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사람이야. 그러니까 미워하면 안 돼.

-내가 화가 엄청 났다는 걸 나채국에게 어필해야 한다.-

은비칼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단지 그가 얼굴을 찌푸리는 걸로는 절대 화가 난 티가 나지 않았다.

그의 외모가 원체 천사 같은 외모라 그렇다. 그래서 이처럼 아무리 화를 내도 티가 나지 않는다.

또 자신이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던 은비칼은 다시 자신이 화가 났다는 걸 티 내기 위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채국을 향해 도끼눈을 떴다.

색다를 그의 표정에 나채국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 화났으니 계약 철회해!-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나채국이 조목 조목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오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구두 계약도 진짜 계약이거든요. 민법 제 563조에 따르면 “약정함으로써 그 효력”을 인정한다 라고 되어 있어요. 게다가 동영상을 녹화해 증거로서의 증거력을 확보 해 놨거든요. 실장님은 말 그대로 우리의 계약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요. 죽을 때까지.. 지금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화만 낸다고 계약이 철회되지는 않아요.”

-잔인한 사람들.- 

은비칼의 머릿속으로 이 단어들이 스쳐지나갔다. 은비칼은 덫에 걸린 게 맞다.

나채국과 오강심이 철두철미하게 계획한 모종의 계략에 절대 빠져 나갈 수 없는 덫.즉, 그는 그들이 요구하는 불가항력적 조건을 무조건 들어줘야 한다.

은비칼은 현재 피가 꺼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의 프레임 안에서 놀아난 은비칼이 애절하게 물었다.

“구체적 계약 사항도 없는데 죽.. 죽을 때까지요?”

“네. 죽을 때 까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죠.”

말을 하고 나서 무언가 회심의 미소를 날리는 나채국이 은비칼은 꼴도 보기 싫었다.그러나 그는 지금 달리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숨이 막혀오고 혈압이 상승할 뿐.

나채국은 남은 콜라를 들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얻을 건 다 얻었으니 이제 볼 일 없다’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은비칼은 우두커니 서서 눈동자만 굴려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순간 그도 모르게 겁에 질려 중얼거렸다.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사달라고 하면 큰일인데..”

“양심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한 채에 15억이나 하는 걸 사달라고 할 정도로 염치 없지는 않아요.”

소머즈 귀를 달았는지 은비칼이 중얼거린 소릴 듣고 대답을 한 나채국 때문에 은비칼은 한시름 놓았다.

“하. 그럼 다행이고요.”

“하지만 각오는 하셔야 할 걸요? 이번에는 좀 상당히 센 걸 요구할 거거든요.”

은비칼은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지금 또 화가 난 것. 하지만 어쩔 수 없기에 조용히 마음속으로 구구단을 외워본다.

-이 일은 이, 이 이는 사, 이 삼은 육, 이 사람들이 정말..-

그가 항상 마음에 화가 일어날 때 외워보는 구구단이었지만 이상하게 이번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 정도로 은비칼은 화가 크다는 뜻....

순간 그가 마귀 같은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오강심과 나채국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대로 달려가 그들의 뒤통수를 후려 갈길 것 같겠지만 그의 주먹은 그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는 마치 한 맺힌 청상과부처럼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쳐댔다.

은비칼은 이렇게 생각하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래도 인류를 위해 내가 참아야지. 이렇게 암호를 빨리 푼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니까 내가 참아야지. 무조건 내가.. 참아야지..-

은비칼이 그러는 걸 모르는 나채국과 오강심은 분주히 남은 일을 마저 했다.

탁탁 타다닥.

그들이 두드려대는 자판소리가 은비칼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이상하게 그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들이 열심히 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관리자는 부하 직원이 열심히 일할 때 뿌듯하다. 아무튼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은비칼도 제 자리로 돌아가 스마트 폰을 꺼내 마저 하던 게임을 했다.

************

삐삐삐삐 삐삐.

분명 도어락을 열기 위해 버튼을 누르는 소리였다. 미캐는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건가?-

실망한 듯 고개를 떨군 미캐가 다시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팟!

갑자기 켜진 전등에 미캐는 눈이 부셔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 있었던 미캐의 눈은 밝은 빛 때문에 눈알에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미캐가 다시 눈을 떴지만 도로 감았다. 시리다고 해야 하나? 상당히 고통스러운 빛이었다.

그러자 모든 감각이 귀로 집중됐다.

여러 개의 조그만 바퀴 끄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정도 되는 발소리가 같이 들렸다.

-휠체어? 나를 또 어딘가로 데려가려고?-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 미캐는 앞을 보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눈을 뜨자 눈부심에 빛에 적응하려는 듯 저절로 눈이 빠르게 깜박여졌다. 빛 화살이 눈을 찌른 듯 미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 고통을 통해 빛에 적응된 미캐의 동공을 통해 냉장 창고의 내부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조금 전보다 시야가 선명해졌다. 상당히 큰 냉동 창고는 철제 프레임으로 된 수납 선반이 즐비해 있었다.

