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돕고 있다.

“그래야 하니까.”

“왜? 나랑 토 형이랑 두번 째 바탈만 태울 거면 바이크 세대면 충분하지 않아?”

“아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김탄은 박토의 요구에 난처했다.

마영식과 고순정 그리고 KKJ 회원 중 몇몇은 김탄과 친분이 조금 있었지만 전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영식이 김탄의 어깨를 턱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 우린 죽으나 사나 함께 하기로 맹세한 풰밀리니까.”

“정말 괜찮겠어? 형. 진짜 위험할 수도 있어.”

김탄의 물음에 대답 대신 마영식이 갑자기 건너 방에 모여 있는 KKJ 회원들을 보며 소리쳤다.

“내 말이 맞지? 함께 할 거지?”

영식의 말에 KKJ 회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영식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김탄과 박토를 쳐다보고는 물었다.

“됐지?”

김탄과 박토는 즉시 해맑은 미소부터 짓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모든 게 순조롭다.-

박토는 지금 하늘이 돕는 기분마저 느꼈다.

그런데..

“그런데..” 라며 갑자기 박토의 뒷덜미에서 어두운 기운과 함께 아이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만 해도 그냥 짜증이 나는 오운족 놈들의 목소리.

박토가 인상을 확 쓰며 돌아보곤 그냥 화들짝 놀라버렸다. 오운족이라서 그런가?

어느 새 와 있었던 건지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던 아이신 때문이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박토는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도 살짝 났다.

“언제 온 거야? 방금까지 저기 현관 근처에 있었잖아.”

“소리 없이 나타나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게 우리 주특기잖아. 새삼스럽게 왜 이래.”

“저리 안 꺼져!”

박토가 화 났다는 듯 코 평수를 넓히며 소리부터 치자 아이신은 난처한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휴. 화내지 마. 친구. 뭐 좀 물어보려고 그러는데 너무 야박하네. 어렸을 때 발가벗고 같이 수영도 한 사이인데.. 쩝.”

“거기서 입맛은 왜 다셔! 안 꺼져! 되도록이면 내 눈에 띄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 오운족.”

지금 박토는 곧 폭발하기 직전인 것처럼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그 모습을 본 아이신은 기겁하며 당황했다.

-큰일이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 무조건 그의 화를 눌러야 한다.-

아이신이 무언가 박토를 달래기 위해 모략을 짜내는 사이 갑자기 아수하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가로막고는 박토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신은 단지 알엔디 센터에서 어떻게 탈출할지 걱정돼서 그런거니까 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줘. 너를 추행하기 위해 너한테 바싹 붙어 있던 게 아니야.”

-역시, 오빠 마음을 알아주는 동생이다.-

어려울 때 언제나 나타나 해결사 역할을 해왔던 아수하가 오늘도 이렇게 매번 아이신을 구해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아이신은 박토 때문에 살짝 주눅이 든 마음에 용기가 생겼다.

“맞아. 친구로서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 잠입은 해도 탈출이 문제잖아.”

그런데 아이신의 말에 박토가 정색부터 했다.

“친구?”

“응.”

“누가?”

“너랑 우리랑.”

“웃기고 있네.”

“너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와 아수하는 친구라고 생각해.”

박토가 어이가 없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어릴 때 배신을 하는 바람에 우리 바룬족이 멸족하는데 일등공신을 했고, 나타나서 도움은 커녕 계속 사고나 치고 발목이나 잡으며 바보 같은 일만 벌이는데 친구라고?”

할 말 없는 오운족 아이신 아수하. 그저 시무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박토는 아직도 20년 전 화가 안 풀렸다는 듯 씩씩거리다 갑자기 손으로 마영식과 김탄을 가리켰다.

“너희들은 얘네들을 보고 느끼는 것 없어? 무슨 상황에서도 믿고 도와주고 또 격려하고 함께 하는 김탄과 마영식을 보고 느끼는 거 없냐고?”

아이신과 아수하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자꾸 비교질해서 짜증이 났지만 모두 맞는 말이다.

친구라는 건 서로 믿고 도와주는 것.

하지만 아수하와 아이신은 그들의 친구였던 박토를 배신했던 과거가 있으며 또 현재도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았다.

본마음을 들켜서 그런 것인지 그들은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박토가 또 소리쳤다.

“당장 꺼져! 이 바보들아!”

“그건 안 되는 일이야. 우린 이 집에서 못 나가.”

아수하가 대들자 박토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뭐? 너희들이 왜 그걸 결정해? 이 집은 내 집이야. 나가라면 나가라고.”

하지만 꿈쩍도 안 하는 오운족. 박토는 이들을 보고 이가 갈렸다.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 와서 헛소리만 찍찍하며 또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도 않는 이들에게 환멸을 느껴 혈압마저 터질 것도 같았다.

