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에서 들리는 소리

요셉신부를 보자마자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윤소피아의 거처로 옮겨진 다음, 의사의 왕진을 받고 수액을 맞았고, 그리고 사흘이 지나자,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됐다. 모든 게 희미하게 의식은 돌아왔어도 뇌는 암전 상태였다.

땅거미처럼 짙게 내려앉던 저녁 무렵이었다. 요셉 신부가 내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 봤다. 그런데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제야 요셉신부는 열어둔 창문을 닫았다. 그가 내 머리맡으로 다가와 앉으며 그 어떤 말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이 나직하면서도 신비롭게 들려왔다. 그러자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는 한정수의 꿈을 꾸었다. 그는 바다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소리를 쳐도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거친 파도에 휩쓸려 갔다.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힘없이 눈을 떴다.

“비아!”

요셉 신부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귀밑머리가 새하얗고 얼굴도 창백했다. 예전에 반해 입고 있던 옷이 헐거워 보일 정도로 몸이 말라 있었다

“신부님.”

“그래,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네. 신부님의 건강은요?”

“이제는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어. 처음엔 병든 몸을 용납할 수가 없었지. 기생충처럼 늘어나는 암세포들도 날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 성모님 덕분인가 봐. 큰 통증은 사라졌어. 소피아가 죽을 쑤어 오면 조금이라도 먹자. 기운을 차려야 할 것 아니야.”

핏기없는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잠시 머물렀다.

“비아가 올 것이란 생각은 했다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어. 비아! 이곳은 천주의 안식처이지만 비아의 안식처이기도 해.”

“저보고 이곳에서 신부님과 함께 살자고 하시는 거예요?”

“비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난 성직자야, 평생 순결 서약을 지키며 살아왔어.”

“신은 인간에게 최후의 행복인 성의 쾌락을 주지 않았나요? 신부님, 그건 정말 모순된 생각이에요.”

나는 요셉신부의 아집에 가까운 생각을 지워주고 싶었다. 성직자인 요셉에게, 더구나 중병이 걸린 그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일이었음에도, 그가 빈틈을 보이지 않자 화가 치밀었다.

“애욕은 잘못하면 추악한 의미로 쓰일 수도 있지. 또한,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야. 비아와 나는 여자 남자라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돼. 이제 이런 말장난은 그만하자. 비아와 말다툼하며 남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그러기엔 나에게 시간이 없어.”

“그럼 약속해줘요. 여자로 보지 않아도 되니까, 신자로도 보지 마세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음식 먹고 천천히 기운을 찾도록 해. 산책이라도 하고. 누워만 있으니까 더 힘이 없는 거야.”

“이제 한국 사람이 다 되셨군요. 언어가 저보다 더 능숙해요.”

“어디 말뿐인가. 음식까지도 모두 한국 음식으로 먹고 있지. 그리고 이곳에 묻히게 될 거고.”

어느새, 그의 두 눈에 이슬이 가득했다. 그 물빛의 의미는 아마도 저편에 흐르고 있는 이별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었다.

미음을 몇 숟가락 뜨고, 요셉 신부의 부축을 받으며 정원으로 나갔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연기가 성당의 종탑까지 걸쳐있었다. 민가에서 불을 피워놓아 사방이 메케한 연기로 가득했다. 나는 성모상 앞에 있는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요셉 신부의 몸은 곧 쓰러질 듯 가냘프게 보였다. 정원수로 심어놓은 귤나무가 군데군데에 서 있었다. 푸른 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성모상의 미소가 밤이면 더욱더 밝고 환해져. 난 이 시간이 참 좋아! 성모님과 하나가 된 기분이 들어. 성모님은 우리를 향해 늘 자애로움을 품고 계셔.”

“신부님! 이곳에 오기 전에 예전에 살던 고향에를 들러 엄마의 묘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엄마 곁에 다른 묘가 있더군요. 물론 아버지란 사실을 고평오를 만나서 알게 되었어요. 신부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죠?”

“고평오를 만났니? 힘들었겠구나.”

“고평오가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요셉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의 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를 꺼내는 듯도 싶었다.

