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정경포럼(이사장 김미자)은 2024년 3월 16일 오후1시, 안동시민회관 낙동홀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제2회 정경포럼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연락처: 054)842-4080

정경포럼은 안동 보경사 오경스님이 주축이 된 불교경전 공부모임인 정해학당과 관음사 원경스님이 이끌어 가는 원경학당이 연합하여 2022년 결성한 포럼으로, 지난 10여년간 공부한 불교사상을 기반으로 이웃 종교, 학문, 문화들과의 교류와 담론을 통하여 서로 탁마하여 향상하며 불교의 저변을 확대하고 상호간의 이해를 통하여 서로 존중하고 화합하는 아름다운 사회를 이룩하고 이 시대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든 단체이다.

개회행사에서는 정경포럼 이사장의 인사말과 불교계, 기독교계 대표들의 축사과 안동시장 등 기관장들의 축사가 있을 예정이다.

심포지엄은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 전 참여연대 대표)의 사회로 열리는데 기조강연과 주제발표로 진행된다. 기조강연으로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가 “심층 종교의 선상에서 보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그리고 이번 심포지엄을 기획하신 오경 스님(정경포럼 대표)이 “종교간 대화의 필요성 그리고 불교의 세계관과 구원론”을 강연한다.

오강남 교수는 강연 원고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는 어느 면에서 서로에게 거울을 들어주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깨침 vs. 메타노이아, 염불 vs. 예수기도, 상즉상입 vs. 하나 됨, 자비 vs. 사랑 이라는 네 가지 면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소통과 대화의 접촉점을 찾아본다. 오강남 교수는 “무엇보다 주로 믿음을 강조하는 서양 종교를 위해 깨달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데 공헌할 수 있는 것이 불교가 서양에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물이 되고, 이로 인한 ‘이종 교배’로 피차간에 아름다운 새싹이 돋아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발표는 제1발표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의 성해영 교수가 “탈종교 시대와 종교간 대화: ‘구원’과 ‘수행’ 개념을 중심으로”를 발표하고,

제2발표로 고려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자 사단법인 마인드랩 이사장인 조성택 교수가 “탈종교 시대, 대화의 ‘걸림돌’(skandalon)과 지향점: 한국불교의 성찰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며,

제3발표로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정경일 박사가 “보리수와 십자가 : 고통의 한 대지 위에 서 있는 구원의 두 나무”를 발표한다.

성해영 교수는 “종교의 근본 목적이 ‘개인의 영적·존재론적 성장’과 ‘더불어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수행 개념에 주목한 대화 시도는 두 종교가 수행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전변(transformation)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지와, 수행의 결과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접근방식이라 한다.

조성택 교수는 “한국불교에서 일상의 실천을 가로막는 한 가지 장애물은 ‘깨달음 지상주의(至上主義)’다.”고 하면서 “불교의 핵심적 가치는 ‘많은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깨달음을 ‘실천’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고 한다.

정경일 박사는 “그리스도교의 창을 통해 보는 실재는 ‘하느님’이고 불교의 창을 통해 보는 실재는 ‘공(空)’이라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구원되는 자, 구원하는 자, 구원의 사회성을 논의한다.

심포지엄의 토론 패널로는 정경포럼의 회원이기도 한 강윤정 안동대 교수(정해학당), 박지영 동의대 교수(정해학당), 최성달 작가(원경학당), 조정현 문학박사(원경학당), 이주향 수원대 교수가 참여하며, 안광덕 안동 용계교회 담임목사가 참여하여 목회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 구원이란 무엇인가?」 심포지엄 기획의 의의는 첫째로 종교간 대화의 필요성을 꼽을 수 있다. 왜 종교 간의 대화를 해야 하는가? 모든 종교는 자기만의 교리체계가 있는데, 이 교리체계를 공고히 하는 것만 하면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견해에 갇히게 될 수 있다. 감옥에 갇혀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탈출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종교교리를 도그마(獨斷)라고 하는 것과 같이 종교인이 자신의 견해에 갇히는 경향이 심한데, 세상에 대한 견해가 다른 종교와 대화는 자기 생각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생각(견해)의 감옥을 벗어나게 해주는 구세주인 다른 종교는 또한 서로 비교를 통해 자기 종교의 진정한 메시지를 더 깊고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근간이 믿음인데,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바른 믿음이라 할 수 없으며 자기 생각을 열어 놓고 바른 진리를 향한 순수한 마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맹세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될 수 없다.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하여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바른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에 부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들(종교인)은 지금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지속적으로 무엇이 옳고 바른가를 논의하고 논쟁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틀에 갇혀서 자기 것만 고집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 만나 탁마하고 소통함으로써 함께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향상하는 것이 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종교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간의 대화는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를 성찰하게 하고 또 이 땅에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화합하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 또한 표층적 언어는 서로 다르더라도 심층적 내용은 같을 수 있다. 결국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층종교로 가면 서로 다른 종교 사이에도 접점이 생길 수 있다. 심층종교의 측면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종교는 표층종교에서 심층종교로 가야 한다. 이곳이 종교간의 화합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담을 쌓으면 불합리하고 삿된 사이비 종교가 판치지만, 담을 허물고 서로 교류하며 상대방의 장점을 배우고 서로 탁마하고 비판하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종교가 되기를 경쟁하면 함께 성장하고 향상할 수 있다.

