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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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어둠 속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번뜩이는 눈이 있었다. 바로 김탄의 눈. 

그의 귀로 멀리 벽 쪽으로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밤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김탄은 박토와 함께 오성 알엔디 센터로 두 번째 바탈을 구하러 가게 된다. 당연히 잠이 들 수 없는 김탄이었다. 

그런 김탄은 자신만 잠을 못 자는 것인지 확인하려 몸을 뒤척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오른쪽으로 마영식이 등을 돌리고 자고 있었고 왼쪽으로 박토가 등을 돌린 체 자고 있었다. 

-세상에. 걱정도 안 되는가 보다.-

어쨌든 김탄은 이 방안에서 혼자만 잠 못 이루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확인을 한 후 그냥 혼자 나직이 중얼거려본다. 

“다들 잘 자네. 그나저나 내일 잘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가 누군가의 대답을 바라고 중얼거려본 거지만 역시 대꾸하는 사람은 없다. 김탄은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일, 적의 소굴로 들어가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가 잠을 이렇게 잘 잘 수 있는지.

김탄은 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기 전 날 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소풍뿐만 아니라 축제 때도 그랬다. 

무언가 일상과 다른 특별한 날이면 그는 항상 뜬 눈으로 날을 새다 그날을 맞이했다. 그런 그이니 이렇게 잠 못 이룰 수밖에..

김탄이 박토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커튼을 통해 비친 어스름한 달빛에 그의 넓은 등짝이 보였다. 

“자는 거야? 토 형?”

김탄이 박토의 등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지만 그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걱정이 너무 많은 성격. 이것도 병이다. –

스스로 한심해진 김탄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또 혼자 중얼거렸다. 

“어휴. 다를 잘 자는구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네. 그나저나 내일 잘못되면 어쩌지?”

“헛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자 둬. 내일 아침부터 준비할 게 많으니까.”

자고 있다고 생각한 박토가 갑자기 대꾸하자 김탄은 깜짝 놀라 소리부터 쳤다.

“안 자고 있었어? 토 형!”

“자고 있었어. 그리고 조용히 해라. 다들 자고 있으니까.”

박토의 말에 김탄은 순간 화들짝 놀라 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전 그가 소리를 쳤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민폐를 끼쳤기에 잠시 반성한 그가 슬며시 입에서 손을 떼고 다시 박토에게 속삭였다. 

“아. 그래? 미안. 혹시 자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깬 거야?”

“어. 그러니까 중얼대지 마. 자야 되니까.”

“형은 안 무섭구나. 강해서 그런 거겠지?”

김탄이 다시 속삭였지만 박토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아주 한참 동안이나.. 자는 것 같았다.

“벌써 잠든 거야? 대단하네. 나는 떨려서 못 자겠는데..”

김탄이 혼자 중얼거린 소리에 박토가 갑자기 답을 했다.

“나도 무서워. 두렵고 떨려. 잘못되면 모든 게 끝이니까.”

“그.. 그래? 나만 그렇게 아니구나.”

박토가 김탄의 말에 잠자기를 포기한 듯 김탄 쪽으로 몸을 돌아 누웠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 똑바로 누운 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박토 쪽으로 몸을 돌려 쳐다보고 있는 김탄 때문이었다. 

서로 너무 가까이 얼굴을 마주보고 있게 되는 상황이라 어색했던 모양이다. 그 상태로 박토가 물었다.

“무서워? 김탄.”

“응. 그래서 잠도 못 자겠어.”

“도망치고 싶나?”

“솔직히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김탄의 솔직한 답에 박토가 피식 웃었다.

“나도 한때는 너무 무서워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왜?”

“나도 과거에는 무단이었으니까.”

김탄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월이처럼?”

“응.”

“무단으로 사는 건 힘든가 봐? 도망치고 싶었다는 걸 들으니..”

박토는 김탄의 물음에 한숨으로 대신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 말이 없던 박토가 회상을 끝낸 듯 입을 열었다.

“힘들지. 나로서의 온전한 삶은 없고 오로지 무단으로서의 삶만 있었다. 모든 가문의 대소사에 주인공으로 참여하고 또 무단으로서 가지는 특권도 있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막중했거든. 바룬족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무단이라서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어. 따지고 보면 서열 1위였지만 그건 보여지는 것일 뿐 그저 꼭두각시였을 뿐이었어.”

“얼마나 힘든데? 나도 고아라서 정말 힘들었거든. 보육원에서의 삶은 정말 끔찍해. 다시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단도 그 정도로 힘든 삶이야?”

“보육원의 삶은 내가 경험하지 못해서 비교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난 그때 무단으로서의 삶이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어. 숙명이기에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삶이고 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아닌 주어진 삶이니까 말이야. 철저히 바룬의 사명을 지키는 자로 길러지지. 끊임없는 훈련에 또 끊임없는 수련에 또 끊임없는 세뇌 같은 말을 들으면서 말이야. 무단으로서의 본분, 마음가짐, 행동, 대인관계까지 철저히 만들어지는 삶이었어. 듣기만 해도 끔찍하지?”

“그럼 진짜로 하고 싶은 것도 못했겠네?”

박토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탄이 그런 그를 자세히 살폈다. 어두컴컴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박토의 눈가가 촉촉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애잔한 마음이 들어 김탄이 손으로 그의 가슴을 다독이려 내밀자 순간 박토가 입을 열었다. 

“그래. 진짜 못했어. 친구 하나 사귀지도 못했으니까. 유일한 친구는 오운족의 아이신과 아수하뿐이었어. 그들도 자주 만나지는 못했고 특별한 행사 때나 만나는 사이였지.”

