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탈스톤 고대사 담당. 파눔의 이야기

그렇게 서 있던 그들의 귀로 달맞이 노래의 끝 소절이 들려왔다.

“♩♪♩사람의 마음이 밝음이며 온 누리에 두루 비춘다네. 하나가 되는 것이 끝이라네. 그러면 모두가 빛이 되는 사람이라네. ♩♪♩”

둥둥 두두둥 둥둥. 딱.

고수의 마지막 장단을 끝으로 음악이 멈췄고 아이들의 춤도 멈추었다. 빙 둘러앉아 아이들의 춤과 노래를 구경하던 어른들이 잘했다는 듯 박수를 쳤다. 

그러자 아이들은 기분이 좋았는지 까르르 웃어댔다. 그 아이들 사이로 바룬의 손자 캄이 보이자 바룬이 파눔에게 물었다.

“바탈 돌을 제 손주 녀석이 찾게 되는 거란 말 입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못 찾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손 대대로 전해진다 하지 않았느냐?”

“쳇. 도대체 언제입니까? 전 제 손주가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게 될 거야. 아주 오랜 시간이지..”

파눔의 말에 바룬이 두 손을 쫙 피며 물었다.

“눈이 오고 녹는 게 한 10번에 열 번이면 되는 겁니까?”

갑자기 파눔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그건 100년이지 않느냐? 그 100년에 100번을 해야 오는 시간이야.”

“그렇게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상상하기 힘든 시간이군요.”

이제까지 아무 말 없던 오운이 믿기 힘든 듯 말하자 파눔의 눈빛이 쓸쓸해졌다. 

그가 얕은 한숨을 쉬고는 바룬과 오운의 한 손을 각각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간이지. 하지만 너희들의 자손들이 아주 오랫동안 꼭 힘을 합쳐 이루어 내야 할 일이야.”

“그럼 저희가 살아 있는 동안엔 못 보는 것이군요.”

바룬이 상심하자 파눔이 되물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씨앗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바룬이 침통한 듯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그럼 씨앗 역할만 하고 죽는 건가요?”

“그렇다.”

파눔의 짧고 냉정한 말에 풀이 죽은 바룬이 골이 났는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갑자기 바룬의 품에 그의 손자 캄이 덥석 달려와 안겼다.

“할아버지!”

난데없이 나타난 손자 캄 때문에 깜짝 놀란 바룬이 그를 번쩍 들어 올려 안고는 이내 싱글벙글 거리는 표정으로 재잘거렸다.

“어이구. 우쭈쭈. 이 녀석. 오는지도 몰랐네.”

“할아버지 놀래 키려고 몰래 살금살금 달려왔죠.”

“살금살금 달려올 줄도 아는 게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할아버지가 귀가 어두우니까 그렇게 할 수 있죠.”

“뭐라고? 허허허허허허.”

캄의 말에 바룬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가 신나게 한 바탕 웃더니 바룬은 캄이 귀여운 듯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

“할아비가 그렇게 좋아? 그래서 하늘 노래가 끝나자마자 냉큼 달려온 거야?”

캄이 바룬의 품에 안겨 하늘로 껑충 뛰어오르려는 듯 몸을 한 번 들썩이며 소리쳤다. 

“네. 나는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

바룬도 흥이 났는지 들쳐 안은 캄을 쭉 들어 올렸다.

“나도 우리 캄이 제일 좋아.”

“할아버지 할아버지. 빨리 가요. 조금 있으면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떡과 술이 나와요.”

캄이 모닥불을 가리키며 말하자 바룬이 캄을 땅에 내려놓았다.

“먼저 가서 할아버지 꺼 맡아 놔. 캄. 나는 나이가 들어 캄처럼 빨리 달리지 못하니까.”

“알았어요.”

대답한 캄이 모닥불을 향해 달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파눔이 물었다.

“예쁘냐?”

“예쁩니다.”

