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갈대밭을 상상해 보거라. 그저 호리호리한 힘없는 풀일 뿐인데 멀리서 보면 무성하지? 바람이라도 불면 그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는 장관을 만들어낸단다. 따지고 보면 그저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기만 할 뿐인데 말이다.”

“사회적 전염을 말씀하시는거군요.”

“제대로 짚었네. 집단의 힘이란 무서운 법이란다. 그렇지만 경솔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지. 한 번 전염되면 들불처럼 번지게 되는 게야.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목을 조르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먼저 불을 낸다면 불타고 난 땅에서의 결실은 아주 좋은 수확으로 이끌지. 타고 남은 재가 자양분이 되는 것이란다.”

“하지만 좋지 않은 결실이면 어찌합니까?”

“그게 어려운 법이야. 하지만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이용한다면 무조건 좋은 결실을 맺게 할 수 있지.”

왕종철의 말에 은비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은비사는 왕종철과의 대화에 결국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답이 없는 대화 같았다.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혹은 생각하기 어려운 독특한 사고를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같다. 그래서 초 일류 거대 기업을 만든 거겠지?-

은비사는 왕종철과의 대화의 어려움을 그의 특별한 능력으로 결론을 지었다. 

수수께끼를 푸는 아이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은비사를 지켜 보던 왕종철은 그런 그가 참 귀여웠다. 언제나 화두를 던지면 흘려 듣는 일이 없는 아이였다.

항상 곁에 두길 잘한 일이라 생각하던 그가 은비사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며 웃었다.

“허허허허.”

당황한 은비사는 그런 그의 태도에 또 무언가 잘못했다는 생각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을 본 왕종철은 더 크게 웃었다. 한참을 껄껄대며 웃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어려운 게구만.. “

은비사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왕종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본성은 여러 개가 있지. 필요에 따라 시기에 따라 어떤 걸 이용하는 지를 잘 알아야 득이 되는 거라네. 바로 내일의 득을 바라볼 수도 있고 10년 뒤의 득을 바라볼 수도 있으며 100년 뒤의 득을 바라볼 수 있지.”

은비사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왕종철의 말을 알아 들었지만 그 방법을 어떻게 쓰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왕종철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답을 알아내길 좋아했다. 그래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은비사의 마음을 읽은 듯 왕종철이 물었다. 

“상당히 매력적이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기만 하는 은비사. 그런 그를 바라보던 왕종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어떨 때는 신이 되는 것 같기도 하기도 하다네. 하지만 나도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야.”

“그래도 회장님은 그런 걸 이용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높은 곳에 있으면 뭐하누? 계속 지속하는 게 중요한 거지.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야. 10년 이상 자리를 지키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느냐? 상당히 어려운 일이야.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나 가장 높지. 세계에선 아직이야. 더 높이 올라가야 해. 내 죽기 전에..”

은비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왕종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월의 흔적을 담은 듯 깊이 파인 주름 사이로 커다랗게 움푹 들어 간 눈은 항상 아이처럼 반짝였다. 탄력 잃은 부서질 것 같은 살가죽엔 검버섯이 올라와 있었다. 

툭 불거진 광대엔 힘이 느껴졌고 얇은 입술은 그가 가진 세계는 절대 깨지지 않는다는 듯 항상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은비사가 보는 이 세상을 이미 다 가진 듯한 한 노년 남자의 모습은 그저 보잘것없는 한 노인이었다. 그냥 겉모습만 보면 그랬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숨은 최고의 권력이다. 현재진행형이자 미래진행형이다.

그 권력이 쭈글쭈글해진 손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마음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장단을 치고 있었다. 은비사가 물었다. 

“저기. 회장님. 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려고 하는 겁니까?”

“보여 줘야지.”

왕종철의 대답은 간결했다.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뭘 보여 주려는 겁니까?”

은비사가 재차 묻자 왕종철이 답했다.

“내가 최고라는 것.”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의 대답이었다. 

은비사는 왕종철의 대답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표정으로 왕종철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왕종철이 다시 운을 뗐다.

“왜? 가치나 뭐 이상 그런 걸 실현한다는 답을 듣고 싶었던 겐가? 후후.. 그것 포장일 뿐이야. 최고가 되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 중 하나야. 바로 욕망이지. 그걸 가치와 이상으로 포장을 하는 거야. 그뿐이야.”

“네.”

은비사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왕종철은 핀잔을 주는 듯 눈을 흘겼다. 이상하게 왕종철에게는 마음을 숨기기가 힘든 은비사였다. 그가 그를 향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왕종철이 빙긋이 웃더니 그의 손을 맞잡았다.

