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빠른 최고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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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국제공항 00항공사 체크인 카운터가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멀리서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사람이 수행원을 대동하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왕종철이었다.

카운터 담당 직원들은 아침 06시 30분에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찾아온 첫 손님 왕종철을 맞이하기 위해 단정하고 바른 자세를 갖춘 체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결국 카운터에 도착한 왕종철이 품에서 여권과 이티켓을 내밀었다. 카운터 직원이 확인을 하고는 탑승권을 출력해 왕종철에 내밀었다.

“존경합니다. 회장님.”

“허허허. 아이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그려. 이 늙은이가 뭐라고..”

왕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카운터 직원이 수줍은 듯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저기.. 실례가 안 되신다면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되긴 왜 안됩니까? 물론 해 드려야지요.”

왕회장은 카운터 직원이 건네준 사인펜을 받아 들고 종이에 사인을 했다. 정갈하고 힘 있는 글씨체로 왕종철이란 이름을 종이에 쓴 그는 공손하게 펜과 종이를 카운터 직원에게 도로 건넸다.

사인을 받아 든 직원이 기분이 좋았는지 종이를 품에 안으며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옆에 서 있던 직원들이 그 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자 왕종철이 물었다.

“옆에 직원 분들도 해드릴까요?”

왕종철의 말에 한 직원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자 왕종철의 수행원 중 한 명이 나무랐다.

“회장님.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왕종철이 갑자기 그에게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해 주고 싶어 해 준다는 데 무슨 참견인가? 사인하는 데 몇 분이나 걸린다고.”

왕종철이 노기 어린 핀잔에 수행원이 잘못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네.”

왕종철이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다는 듯 말을 툭 내뱉고는 다시 카운터 직원을 다정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회장님. 정말 멋있으세요.”

직원의 말에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머금은 왕종철은 그녀의 손에 들고 있는 펜과 종이를 달라는 듯 손을 쭉 뻗었다.

“아이고. 자꾸 그런 말씀 하시면 정말 제가 멋있는 줄 압니다.”

“아니에요. 진짜 멋있으세요.”

“허허. 그런가요..”

왕종철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어댔다. 

카운터 직원에게서 받아 든 메모지에 펜으로 사인을 하고 난 후 다시 돌려줄 때까지도 그의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상류층이자 우리나라 최고 재벌인 왕종철의 친근하고 서민 지향적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었다. 카운터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왕적 마인드를 벗어던진 왕종철은 이렇게 사람들 마음에 이미 스며들어 어딜 가도, 어느 때든지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반겼다.

그가 카운터 직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난 후 공항 한 편에 마련된 라운지로 향할 때도 그랬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걸어가는 내내 왕종철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그들의 행위에 왕종철을 따르는 수행원들은 그 어떤 제지를 하지 않았다. 

단 왕종철에게 너무 가까이 사람이 근접을 하는 경우에는 그에게 살짝 경고를 하거나 아니면 공손하게 부탁을 하는 식으로 되돌려 보내는 게 다였다.

이런 처사들은 그가 아주 멀고 높은 곳에 있는 존재지만 사람들이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은 왕종철을 왕 하라방이라는 별명도 붙여줬다. 인터넷에서 밈도 형성돼 하나의 놀이처럼 소비되기도 했다. 

왕종철은 라운지로 가는 내내 만나는 사람들마다 연신 웃으며 그들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때때로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럼 사람들도 같이 손을 흔들어줬다. 

그렇게 왕종철이 라운지에 도착하자 저 멀리 한쪽에 마련된 휴식처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은비사가 그의 눈에 보였다. 

낯선 사람들만 보다 아들 같은 은비사를 본 탓인지 왕종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편 왕종철이 자신에게 오는지도 모르고 있던 은비사는 무료하다는 듯 뻣뻣한 목을 풀기 위해 요리조리 돌렸다. 

그러다 눈에 익은 한 사람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사람이 왕종철임을 확인한 은비사는 그대로 왕종철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아직 게이트로 갈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일단 저쪽으로 가서 쉬시죠.”

왕종철 앞으로 다가 선 은비사가 말하자 왕종철이 알았다는 듯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종알댔다.

“이렇게 밖에 못 봐서 아쉽구만.. 너도 바쁘고 나도 바쁘니 말이다.”

“그렇죠.”

“별로 섭섭해하지 않는 모양이구먼. 난 이렇게라도 자네를 보는 게 좋은데 말일세.”