“만일 캄의 미래가 또 캄의 아이의 미래가 또 캄의 아이의 아이가 살 곳이 사라진다면 어떨 것 같으냐?”

파눔의 질문에 바룬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손을 내저으며 몸서리치듯 질겁했다.

“어휴. 끔찍합니다. 생각하기도 싫어요.”

“그걸 막기 위해 내가 너희에게 노래를 전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야.”

오운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온 마음을 다해 지켜야겠군요.”

파눔은 오운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우수에 찬 눈빛에 쓸쓸함이 엿보이다 눈가에 살짝 물기가 비쳤다. 

“길고 긴 싸움이 될 게야. 이게 시작인가 하면 시작이 아니고 또 끝인가 하면 끝이 아니게 되지. 모든 일이 우연처럼 벌어지겠지만 결국엔 필연이 되어 있을 게야.”

파눔이 말하자 오운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정말 너무 어려운 말씀만 하십니다.”

“하하하. 그러냐? 그럼 그냥 기억만 하고 있어.”

오운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자 바룬이 채근하며 물었다.

“그럼 진짜 시작은 언제가 되는 겁니까요?”

“궁금하냐?”

“네. 무지 궁금합니다.”

파눔은 답을 하지 않고 갑자기 모닥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에게 바룬이 투덜거렸다.

“아유. 자꾸 왜 말은 해주시고 피하십니까?”

“그때까지 살지도 못할 텐데 뭐가 그렇게 궁금해.”

파눔의 말에 오운이 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그럼 그때까지 파눔 님은 살아계시는 건가요?”

“아니. 나도 죽어. 하지만 내 이야기는 계속 전해질 거야.”

갑자기 오운이 파눔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오운의 행동에 살짝 놀란 파눔이 그녀를 쳐다 보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알고.. 싶습니다.”

파눔은 평상시 말 없고 질문도 잘 하지 않는 오운에게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이렇게 할 정도면 정말 궁금하다는 뜻. 

하지만 파눔은 이들에게 그걸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파눔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시작은 하나 속에 셋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오직 셋이 펼쳐질 때가 진짜 시작이야.”

바룬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건 달맞이 때 부른 하늘 노랫말이 아닙니까?”

“그래. 그래서 노래를 가르쳐 준 거야. 이게 중요해. 너희들이 죽고 또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이 노래는 계속 전해져야 해. 그리고 내가 너희들에게 맡긴 일도 계속 자손들에게 전해져야 하고.”

“노래가 왜 전해져야 합니까?”

오운이 질문하자 파눔이 생뚱맞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돌렸다.

“질문이 너무 많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평상시 네 모습이랑 달라서 그만.. 진짜 궁금하구나?”

“네. 파눔.”

“내가 하늘 노래를 전해준 건 일어날 일이기 때문이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갑자기 파눔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졌다. 평소와 다른 파눔의 변화에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오운이 황급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

“정말 무례했습니다. 궁금함에 큰 실수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파눔은 말없이 오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잘못한 게 없어. 오운아. 단지 기억하기 싫은 일이 생각나서 그래.”

“어떤 일이죠?”

오운이 조심스레 묻자 파눔이 답했다.

“끔찍하고 무서운 일.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 다가올 일이기도 하지.”

말을 마친 파눔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모닥불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운에게 바룬이 손을 내밀었다.

“그만 일어나 오운, 넋 나간 사람처럼 왜 그러고 있어.”

바룬의 손을 잡고 일어선 오운이 무릎에 뭍은 흙을 털며 중얼거렸다.

“파눔의 저런 모습은 처음입니다. 기억하기 싫은 일이란 게 뭘까요?”

“나한테도 한 번도 말씀하지 않았어. 나도 한 때 파눔의 과거가 궁금해 물어본 적은 있었지만 언제나 말을 피했고 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며 역정을 냈었지. 그 이후로 물어본 적 없어.”

바룬의 말에 오운이 파눔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체 어떤 일을 겪으셨길래..”

“알 수 없을 거야. 영원히 말 안 하실 거니까? 그만 궁금해하고 빨리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고.”