김탄이 박토의 가슴을 다독이려고 했던 손을 슬쩍 거두었다.

“아. 그래서 친구라고 했구나.”

“오운족 그 놈들 얘기는 그만 하자.”

박토는 진짜 오운족 아수하와 아이신이 싫은 듯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고 김탄은 자신이 꺼낸 말 때문에 박토가 속상해하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그래서 김탄이 손을 슬쩍 박토에게 가져가 토닥이려고 할 때 갑자기 박토가 입을 열었다.

“그나마 내 삶에 숨통이 트인 건 20살 때부터였어.”

타이밍을 놓친 김탄이 손을 슬며시 거두었다.

“그건 왜?”

“무단은 20살이 넘으면 무단이 가진 능력이 사라지게 돼. 그때는 후임 무단에게 그 능력이 전해지지. 그렇게 해방됐다고 완전히 자유로운 삶은 아니야. 20살이 넘으면 그때부턴 철저히 파눔의 예언을 지키는 바룬족으로 살게 되는 거야. 바탈을 기다리고 나타나면 찾아, 진정한 바탈이 될 때까지 보호하는 임무만 존재하지.”

“형도 사는 게 힘들었구나.”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바룬족으로 사는 걸 그만두고 싶지 않았어? 그럼 가문에서 쫓겨나는 거야?”

“아니. 죽여. 특히 나는 100%지. 내가 그만두면 바로 즉사한다는 소리야. 바룬족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죽을 때까지 바룬족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바룬의 자손이자 한때 무단이었던 굴레 때문이지.”

“뭐? 말도 안 돼. 가족인데?”

김탄이 깜짝 놀라자 박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간간히 내쉬는 짧은 한숨 소리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들려왔다. 

김탄은 상상할 수도 없는 바룬족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가 가질 않아 말없이 어둠 속을 응시하기만 했다. 

김탄은 그가 생각하는 가족의 형태가 아닌 오로지 신념과 가문의 일원으로서만 살아야 하는 그런 가족의 형태가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놀라움 뒤에 박토가 가졌을 외로움과 고통을 생각해보니 김탄의 가슴이 갑자기 먹먹해졌다. 

물론 박토의 마음을 온전히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던 김탄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 가문이 멸족했다며. 그럼 형이 원하는 대로 바룬족으로 살지 않아도 되지 않아?”

순간 박토가 고개를 돌려 김탄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이지만 달빛에 비친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는 걸 김탄은 알 수 있었다. 

-또 뭘 잘못 말했나?-

김탄은 조바심이 나서 쩔쩔매자 그때, 박토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돼지.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어. 바룬족은 갚아야 할 게 있으니까.”

“뭘? 혹시 오운족에 대한 복수? 아니 파이온?”

“그 이상이야. 다 얘기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라. 다음에 얘기해 줄 게.”

더 이상 대화는 그만 한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박토의 말을 김탄이 이해하지 못한 듯 다시 재잘거렸다.  

“운명이라 그런 거겠지? 형이 바룬족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무단이 될 필요도 없었고 또 이렇게 힘든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거였잖아? 정말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걸까? 정말 운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는 것 밖에 없는 걸까?”

김탄이 물었지만 박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 그를 화나게 한 건가?-

박토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생각한 김탄은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슬쩍슬쩍 곁눈질로 박토의 눈치를 보기만 할 뿐.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긴장이 흘렀다. 

그런 고요한 긴장 뒤로 간간히 들리는 마영식의 코 고는 소리가 김탄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김탄이 슬쩍 마영식의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코 고는 소리는 사라졌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 영식이 형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웠지?”

김탄의 물음에 여전히 대답 없는 박토.

-단단히 화가 났나 보네. 바룬족으로 태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으니까. 다시 태어나란 소릴 한 거나 마찬가지니 화가 날 수밖에.. 또 내 말실수지 뭐.-

“미안해. 토 형.”

역시 그는 화가 났다는 듯 대답이 없었다. 의기소침해진 김탄은 ‘그냥 잠이나 자자’라는 심정으로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살짝 돌려 박토를 쳐다보았다. 박토는 똑바로 누운 체 팔을 이마에 올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잠에 든다고?-

믿을 수 없었던 김탄이 머리맡에 놓아둔 전화기를 들었다. 이 전화기는 박토가 그의 전화기를 박살내 미안하다며 새로 살 줄 때까지 쓰라고 준 구식 스마트 폰이었다. 흔들어 대기 화면을 깨우고는 박토 쪽으로 비쳤다. 

“뭐 하는 거야?”

자는 줄 알았던 박토가 갑자기 말하자 김탄이 화들짝 놀랐다.

“아, 미안. 말이 없기에 자는 줄 알았어.”

박토가 그대로 얼굴을 돌려 김탄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김탄의 스마트 폰으로 눈의 초점을 이동시킨 박토는 깜짝 놀라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그가 물었다. 

“네 여자 친구야?”

“아차.”

김탄이 스마트폰을 박토에게서 치우며 황급히 화면을 껐다. 그러자 박토가 다시 물었다.

“너 여친 없다고 했잖아?”

김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친 아니야.”

“그럼 누군데 스마트 폰 배경화면에 띄어놨지? 대체 그건 언제 깔아 논 거야?”

이번에는 김탄이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박토가 채근했다.

“누군데 말을 안 해? 혹시 여친 없다고 한 게 거짓말이라서 그런 거야?”

“아니야. 진짜 여친 아니야.”

“그럼 대체 누군데?”

김탄이 마지못해 웅얼거렸다.

“걸 그룹 또라또라 멤버 지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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