어 몸무게도 늘렸다 뺐다 하고 없는 병도 만들어 수술을 하기도 하고, 돈이나 힘을 써서 안 가는 군대에 두 번이나 갔다 온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군인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군법사(軍法師)제도가 잘못 진행되어 조계종의 한 종파의 소속으로만 가게 되어 있어 현재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젊은이들이 불법에 귀의하게 하는 좋은 장치인 것도 틀림없다. 스님은 군대를 제대하고 군포교의 원을 세워

다른 사람들은 대위로 임관하는데 대한민국 최초로 소령(少領)으로 임관하여 군법사를 간 인물이다. 아니 최초가 아니라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다. 곳곳의 군법당에서 불자를 늘리고 법회를 하기 위해 스님이 들인 노력은 군법사들 사이에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우리 태고종에 각종 신행단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결성을 도와주거나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총무원 교무국장을 맡던 내가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수행도량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선암사를 총림도량으로 선포하는 ‘태고총림 선암사 설치에 관한 기획안’을 마련한 것은 87년의 일이었고, 연화회라는 친목단체를 전국비구니회라는 전국규모의 공식단체로 지정하고 강원교육을 실시하도록 지원한 것은 90년 초의 일이었다.

그리고 태고종만이 가지고 있는 교임(敎任)제도를 활성화 하기 위해 전국교임협의회를 결성하고 교육지도를 하였고, 결혼한 스님들이 수행과 교화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승려부인회를 결성하여 연수교육도 하고 행사도 하는 등 매우 바쁜 일정을 진행할 때가 스님과 인연을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들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선뜻 나서지도 않았고 특히나 보살님들을 내보내는 데는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그 때 스님은 보살님과 두 자제분과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그 취지를 당당하게 밝히고 활성화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때 초등학생이었던 딸 설리는 법학대학원과정을 독일에서 밟고 있는 재원으로 자라났고 아들 호준군도 튼튼한 장부로 자라나 열심히 공부하여 군법사로 군대 안의 포교에 정진하고 있다. 호준군이 텔레비전에 나가 자랑스럽게 한 말이 생각난다.

“스님의 아들로서 친구들과 지내기가 어떤가요? 부끄럽지는 않은가요?”
“부끄럽기는? 자랑스럽지요.”
“왜요?”
“사장님도, 교수님도 우리 아버지한테 돈 갖고 와서 절하고 가니까요.”
스님을 비롯한 방송에 동참한 모든 이들도 방송을 지켜본 이들도 활짝 웃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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