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

박토가 손에 든 장치를 김탄에게 내밀었다. 김탄이 장치를 받아 들자 박토가 입을 열었다.

“여기에 줄을 집어 넣고 손잡이를 누르면 걸쇠가 튀어나와. 브레이크지. 다시 손잡이를 한 번 누르면 브레이크가 풀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니.”

총을 손에 쥔 석기시대 사람처럼 장치를 보고 있는 김탄이었다. 그걸 본 박토의 입에서 깊은 한 숨이 흘러 나왔다. 

다시 그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려는 찰나, 어느 새 그들 곁에 와 있던 마영식이 김탄의 손에 들린 장치를 빼앗아 들고는 요리조리 돌려보다 감탄을 했다.

“난 알아. 이야 제법인데.”

“정말 알고 얘기하는 건가?”

박토의 대놓고 의심하는 말에 영식은 대답 대신 레펠 로프 앞에 섰다. 그리고는 김탄을 돌아보며 말을 했다.

“탄아! 형이 하는 거 잘 봐.”

마영식이 박토가 김탄에서 설명한 대로 정확히 장치를 레펠 로프에 걸고 손잡이를 눌렀다. 

그리고 팔의 힘을 이용해 위로 올라 간 다음 다른 손에 들린 장치에 줄을 걸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또 그 팔의 힘으로 위로 올라간 다음 아래에 있는 줄에 걸린 장치의 브레이크를 풀고 지금 잡고 있는 손보다 위 쪽의 줄에 장치를 걸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확한 시범이었다. 박토는 마영식을 보고 생각했다.

-차라리 영식 군이 바탈이었다면.. 어쩌면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이해도 빠르고 운동 신경도 좋고 무엇보다 말을 잘 듣는다. 하지만 바탈은 김탄. 에혀~ -

박토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김탄을 쳐다보았다. 그는 마영식의 시범에 반한 듯 입까지 벌리고 있었다. 

“우와! 대단하다 형.”

마영식이 우쭐댔다.

“형이 하는 거 잘 봤지? 형이 한 대로 따라 하면 돼. 이런 식으로 줄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거야. 알았지?”

김탄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영식은 레펠에서 내려와 섰다. 김탄이 그런 그에게 박수를 쳤다. 

“와. 어떻게 말로만 듣고 한 번에 할 수 있지?”

순간 마영식의 어깨가 뽕이 들어간 듯 부풀어 올랐다. 지금 자존감 만땅인 상태. 그가 거만한 표정으로 김탄에게 해야 할 답을 박토를 쳐다보며 했다.

“야, 인마. 형이 해병대 출신이잖아.”

“아. 맞다. 그랬었지. 역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구나!”

김탄에 칭찬에 으쓱해진 마영식.

그가 갑자기 장치를 든 한 팔을 들어 올리고는 이두박근을 만들었다. 누가 봐도 누군가 보고 감탄 좀 하라는 모양새였지만, 사실 그는 자아도취 상태 중이다. 

그런데 그의 근육에 화들짝 놀란 사람이 있었다. 김탄이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뽈록 튀어나온 이두박근을 어루만졌다. 

“형이 여름에 나시티를 못 입어서 속상하다고 했던 말이 이거였구나. 여자들이 형의 근육을 봐야 하는데 못 보여준다며 아쉬워했잖아.”

마영식이 절망에 빠진 듯 읊조렸다.

“팔에 난 상처만 아니었으면 내 이두박근에 코피 터지는 여자가 한 둘이 아닐 텐데.. 쩝. 아쉽.”

“응. 맞아. 나도 근육 좀 키워 볼까? 여자들이 좋아하게..”

“그래. 새꺄! 형 말대로 하면 여자가 생긴다고 했잖아.”

김탄이 영식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알았어. 키울 게.”

한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토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틈만 나면 여자 얘기만 하는 저 둘은 박토는 전혀 공감하지 못해서였다. 

박토는 지금 사명으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자. 그런데 바탈이라는 김탄이 허구헌 날 마영식만 보면 여자 얘기뿐이다. 그렇다면 김탄은 여자에 약한 남자라는 소리일 수도 있다. 

이것은 히어로의 자질로서 가져서는 안 될 일종의 아킬레스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는 부분. 용납할 수 없다. 

“여자 얘기 그만 하고 장치나 잡아. 김탄!”

박토의 말에 순간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마영식은 그럼 여자 얘기 말고 무슨 얘기해야 옳은 거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박토를 쳐다보았다. 

그러던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박토의 말에 마영식이 김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토 형. 여자를 싫어하나 봐.”

김탄도 같은 생각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토가 소리쳤다.

“그만 속닥대고 이쪽으로 와서 네 멘토이자 롤모델인 마영식 군이 시범을 보인 레펠 오르기를 시작하라고! 김탄!”

박토의 채근에 김탄이 삐죽거리며 레펠 로프 앞에 섰다. 그가 마영식의 시범대로 레펠을 오르자 마영식이 천천히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이야. 처음 하는데 잘하네. 우리 탄이.”

영식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김탄이 올라가기를 멈추고는 영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진짜? 진짜? 진짜 나 잘하는 거야?”

“그래 이 새꺄! 형이 잘한다면 잘하는 거야.”

“알아. 그러잖아도 나도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어. 잘하지? 잘하지? 형.”

김탄이 강아지처럼 촐랑대며 말하자 영식이 받아쳤다.

“야. 인마. 형이 가르쳐 줬는데 잘할 수밖에 없지. 짜식아.”