그 선반 마다 새하얀 시트에 무언가 돌돌 말아 놓은 듯 싸여 있었고 상당히 많은 숫자로 보였다.

바닥에는 철제 프레임 사이로 뚜껑이 있는 노락색 플라스틱 통이 군데 군데 뭉쳐 있었다.

미캐는 그녀가 여기 냉장 창고에서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벽 쪽으로 이동할 때 걸린 것이 그것이라고 알아챘다.

한 쪽이 트인 세 개의 원이 이어진 모양 가운데 동그란 서클이 있는 표지가 붙어있는 노란색 통은 생체 폐기물을 담은 합성수지로 된 상자였다.

미캐는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지만 이곳이 냉장 창고이기에 상하거나 썩으면 안 되는 것들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것은 알았다.

발소리와 함께 바퀴 끄는 소리가 멈췄다.

-나한테 오는 게 아니다.-

미캐는 그대로 몸을 숙여 프레임 아래를 살폈다. 네 개의 조그만 주먹만한 우레탄 재질의 바퀴 사이로 신발이 네 개 보였다.

미캐는 그들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 분명 그녀가 목적은 아닌 듯싶었다. 미캐는 조용히 엉덩이와 묶인 다리를 이용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있는 프레임 선반 쪽으로 다가간 미캐. 살짝 긴장한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고개를 프레임 선반 옆으로 살짝 내밀어 사람들을 살폈다.

순간 미캐의 얼굴이 경악한 듯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바퀴 네 개는 침대형 이동 카트에 달려 있던 것이었다.

그 침대에는 사람 시체가 놓여 있었고 두 명의 남자가 하얀색 천으로 그 시체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선반의 빈 곳에 올려 놓고 태블릿을 꺼내 뭔가 체크를 하듯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미캐가 창고를 둘러봤다. 프레임 선반에 사람 고치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모두 죽은 사람의 시체였다.

-설마.. 나처럼 실험을 하고 죽인 거야?-

순간 미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지난 날의 실험에 대한 고통이 물밀 듯 스쳤다. 곧바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건데? 대체 왜? 모두 괴물이라서 죽인 거야? 이런 미친 새X들.-

그녀는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들이 선명해졌다. 그간 실험을 통해 그녀가 겪은 고통은 하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울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무지 분노가 잦아 들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이성을 잃고 폭발해버렸다.

“나는 사람이야! 나는 사람이라고!”

시체를 선반에 올렸던 두 남자가 화들짝 놀라 미캐를 쳐다봤다.

분명 기절해 있어야 할 미캐가 의식을 찾은 체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당황한 두 남자는 당황해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하자 그 남자가 서둘러 냉장 창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남겨진 남자가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통화가 끝났는지 전화기를 다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그리고는 말없이 움직이지 않고 미캐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미캐는 그들의 태도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웃어? 나는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죽고 싶은데.. 너는 웃니? 이 X발 개X끼야!-

같은 사람이었다. 얼굴도 있고 다리도 두 개고 팔도 두 개인 사람. 미캐가 그들과 다른 건 단지 능력만 있다는 것뿐이었다. 능력이 있음에도 미캐는 사람이 맞았다. 근본은 사람인 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미캐는 그들이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고통에 몰아 넣고 죽이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그는 사람이 아니라는 듯 미캐를 연신 히죽거렸다. 묘한 그 남자의 웃음이 미캐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만약 네가 나와 입장이 바뀐다면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내게 괴물이니 멋대로 죽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러지 못할 걸?-

미캐는 화가 치밀어 오르자 온몸에 소름까지 돋았다. 불같이 일어난 화는 또다시 그녀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아닌 건 너희들이야! 이 개X끼들아! 이 악마 새X들아! 너희들이나 죽어 버려!”

미캐의 악다구니는 공허한 메아리 같았다. 그 남자는 아무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못했다. 여전히 로봇처럼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체 웃고만 있었다.

순간 미캐는 투명인간처럼 느껴졌다. 마치 다른 세계로 툭 떨어진 느낌. 이질적이고 또 적응하기도 힘든 그런 묘한 느낌. 미캐는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묶인 몸. 또 갇힌 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입으로 그들에게 저주를 쏟아내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의 욕과 저주가 냉장창고에 흘러넘쳤다.

그럼에도 남자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미캐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물론 비웃음은 항상 단 상태로.

미캐의 저주가 끝난 것은 밖에 나갔다 다시 들어온 남자 때문이었다. 그 남자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고 미캐는 그걸 본 즉시 무언이지 알아챘다. 바로 마취주사.

그제야 그 남자 둘이 미캐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천 명이 넘는 적을 상대해도 두렵지 않다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미캐가 다시 소리를 쳤다.

“죽일 테면 죽여 봐! 10X끼들아! 너희들이 죽인다고 내가 죽을 것 같아!”

말은 이렇게 내뱉었지만 그녀는 지금 너무 두려웠다. 그녀는 미약했고 또 묶여 있어 불가항력적인 몸.

그들이 주사를 하면 맞아야 하고 또 기절을 하는 건 불변이다. 그저 악을 쓰며 부정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미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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