“아.. 아닙니다. 저도 좋습니다. 회장님.”

어느새 은비사가 안내한 곳으로 도착한 왕종철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미리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이 그를 빙 둘러쳤다. 

그 덕에 왕종철과 은비사는 철통처럼 수비가 됐고 밖에서 왕종철과 은비사는 보이지 않게 됐다. 

의자에 앉은 왕종철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모두 차단된 걸 확인하고는 신발을 벗더니 의자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삐뚤게 바닥에 벗어 논 낡은 구두를 한 참 바라보던 은비사가 가지런히 모으며 입을 열었다.

“구두 좀 바꿀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왕종철이 은비사의 말에 툴툴댔다.

“멀쩡한데 뭐 하러 바꿔.”

“돈도 많으시면서 허름하게 하고 다니시면 사람들이 욕할 수도 있어요. 가식적이라고.. 그리고 굳이 매번 이렇게 직접 티켓팅을 하시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회장님.”

“잔소리쟁이야? 잔소리는 마누라 하나로 족해.”

기분 나쁘다는 듯 왕종철이 소리치자 은비사는 급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싱겁기는.. 그런다고 바로 사과할 것 까지야..”

그 후로 은비사는 말문을 닫았다. 

왕종철은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화를 내다가도 자상했다가 또 기분 나쁜 듯 굴었다가 다시 장난을 치는 사람이었다. 마치 수많은 인격이 공존하고 있는 듯 여러 색깔을 가진 사람이었다. 

단조로운 한 가지 색을 지닌 은비사로서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또한 서로 대화를 하다 보면 언제나 주도권은 왕종철이 가져갔다. 

은비사가 대화를 잘 끌어가다가도 어느 순간 막히고 또 끌려가다 보면 어느새 중심축에서 한 참 벗어나 있었다. 이럴 때는 입을 다무는 게 능사였다. 

그리고 대화의 끝은 항상 장난기 어린 왕종철이 쳐다보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가 그 특유의 장난기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은비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보구나. 오늘따라 말이 많은 거 보니..”

“아. 그렇게 보였습니까?”

“뭔데?”

왕종철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가 은비사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자 은비사는 피하지는 못하고 그대로 얼굴을 붉히며 둘러댔다. 

“별 거 아니에요.”

“음.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너와 나 사이에 비밀이 생겨 섭섭하구나. 쩝.”

왕종철이 못내 아쉬운 듯 쓴 입을 다시자 은비사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으로 때웠다. 

왕종철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두 팔을 위로 쭉 올려 기지개를 하듯 몸을 풀고는 참선을 하듯 가부좌 튼 무릎에 손을 올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사색 법이었다. 모두가 그 사색을 방해하지 않게 숨소리까지 죽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왕종철이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듯 은비사를 나직이 불렀다.

“비사야.”

“네. 회장님.”

“물건을 팔 땐 말이다. 포장이 중요한 법이란다. 겉은 그럴싸해도 안이 부실해야 할 때가 있고 안이 그럴싸하지만 겉이 소박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인가요?”

“그렇지. 그런데 이건 말이다. 사람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 일세.”

“네.”

“알고 대답하는 건가?”

“아니. 그저 제 생각에는 사람의 마음은 모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은비사가 말끝을 흐리자 왕종철을 계속 말을 해보라는 듯 두 눈썹을 치켜떴다. 은비사는 주눅이 든 체 그의 눈치를 보며 마저 말했다.

“포장을 하는 것은 상대방을 알기 위해 때로는 똑똑한 척해야 하고 또 바보인 척도 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보는 상대방의 속을 알기가 쉬우니까요.”

“하지만 완벽해야 하지. 상대도 만만치 않으니 말일세. 그렇지 않은가?”

비사는 살짝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왕종철이 탑승권을 꺼내 비사에게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렇게 하는 줄 아느냐?”

“혹시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입니까?”

왕종철은 직접 발권한 탑승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여권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참 요상한 게야. 한 번 믿기 시작하면 그게 틀린 것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듣질 않지.”

“맹목적인 믿음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지. 그래. 맞아.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나 혹은 자신이 가진 생각이 틀렸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네. 그걸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수렁에 빠지기도 하지. 헌데 말이다. 그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것은 때때로 아주 강력한 방패가 되기도 해. 또한 무기도 될 수 있다네.”

“방패는 이해가 가지만 무기는 어떻게 될 수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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