“넌 내 아들이야. 물론 DNA를 물려주지 못했지만 내 정신과 마음을 물려주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마음으로 낳은 거라는 거지. 아들이란 아버지에게 무엇이든 숨길 수 없는 법이야. 너도 내게는 그래서 한 없이 약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 나 외에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말거라. 세상은 생각 이상으로 척박하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은비사의 대답에 왕종철은 잠시 생각하는 듯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의 깊은 내면의 생각을 헤짚어보는 듯했다. 

은비사는 그런 그의 시선이 어려웠다. 슬그머니 눈동자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왕종철의 시선. 그는 그렇게 은비사를 빤히 쳐다보다 무엇을 읽은 듯 관심을 지우고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갈 시간이 됐구나. 내 잠시 다녀오마. 다녀왔을 땐 마지막 배달석이 열려 있었으면 좋겠구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회장님.”

“틀렸네.”

“아. 무조건 열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그거네.”

말을 마친 왕종철은 가부좌를 풀었다. 

은비사가 옆으로 잠시 치워 놓았던 왕종철의 구두를 그의 발아래 두자 그가 신발을 신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는 뒷짐을 지며 수행원들에 말을 했다. 

“가자.”

왕종철은 그 외마디 말과 함께 수행원과 경호원을 대동하고 라운지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은비사가 몸을 일으키자 눈앞에 케이가 보여 깜짝 놀랐다. 은비사가 당황하자 케이가 더 놀란 듯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놀라? 가기 전에 잠깐 얼굴 보고 가려고 한 건데..”

케이의 말에 은비사는 왕종철이 사라진 곳을 황급히 다시 쳐다보았다. 

“회장님은 모르는 일인가 봐?”

케이의 물음에 은비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케이를 바라보았다.

“아니, 알고 계셔.”

“그런데 왜 눈치를 보는 것 같지?”

“네가 하는 걸 모르기 때문이야. 아셨다간 화를 낼게 분명하니까. 이렇게 나타날 거면 회장님 눈에 띄지 않게 했어야 해. 보셨을지도 모를까 봐 쳐다 본거야.”

“걱정 마. 완전히 사라지고 나타난 거니까.. 그나저나 아직도 나에게 화가 나신 건가?”

은비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케이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케이는 김탄을 놓친 실수로 전적인 책임이 있었기에 당분간 회장님 눈에 띄지 말라는 은비사의 조언이 있었다. 만회할 기회는 없었다. 

간간히 은비사가 주는 일을 하며 다시 왕종철의 신망에 오를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케이. 왕종철이 아직도 화가 나 있다는 말은 케이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우울해진 얼굴로 왕종철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기만 하는 케이에게 은비사가 입을 열었다.

“절대 실수하면 안 돼. 그래야 다시 부르실 거니까..”

케이는 은비사를 흘깃 쳐다보곤 품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그가 선글라스를 끼며 말을 뱉었다.

“걱정 말라고. 절대 실수 안 해. 이번에는.. 나도 살아야 하니까..”

“그래. 태도가 좋네.”

은비사의 말에 케이는 피식 웃는 걸로 답을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라운지를 떠났다. 케이가 사라지자 은비사는 긴장이 풀렸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깊은 한 숨을 쉬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멍한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보던 그의 눈가에 시간이 조금 지나자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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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 나무 아래로 백사장이 펼쳐진 푸른 바닷가에는 휴양 차 들린 사람들로 가득했다. 

푸른 하늘만큼 푸르고 맑은 바다는 쉴 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듯 파도가 넘실거리며 노래를 했고, 해변에 설치된 비치 의자에는 사람들이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그 파도의 노래를 들으며 쉬고 있었다. 

필리핀 세부 막탄 섬 최고급 휴양 리조트 해변에서 유독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체 여행을 온 것인지, 삼삼오오 모여 있는 비치파라솔이 아닌 여러 개가 일렬로 늘어선 비치파라솔 그늘 아래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비치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개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비슷한 꽃무늬 셔츠, 샌들, 모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모두 하나 같이 비치의자에 늘어져 잠을 자고 있었다. 

한 필리핀 현지 소년이 그들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두 팔을 팔랑대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비치 의자에 죽은 듯 자고 있는 남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소년은 순간 눈이 커지며 무언가 소스라치게 놀란 듯 표정이 변했다. 

그 소년은 그대로 뒤를 돌아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에게로 달려가 뭐라고 소리치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파라솔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소년의 엄마는 당황한 표정으로 파라솔 쪽을 쳐다보다 마지못해 소년에 의해 끌려가는 듯 파라솔 쪽으로 다가왔다. 

소년이 첫 번째 비치 의자에 누워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뭐라고 하자 소년의 엄마가 그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살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살피던 소년의 엄마가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음료컵을 모래 사장에 떨어뜨렸다. 

비치 의자에 누워 있는 남자를 경악에 겨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소년의 엄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체 비명을 질렸다. 

“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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