“그럴까요?”

바룬이 두 주먹을 쥐고 가슴을 탕탕 치며 소리쳤다.

“오늘 고주망태가 돼 보자고!”

“그러죠.”

모닥불로 도착한 바룬과 오운이 자리에 앉자 그들 앞으로 미리 준비라도 한 듯 한 상이 펼쳐졌다. 

차조로 만든 한 입에 들어가기 좋은 동그란 크기의 떡이 토기에 한가득 들어 있었고 차조로 누룩을 만들어 빚은 술이 가득 들어 있는 기다란 토기도 있었다.

“술은 원래 한 가족에 한 토기씩인데 워낙 술을 좋아해서 자네들한테는 한 사람당 한 토기 씩 주었네.”

술을 가져온 사람이 말하자 바룬이 두 손으로 토기를 번쩍 들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운도 토기를 번쩍 들어 바룬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벌컥벌컥 마시자 술을 가져온 사람이 나무랐다. 

“또 줄 테니까 작작 좀 먹으시오.”

그 사람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바룬과 오운은 한 말이나 들어갈 것 같은 토기 속의 술을 단숨에 비웠다. 

“크하. 좋다.”

바룬이 기분이 좋은 듯 감탄을 하자 오운도 물었다.

“한 번 더?”

“좋지. 하지만 이럴 땐 술을 못하는 파눔 님이 아쉬워.”

“아직 어려 보이니까요.”

“백 살이 넘었는데 아직 어린아이 티를 못 벗어났으니..”

“하늘 사람들은 정말로 천천히 크나 봐요.”

“부럽다.”

“저도요.”

바룬과 오운은 부러운 시선으로 모닥불 건너편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는 파눔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손짓을 크게 하며 말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바탈 돌이라는 건 말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란다. 그 돌은 아주 힘이 세서 세상을 다 아수라장으로 만들 정도야.”

아이들은 파눔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그중 한 아이가 물었다.

“우와. 그렇게나 힘이 세요?”

“그럼. 엄청 힘이 세지.”

“그럼 그 돌은 왜 떨어지는 거예요?”

“엄청 무섭고 큰 검은 용이 나타나 해님을 삼키게 돼 이 세상의 빛이란 빛은 다 사라지고 오직 캄캄한 세상이 되거든. 별빛도 달빛도 없는 캄캄한 세상이 되어 버리거든. 그래서 떨어지는 거란다.”

파눔의 말에 어떤 아이들이 무서운 듯 눈을 감았다. 진짜 눈 앞에 용이 나타난 듯 오들오들 떠는 아이들도 있었다. 

“무서워요.”

“해님을 다시 보내 주세요.”

아이들이 겁에 질려 말하자 파눔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얘들아. 그때 하나 속에 셋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셋만 펼쳐지게 되는데 그때 마지막 검은 용에게서 해님을 지키게 될 거야. 그래서 너희들이 열심히 하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거란다. 알았지?”

“정말 저희들이 열심히 노래를 하면 해님을 지킬 수 있는 거죠?”

파눔이 빙긋이 웃으며 아이들에게 답했다.

“그래. 열심히 부르면..”

아이들은 방금 전까지 무서운 괴물에게 시달리듯 굴다 파눔의 말에 괴물이 사라진 것처럼 겁이 없어졌다. 

해님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에 웃음을 띠며 박수를 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갑자기 한 아이가 벌떡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시작도 없어 그게 바로 하나의 시작이야. ♩♪♩”

그 아이의 노래 한 소절이 끝나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 다음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셋으로 나누어지지만 변하는 게 아니라네. ♩♪♩”

그 모습을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는 파눔이 고개를 돌려 바룬과 오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이미 파눔을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파눔도 그에 화답하듯 빙긋이 미소 지었다.

-씨앗이 중요한 거야. 그래서 미래를 위해 너희들에게 씨앗을 심은 거란다. 바룬과 오운.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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