이렇게 김탄과 마영식이 자화자찬식 칭찬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영혼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박토의 앞으로 갑자기 검은색 가방 하나가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 

그가 자세히 보니 아수하와 아이신에게 지하실에서 가지고 오라고 했던 가방이었다. 

박토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하늘만 보였다.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집 쪽을 향을 돌아서자 아이신이 옥상에서 마당으로 뛰어내리는 게 눈에 보였다. 물론 그냥 뛰지 않고 공중제비를 돌면서..

그렇게 박토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착지한 아이신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화들짝 놀라 박토에게 소리쳤다. 

“아니 저 방법으로 알앤디 센터 옥상으로 올라가겠다는 거야? 너 미쳤어!”

눈에 가시 같은 오운족 아이신의 말에 박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어디선가 아수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높이가 150M는 넘을 텐데.. 저 방법으로 올라가면 날을 새워도 모자랄 걸?”

박토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도 역시 옥상 난간에 서 있었다. 박토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그대로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아이신이 배를 잡으며 깔깔 웃어댔다.

“푸하하하. 바보 같다. 박토야. 저렇게 원시적인 방법이 네가 알앤디 센터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한 방법이야? 우리보다 머리 좋은 박토가?”

오운족이 바룬족을 비웃는 소리가 마당 가득 울려 퍼지자 그걸 보고 있던 김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김탄은 바탈이다. 그래서 오운족 보다는 바룬족의 편. 바룬족인 박토의 조롱은 김탄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자신이 조롱을 당한 듯 얼굴을 구긴 김탄이 소리쳤다. 

“아수하 누나! 아이신 형! 나를 봐!”

오운족이 김탄을 쳐다보자 김탄은 속도를 내며 레펠을 오르기 시작했다. 속도는 신기에 가까웠으며 그 속도로 단 2초만에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저 정도 속도면 150미터나 되는 건물 꼭대기로 가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아이신과 아수하는 그저 놀란 체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박토가 한마디 했다. 

“금방 올라가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셔. 다 계산된 거야. 바보들아.”

이로써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아이신과 아수하. 도저히 토도 달 수 없고 반박도 할 수 없다. 그저 말 없이 주눅만 들어 있을 뿐.

사실 박토는 김탄이 이렇게까지 빨리 올라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 그러면 어떤가? 지금 내 체면이 서고 또 저 지긋지긋한 오운족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서 좋다. 

박토는 나무 꼭대기로 사라진 김탄을 보고 고마움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김탄 모르게 마음을 전한 박토는 오운족에게 가져오라고 시킨 하늘에서 떨어진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가방 속에는 검은색 천으로 된 옷이 가득 들어 있었고 그 위로 구형 스마트 폰이 여러 대 놓여 있었다. 오운족이 제대로 가져온 게 맞았다. 

“잘했다. 오운족.”

박토의 칭찬에 오운족 아이신과 아수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운족 놈들. 칭찬 한마디에 간도 빼줄 것 같다.-

이제는 바룬족 임시 노비로서 체화된 오운족 모습에 흡족해진 박토는 그들을 향해 자조적인 미소를 날리고는 가방 속의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전화기를 하나 들어 살펴보던 박토. 갑자기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충격으로 서로 부딪혔는지 액정에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다른 것도 그럴까?’라는 노파심에 서둘러 다른 스마트 폰을 집어 들어 살폈다. 역시 금이 가 있었다.

이것 만 봐도 나머지 스마트 폰은 볼 필요도 없었다. 전부 금이 가 있을 게 분명했다. 화가 난 박토가 오운족을 째려보았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를 때가 있다. 박토가 지금 그랬다. 

아이신과 아수하는 박토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워댔다. 마치 스마트 폰에 금이 가 있는 걸 전혀 보지 못했다는 듯.

그들의 능청에 화가 더욱 치민 박토는 콧김이 저절로 뿜어져 나왔다. 

“어우 씨! 진짜 도움이 안 되네 진짜!”

박토가 제 성질에 못 이겨 소리치자 아이신이 슬쩍 다가와 스마트 폰을 살피며 놀라는 척을 했다. 

“아니, 이럴 수가. 몰랐어. 가방 안에 저런 게 들어 있을 줄이야. 진작 알았다면 던지지 않고 들고 왔을 텐데.. 우리의 불찰이야. 미안해. 박토.”

박토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보통은 열어 보지 않나? 자연스러운 심리일 테니까 말이야. 판도라의 상자도 궁금증 때문에 열린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박토의 의심에 아이신이 마치 적반하장 격으로 소리쳤다.

“뭐야? 내가 지금 너 엿 먹으라고 일부러 던졌다는 거야?”

아이신의 반응은 박토의 예상을 살짝 벗어난 것이었다. 당황한 박토가 얼버무렸다. 

“그건 아니야. 단지.. 가방 열어 보지 않은 심리가 궁금해서 그래.”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분명 오운족이 일부러 엿을 먹이려고 옥상에서 가방을 집어 던진 것이다. 오운족은 믿은 놈들이 못 되기 때문이다.- 

박토가 계속 의심의 거두지 않는 걸 눈치 챈 아이신은 화가 났다. 그는 정말 가방에 스마트 폰이 있는 걸 몰랐다. 

“절대 열어 보지 말라고 했으면 열어 봤겠지. 중요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고 그냥 가져오라고 했잖아? 그래서 뭐 잡동사니 그런 게 들어 있는 줄 알았어. 그리고 진짜로 잡동사니가 들어 있던 게 맞았네. 구닥다리 폰이랑 천떼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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