“내가 성모의 얼굴을 닮은 가엾은 여인을 만나던 날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 이른 새벽이었어. 어린아이를 허리춤에 업고 한 여인이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더구나. 신도들은 천주교 재단에서 나누어주던 구호품을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혈안들이었는데, 그 여인은 얼굴이 창백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어.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는데도 아기를 업고 있는 그 여인은 돌아가지 않더군. 해서 그 여인을 불러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주었지. 나는 그 여인의 눈에 어린 물빛을 보았어.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와 같은 눈빛이었어. 어린애는 목을 축 늘어뜨린 채 잠들어 있었어. 여인의 몸은 무척 가냘프더군. 나는 그녀의 슬픔을 금세 읽을 수 있었어. 내가 물었지 누굴 찾느냐고. 여인이 말하더군. 딸애가 없어졌다고. 그 애는 제 아빠를 닮아 는개 같은 아이라고. 나는 는개가 무엇인지 몰랐어. 후에서야 는개는 태양을 기다리는 작은 빗방울이라는 것을 알았지. 비아야! 난 사제이기 전에 한 여자를 사모했어. 그 창백한 여인이 애타게 찾던 그 아이를 훗날 사랑하게 됐단다. 늘 주홍글씨 이야기처럼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았어. 나만의 주홍글씨 말이야. 지금도 그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괴로워하고 있지.”

요셉은 쓰러질 몸을 휘청거렸다. 몸을 벤치 등받이에 기대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신부님, 정말 그랬어요? 저는 신부님이 엄마를 사랑하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저주를 했던 적도 있어요.”

“한 청년이 있었단다. 사랑했던 여인과 이별을 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고독한 삶을 살았어. 세월이 흐른 뒤,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운명처럼 청순한 여자를 만난 거야. 그 청순한 여자는 지난날 그가 사랑했던 여인을 너무도 닮아있었고, 그런 이유로 그는 곧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 20년이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모든 걸 사랑했고,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어. 그런데 청순한 여자의 엄마를 만나는 순간이었어. 그 옛날 그 청년이 사랑했던 그 여자였던 거야! 사내는 정신없이 방황했지.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었겠어. 하지만 그는 결국 사랑은 색깔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바로 그거야. 분명 똑같지는 않아. 하지만 비아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그 어떤 사랑보다 깊고 순수해. 영적인 결합을 바라고 있는 내가 너무 욕심이 과한 것일까. 물론 영적인 결합이란 말 자체를 떠올린다는 사실도 내 신분으로도 신에 대한 모독이야.”

“당연히 현재의 사랑이 가장 소중히 여겼어야 해요.”

“그런데도 나는 결코 사제복을 벗을 수 없었어. 몇 년 전 비아를 그렇게 돌려보내 놓고도 말이야. 하지만 무척 괴로웠어. 비아를 너무 힘들게 해서 말이야. 그런데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비아는 그런 내 마음도 알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기 시작했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해갔어. 그래서 나는 절망했어.”

요셉 신부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엄마도 신부님을 사랑하셨나요? 엄마가 성당을 다녀온 날은 얼굴이 붉은빛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난 묘한 질투심을 느꼈어요.”

“아니야. 그건 아니야. 마리아는 너무도 고통스러워했어. 마리아는 너무나 힘들어했어. 밤새 성모마리아 앞에 엎드려 기도했지. 마리아는 시몬을 잊지 못했어. 나와의 사랑은 그런 연인관계가 아니었어. 마리아 자신 때문에 비아가 대신 벌을 받은 거로 생각하며 힘들어했어. 나는 마리아의 아픔이 그토록 처참하리라는 상상도 못했어.”

요셉 신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울먹이던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죠?”

나는 요셉 신부를 채근했다.

“마리아의 몸에도 분홍 꽃이 피기 시작했어….”

“분홍 꽃이라니요?”

