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옆에서 아이신의 말을 훔쳐 듣던 김탄은 순간 깜짝 놀랐다. 

박토는 여자를 싫어한다. 그 사실은 여러 번 증명이 됐다. 

-그렇다면 박토가 설마..

김탄은 겁에 질린 얼굴로 마영식을 쳐다보았다. 즉 박토에게 찍힌 마영식이 안쓰러웠던 것.

마영식은 김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심각한 얼굴로 박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신의 조심하라는 말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김탄도 마영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박토가 바이크 랜덤 시트에 가방을 싣고 고정시키고 있었다.

-저걸 오운족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 한다고? 말도 안 돼…-

분명 박토의 행동은 수상하며 의심이 갈 만한 행동. 김탄이 마영식에게 속삭였다. 

“정말 영식이 형이 맘에 드는가 보네. 토 형이 저럴 사람이 아니잖아.”

순간 무언가 불길한 촉을 느껴 화들짝 놀란 마영식이 갑자기 박토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아. 토 형! 그런 건 내가 해도 돼.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에겐 이미 약속된 사람이 있으니까.”

영식의 말에 박토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미간부터 찌푸렸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마영식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약속된 사람이라니..”

박토의 물음에 마영식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뭔가 불편한 듯 얼굴을 붉히고는 우물쭈물 미적거리기만 했다. 

-이건 분명 무언가 있다. 수상하다 -

박토가 김탄을 쳐다보았다. 분명 마영식은 여기 오기 전 김탄과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김탄은 마영식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빨리 이실직고 하라는 듯 박토가 김탄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서늘한 그의 시선에 김탄은 순간 이마에 딱밤을 맞은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모두 심리적 착각.

하지만 절대 말할 수 없었던 김탄은 그저 박토와 시선을 마주친 적이 없다는 듯 그대로 눈알을 돌린 후 하늘을 향해 치켜떴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오운족은 아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수상하다. 

박토는 지금 모두가 수근대는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고 또 화도 날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빠진 박토가 마영식을 추궁했다. 

“나에 대해서 무슨 얘기 했어? 말해. 당장. 마영식 군.”

중저음의 박토의 목소리는 마영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영식의 시선이 그도 모르게 박토의 손으로 향했다. 

박토의 손은 정권 지르기 전 상태처럼 주먹을 쥐고 있었다. 순간 마영식은 전에 박토에게 맞았던 상처가 다시 욱신거렸다. 

-차라리 이실직고를 하자. 맞아 죽는 것보다는 욕을 먹는 게 낫다. –

마영식이 잠깐 뒤를 돌아보며 오운족과 김탄의 눈치를 살피고는 박토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그게.. 아이신 형이 토 형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조심하라고 말했었거든. 그래서 혹시 그.. 그게 아닐까..”

박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니야. 쓸 데 없는 얘기를 하고 있었네. 난 여자를 좋아해. 정말이야.”

“그런데 방에 야한 잡지도 컴퓨터에 야동도 없던 걸? 그리고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도 없다고 했잖아. 김탄한테 걸그룹 또라또라 멤버 지숙이도 좋아하지 말라고 했다며? 정말 여자를 좋아하는 게 맞아? 토 형?”

박토는 그대로 똥 씹은 얼굴로 변해버렸다. 그는 20살에 군대를 다녀 왔다. 여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는 생태계.

제대를 하고 난 후에는 젖먹이 박월을 키우느라 여자는 구경도 못했다. 그나마 그가 만난 여자는 어린 시절 친구로 지냈던 웬수 같은 아수하 밖에 없었다. 

박토는 착잡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이신의 말은 귀담아듣지 마.. 오운족은 내 절친이었지만 나를 배신하고 우리 오운족을 멸족시킨 배신자들이야. 그런 배신자들이 하는 말은 들을 필요조차 없다. ”

배신자라는 소리에 마영식은 경기를 했다. 그는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남자다. 몰랐던 오운족의 사실에 마영식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배신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야. 형. 형도 알지? 내가 의리에 죽고 사는 남자라는 거. 정말 믿을 수가 없다. 아이신 형과 아수하 누나가 배신자라니..”

“정확히는 과거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야.”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야. 오운족을 믿지 않는 게 좋아. 토 형.”

박토는 다시 한 번 마영식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힘든 상황에서도 또 자신이 피해를 보는 입장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고 도와주는 친구가 있는 김탄이 내심 부러웠다.

박토가 영식에게 입을 열었다. 

“너무 위험한 일에 동참하게 해서 미안해. 영식군.”

“아니. 그런 말 하지마. 토 형. 탄은 내 소중한 절친이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준다고 맹세한 사이니까. 이런 일은 당연히 도와야 하는 거야.”

순간 박토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탄과 마영식의 진실한 우정을 마주한 그는 꽉 찬 울혈을 토해내듯 울컥했다. 

하지만 사나이는 울 수 없었기에 입을 굳게 다물며 참았고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 폰 하나를 꺼냈다. 

“이건 영식군만 가지고 있어.”