우리의 시대는 물질적 성장은 이루었지만 정신적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고 정신적 성장을 주도해야 할 종교가 사회의 모든 분야중에서 가장 뒤처져 있다.

우리는 전통적 가치체계는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체계는 확립되지 못한 정신적으로 공허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살고 있다.

삶의 방향을 제시할 인생관과 세계관과 가치관을 제공하는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종교인들이 일반인들을 정신적으로 설득하고 인도할 만한 정신적 수준을 성취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갈수록 약화되어 가고 있다. 탈종교의 시대로 가고 있다. 우리는 종교의 질적 성숙과 향상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간의 대화가 그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종교간 대화를 할 수 있는 바탕은 인간은 모두 종교적 심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그냥 살면 되는데 사는게 무엇인지를 삶 전체를 조망하면서 반성적으로 질문한다. 나란 무엇인가?, 세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여기는 어디인가? 등 나와 세계 그리고 인간 삶에 대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이며 전체적인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해답를 구하고자 하고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삶이라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려는 내면적 욕구가 있고 이것을 ‘종교적 심성’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인간에게만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종교는 이에 대한 자기 방식의, 다양한 형태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자기의 주장을 진리라고 주장한다.

이 질문에 대한 자기의 대답이 옳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자기 주장이 강하다. 그 주장들이 만나면 자주 대립하고 갈등하고 충돌한다.

그래서 서로 만나거나 교류하려고 하지 않는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의 근본으로 돌아가면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인 각각의 종교적 주장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근본인 그 질문으로 돌아가면, 즉 종교적 심성으로 돌아 가면 모든 종교인은 하나가 될 수 있고 진정한 대화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승기신론」에서 깨달음은 불각(不覺)을 깨닫는 것에서, 즉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이 ‘무지(無知)의 자각’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나와 세계,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길잃은 어린 양이 되어 길을 찾게 되고 궁극적 진리에 진정으로 눈을 뜨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종교적 심성이며 구원의 시작이다. ‘궁극적 진리추구’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종교인의 공통분모가 되며 서로 탁마(琢磨)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의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크게 보면 물질적 욕구의 충족에 만족하지 못하고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종교적 심성)이 강한 모든 종교인은 진리추구라는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다.

그 길고 외로고 어려운 진리추구의 여정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도와주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서로 탁마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향상은 우리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향상을 가져온다.

당나라나 신라와 같은 최고의 문화전성기는 바로 심층종교로서의 불교의 전성기였다.

이번 심포지엄 기획의 두 번째 의의는 종교에서의 핵심개념인 ‘구원’개념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 대화하는 것이다.

종교의 근원적인 기능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이 구원의 핵심 징표이다.

종교를 떠나는 이유는 ‘향상’하고자 하는 바람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향상’이란 자기에게 갇히지 않고 탁마하는 것으로 이는 종교만이 갖는 특징이기도 하다.

구원이라는 것은 나쁜 상황에서 바람직한 상황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향상을 뜻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핵심은 믿음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를 단순화하면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가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예수를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행동이 바뀌는 것이다. 믿으면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거듭 나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과 연결되는 것이다.

불교에는 기독교의 구원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개념이 없다. 기독교의 구원과 가장 가까운 불교의 개념은 ‘천도’(薦度)이다.

살아있는 자나 돌아가신 분이 법문을 듣고 생각을 바꾸어 지금보다 더 좋고 바람직한 세상으로 옮겨 나는 것이 천도이다.

一切唯心造라고 하여 생각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그래서 천도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나쁜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바꾸면 나쁜 세상이 좋은 세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것이 천도이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을 바꿀 것인가? 진리의 말씀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 이치를 깨달아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천도의식은 진리인 법을 설하는 법회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말씀을 통해서 거듭나는 것이며 영혼이 바뀌는 것이다.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고 삶이 바뀌는 것이고 생각과 말과 행동, 身口意 삼업이 모두 바뀌는 것,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세상이 바뀌는 것이고 천도가 되는 것이고 구원이 되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불교의 구원은 깨달음, 성불, 해탈, 열반일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은 향상하고자 하는 종교의 본연의 기능을 되살리고자 구원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탁마하는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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