“오랜 시간 잠복기를 가졌던 거야! 네 아버지 시몬에게서 옮겨진 나병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마리아의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

“엄마도 그럼 한센병을 앓았다는 건가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요양 중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늘 아버지를 기다렸어요. 아버지가 돌아온다면 지긋지긋한 전재미 마을을 떠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다림이었어요. 엄마는 갈수록 냉정했어요. 늘 멍하게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어요. 나는 그 분홍꽃을 한 번도 보질 못했어요. 엄마는 철저했군요. 내게 그림 활용법을 가르친 것도 떠나보내기 위한 준비였군요. 그런 엄마가 늘 의아스러웠어요. 신보살이 불을 지르던 그 날, 모든 사람은 멀쩡했는데 엄마와 동생만 불에 타죽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엄마는 분홍꽃과 함께 사라진 게 분명해요. 어린 동생을 품에 꼭 껴안은 채로.”

요셉 신부는 성모상 아래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며 흐느껴 울었다. 성당 주위에 쌓은 돌담 구멍 사이로 바람이 몰려들었다. 비릿한 바다 냄새와 함께 바람이 몰려왔다. 그런데도 요셉 신부는 마치 동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부님! 그만 들어가세요. 바람이 차요.”

“비아야! 네가 항상 내 몸 안으로 파고드는 긴 꿈을 꾸었단다. 그럴 땐 밤새 기도를 했어. 마음은 늘 비아에게 향하고 있었단 사실을 믿어줘.”

“신부님은 결코 날 놓아주지 않았어요. 신부님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랬었지. 널 잃고 싶지 않았어. 구렁텅이에서 널 구해내고 싶었어.”

“신부님! 신의 저주는 열 살 때 이미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죠?”

“비아! 오늘은 그만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너무나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니 오한이 나고 숨이 막혀온다.”

그는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나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아 일으켜 세웠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이었다. 소녀의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왔던 금발 머리 파란 눈의 신부가 이젠 아니었다. 마치 허물을 벗듯 그렇게 몸은 쇠락해가고 있었다. 바람결에 그의 체취가 은은하게 날렸다.

“신부님과 마지막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요.”

“비아가 조금만 일찍 나를 찾아주었더라면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이젠 틀린 것 같아. 이런 가을 날씨조차 견디기 힘들어. 하루하루가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럼 아주 가까운 곳에 들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보고 왔으면 해요.”

“내일이라도 날이 좋으면,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자.”

사제관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간 요셉 신부는 피곤이 몰려오는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나는 그의 몸에 찬 기운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이불을 다독이며 잠자리를 살폈다. 사제 침실 안은 처음 이었다. 금녀의 공간이었다. 방은 너무나 휑했다.

사제의 침실은 성스러운 제단과 아름다운 커튼이 쳐져 있고, 신과 쉽게 만날 수 있는 비밀의 장소가 있을 거라고 여겼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딱딱한 침대와 책상 작은 옷장 그리고 책꽂이와 성모마리아상과 십자상, 그리고 촛대가 전부였다. 설핏 잠이든 요셉 신부는 작은 숨소리를 냈다. 검은 수단을 입고 있어 얼굴이 몹시 창백해 보였다. 수단을 입었기 때문에 피부가 파리해 보일 따름이라고 여겼지만,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좀처럼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이제야 요셉 신부와 마음의 문을 열고 가까이 지낼 수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쉽사리 떠나보내지 않을 겁니다. 좀 더 버텨주세요.’

나는 성모마리아상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잠시라도 좋으니 요셉 신부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주세요. 이젠 당신을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신부님 곁에 있게 해준다면 다시는 복수 따위를 하지 않겠어요.”

살포시 잠들었던 요셉 신부가 나의 기도 소리에 눈을 떴다. 그의 파란 눈이 너무도 맑고 깨끗했다.

“비아와 정말 마지막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어디라도 좋아요.”

“컨디션이 좋아지면 소록도를 다녀오고 싶어.”

“소록도는 갑자기 왜요?”

나는 몹시 가슴이 뛰었다. 그 분홍의 땅을 왜 찾아가려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인생을 멍들게 했던 그 분홍의 땅은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섣불리 소록도란 말을 내뱉을 수 없었던 긴 시간을 보내온 나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소록도에 가면 비아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나를 알 수 있을 거야. 그는 위대했어. 책상 위에 편지 봉투가 보이지? 혹시 비아가 끝내 날 찾지 않을 걸 대비해 써둔 글이야. 비아가 그 글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늘 기도하며 썼다는 걸 알았으면 해.”