그가 손으로 뒷목을 잡자 아수하가 박토 곁으로 다가와 오운족이 이 집에서 왜 나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또박또박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 집에서 나갈 수 없는 이유는 우리도 파눔의 예언을 지키는 자들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가 너희들이 모두 알앤디 센터로 가면 월을 돌봐야 해. 지금 월은 안방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누워있잖아? 만약 우리 없이 혼자 있다가 깨어난다면?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무섭지 않을까? 몸도 성하지 않은데 물을 누가 가져다주고 밥은 누가 먹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이 집에서 나갈 수 없어. 박토. 인정해.”

아수하가 박토에게 오운족의 필요성을 강하게 어필하자 박토는 이상하게 혈압이 내려갔다.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말.

아무도 없는 집에 월을 혼자 두고 두 번째 바탈을 구하러 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러면 안 되지. 바룬족 보배인 박월을 혼자 둘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찰거머리 같은 진드기와 함께 하고 싶지는 않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는 생각에 박토는 가슴도 답답했다. 꼭 오운족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

-빌어먹을.-

박토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아.”

머리가 아파 눈을 감고 오운족을 도륙 내는 상상을 하던 박토의 귀로 한 남자의 음성이 파고 들었다.

“저기.. 박토 씨?”

눈을 뜬 박토.

그 음성이 주인이 누군지 찾으러 두리번거리자 소파 끝자락에 앉아 있던 코피가 수줍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부른 것.

박토가 ‘왜 나를 불렀소’라는 듯 눈을 크게 뜨자 코피는 상당히 수줍어하며 웅얼거렸다.

“전 뭘 해야 하죠?”

박토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가? 왜 저런 질문을 하지?-

의문에 그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코피를 노려보자 그가 갑자기 빙긋이 웃었다. 초콜릿 색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반짝여 더욱 새하얬다. 해맑은 코피의 표정.

박토는 오운족 때문에 상한 마음이 그 미소를 조금은 누그러졌다.

“뭘 해야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박토의 물음에 코피가 다시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전 바이크를 못 타거든요. 그렇다고 할 일 없이 그냥 있기도 미안해서요. 장자께서는 연즉무용지위용야 역명의(然則無用之爲用也 亦明矣)라 하셨죠.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이라 생각하시고 저를 써 주세요.”

코피가 말을 마치자 박토의 집 거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체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지금 모두가 코피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전국 시대 송나라 몽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 장자까지 들먹이며 그가 한 말에 대한 답을 하려면 뭔가 알아야 하는데, 여기 이 집에는 그 대답을 할 만한 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정적은 아주 오래 지속됐다. 시간이 흐르고 그 오랜 정적을 깬 건 박토였다.

“저 외국인 씨가 신우 프로텍 직원이었다고?”

박토가 김탄에게 묻자 김탄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박토는 그대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런 숙고 끝에 갑자기 그가 고개를 돌려 아이신과 아수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외국인 씨가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군요.”

분명 코피에게 한 말인데 왜 오운족을 바라보면서 했을까? 분명 이 뜻은 오운족이 할 일을 코피에게 시키겠다는 뜻. 하지만 오운족은 이해를 하지 못해 그저 멀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한편 박토의 뜻을 정확히 캐치한 코피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코피 아논이에요. 그냥 코피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대한민국의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세네갈에서 왔습니다. 힘든 타국 살이었지만 전 여기가 좋아요. 물론 신우 프로텍 폭파로 생계도 잃고 터전도 잃었지만 괜찮아요. 전 제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거든요. 그리고 전 화랑 오계에 나오는 교우이신이라는 구절을 좋아해요. ‘믿음으로서 벗을 사귀어야 한다’ 말이죠. 뭐든 맡겨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코피의 한국말은 눈을 감고 들으면 한국 사람보다 발음이 좋았다. 게다가 인성이 좋은 선량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박토는 내심 그가 맘에 들었다.

“그럼 코피 씨. 우리가 알엔디 센터로 간 후에 여기 남아 제 조카 월을 돌봐 주시기 바랍니다.”

박토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아이신과 아수하가 동시에 소리쳤다.

“절대 안 돼!” “그건 위험해!”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첫 번째로 김탄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코피 형은 좋은 사람이야! 한국에 온 지 11년째인데 항상 바르고 정직하고 근면했다고!”

두 번째로 영식도 화가 났다는 듯 김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우리 코피 형은 위험한 사람이 아니야! 항상 희생을 하는 사람이었어! 위험하다는 말 취소하지!”

세 번째로 박토가 소리쳤다.

“그러니까 꺼지라고! 당장.”

당황한 아이신이 황급히 두 손을 내둘렀다.

“오해하지 마. 그게 아니야. 인종차별 의도는 전혀 없었어. 단지 월이 깨어나서 저 외국인을 보고 놀랄까 봐 그런 거야.”

아수하도 서둘러 아이신의 말에 부연설명을 했다.

“맞아. 아무도 없는 집에 낯선 사람이 있는 걸 보고 월이 놀라서 또 다치면 위험하잖아.”

아이신, 아수하 둘의 말에 박토가 토를 달았다.

“너희 둘이 필요가 없어질까 두려워서 말한 건 아니고?”

본심을 완전히 들켜버린 아수하와 아이신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 그대로 또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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