박토가 내민 전화기를 받아 든 영식이 의아해 하며 쳐다보자 박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직통으로 통화할 전화기야. 킹왕짱의 대장 넘버 원에게 주는 거지. 내가 널 믿고 신뢰한다는 뜻으로 주는 거니까 잘 가지고 있어.”

이건 명백한 인정이다. 마영식은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인정을 많이 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얼떨떨한 그는 지금 어색했지만 가슴이 북받쳤다.

솔직히 마영식은 어렸을 때부터 ‘커서 뭐가 될거냐?’라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듣고 자랐다. 

군대에서는 그나마 조금 좋았다. 그래서 말뚝을 박을까 생각 했었지만 관뒀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마영식은 딱딱한 군인보다는 자유인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대를 하고 선택한 사회 생활 중 하나. 바로 그의 직장이었던 신우 프로텍에서의 생활은 처참했다. 

말썽쟁이 불량 생산 메이커. 경계 대상이자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여기 박토의 집에서는 달랐다. 

그는 바룬족으로부터 높은 신뢰와 인정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 사실에 마영식은 기분이 좋아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부쩍 자신감도 솟는 것 같다. 행복한 호르몬도 나오는 것 같았다. 

마영식의 입 꼬리가 저절로 귀에 걸렸다. 그러자 박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제 출발할 시간이야.”

“벌써? 지금 저녁이야?”

영식은 깜짝 놀라 스마트 폰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3시 10분 전. 

“아직 세 시도 안 됐어? 저녁에 출발하라고 했잖아?”

“여긴 오후 3시부터 저녁으로 들어 가.”

박토의 말에 마영식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해가 중천에서 조금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저녁이라고?-

마영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에게 박토가 왜 오후 3시가 저녁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긴 산골이라 해가 빨리 지니까 타지인은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어. 우리는 이맘때쯤이면 저녁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지. 오후 4시가 되면 해산 산마루에 걸치게 되고 4시 반쯤 어두워 진다.”

박토가 늘어놓은 산골에 대한 기상 정보. 전혀 몰랐던 걸 알았다는 듯 마영식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어. 때가 되면 내가 연락할 게.”

“걱정 마. 잘 할 거니까.”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헤어지게 된 마영식은 아이신과 아수하와 노닥거리는 김탄을 쳐다보았다. 

“탄아. 형 간다!”

“벌써? 아직 저녁이 아니잖아!”

“여기는 지금이 저녁이야 이 자식아. 몰랐어?”

마영식이 박토에게 전수 받은 산골 기상 정보를 말하자 김탄이 깜작 놀라 달려왔다. 

그렇게 마주서게 된 김탄과 마영식.

“형이 먼저 가서 세팅해 놓을 테니까.. 거기서 만나자.”

갑자기 김탄이 영식을 와락 껴안고는 울먹였다.

“형. 조심해야 해?”

“왜 이래. 이 새끼가.. 징그럽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마영식은 김탄을 뿌리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눈물을 글썽이기만 했다.

누가 툭 건드리면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마영식은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야 이 새꺄. 형이 누구냐? 의리의 사나이 킹왕짱 넘버 원이야. 김탄. 넌 내가 지킨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마친 영식은 스스로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눈을 감았다. 마치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는 듯 보였다. 그걸 증명하듯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눈을 뜨고는 고개를 들어 먼산을 쳐다보았다. 마치 힘겨운 걸 산 너머로 날려보내는 듯 보였다. 그리고는 힘겹게 말을 뱉었다. 

“형 안 죽어. 새꺄. 걱정하지 마.”

“그래도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난 형 잘못되는 거 싫어.”

“이 새끼가 자꾸 왜 이래? 짜증나게..”

먼 산을 바라보는 영식의 눈가에 드디어 눈물이 글썽였다. 하지만 흘리지는 않았다. 

박토는 이 둘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곧 출발해야 하는데 이러면 오늘 내로 출발을 못할 것 같다. 

조바심이 난 박토가 전쟁터에 나가는 애인처럼 마영식에게서 매달려 있는 김탄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탄은 마영식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김탄에게 애를 먹은 박토가 성질을 난 듯 우왁스럽게 떼어내 놓고는 핀잔을 줬다.

“작별 인사는 여기까지. 또 볼 건데 왜 그러고 있어?”

박토의 말에 김탄은 풀이 죽었다. 정말 냉정한 박토. 그런 그에게 어느새 곁에 다가온 아수하가 위로를 건넸다. 

“박토가 냉혈한이라서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마. 탄아.”

김탄은 아수하의 말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걸 본 박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냥 관뒀다. 

사실 박토는 아수하의 말에 골이 났다. 하지만 헤어지는 마음은 어떤 건지 잘 알았기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냥 김탄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정말 김탄은 마영식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박토는 김탄을 쳐다볼수록 그가 부러웠다. 

부러움에 살짝 질투가 난 박토가 그의 옛 친구였지만 지금은 원수가 된 오운족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그저 신기한 장난감을 보듯 마영식의 스포츠바이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본 박토의 얼굴은 또 일그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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