나는 편지를 들고 사제관을 나왔다. 윤 소피아는 숙소에 없었다. 집안일로 본가에서 자겠다고 하고 숙소를 나갔다. 요셉이 건넨 편지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읽으려고 성경책 갈피에 꽂아뒀다. 찬 바람 때문인가, 온몸에 미열이 떠올랐다. 옷을 입은 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워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한정수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새의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맴돌다가 흩어졌다.

서울을 벗어나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젊음을 송두리째 먹어 치운 서울은 깊은 늪이었다. 밤이면 불꽃으로 유혹하는 도시였다.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휩쓸러 가야만 하는 도시였다.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 똑같은 얼굴 치장을 한 여자들이 봉고차에서 쏟아져 나오고, 남자들은 불야성 같은 밤거리를 떠돌며 그들의 젊음을 뿌리고 다녔다.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서야 알았다. 나 역시도 그 무리 속의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나온 일들이 떠올라 몹시 현기증이 일어났다. 속이 메스꺼웠다. 내 모든 허물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나는 하얀 볕이 얼굴 위로 가득 떨어질 때까지 가위에 눌려 있었다. 때때로 쇠사슬에 묶여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이 옥죄어왔다. 검은 그림자가 내 발목을 누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누구인가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검은 그림자가 누구였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쇠사슬에서 풀려나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그런데도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사라졌다. 그때, 종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풀려났다는 게 퍽 다행스러웠다.

창가로 다가섰다. 요셉 신부가 종을 치고 있었다. 돌담 사이로 와와 거리며 휘돌던 바람이 성당 마당을 휩쓸고 있었다. 창문에서 내려다본 요셉 신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어제보다는 훨씬 좋아 보였다. 요셉 신부는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서며 오늘 일정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비아, 오늘은 피정하러 다녀와야겠어. 아랫마을에 사는 마리아가 병환으로 힘들다는 연락이 와서 그곳을 먼저 갔다 오고 여행을 가도록 하자.”

요셉 신부는 늘 이런 식이었다. 늘 한 발짝 물러나면 가슴을 열고, 내가 다가서면, 사제의 위치에 서 있을 뿐이었다. 단지 의식적인지 약간의 애정을 나눠주는 것처럼 들려왔다.

“신부님이 사랑이 무엇인지나 아세요. 저는 신부님을 완벽하게 소유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단 말이에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신부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알아요. 저 신부님을 그냥 이대로 하늘로 돌려보낼 수 없어요.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을게요. 사제가 아닌 당신의 연인으로 단 몇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허락해 주세요.”

“비아, 그러지 마. 그건 옳지 않아.

“그건 핑계에 불과해요. 신부님 신분에 오점이라도 남길까 봐 그런 거죠? 제가 아직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도 신부님 때문이에요. 많은 남자와 사귀어도 늘 한 구석에 신부님의 그림자가 똬리를 틀고 있었단 말이에요. 저 혼자만의 생각인가요? 전 아직도 미아 상태라고요.”

“신분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널 사랑하기 때문이야. 아직도 내 마음을 그렇게 모르니?”

“정말 신부님은 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제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달라고요.”

나는 문을 열고 성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요셉 신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백미러에 요셉 신부가 멍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둔탁한 물체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뻐근하게 아파 왔다. 담아도 채워지지 않은 가슴 속 항아리는 큰 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택시는 산굼부리로 달리고 있었다. 오름의 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굼부리에 가면 가느다란 바람에도 못 견뎌 흐느껴 운다는 억새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들도 없었다. 밤새 눅눅해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길을 따라 피어 있는 억새꽃은 여러 무리의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비아, 산굼부리는 신이 아니고서 저토록 아름답게 빚을 수는 없어.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비아를 생각했어. 산굼부리 정상에서 본 광활한 녹지와 먼 오름들의 능선을 비아와 함께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아, 저 나약한 억새가 서로 몸을 의지하고 하늘을 향해 힘껏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봐. 자연의 숭고함에 숙연해지지 않니. 어쩌다 구름 속에 가려진 태양이 억새꽃 위에 내려앉는 날엔 신의 손길이 느껴지기도 해. 비아와 나는 일렬로 서 있는 오름에 불과해. 제각기 제 몸짓으로 그 자리에 서서 제 몫을 해야 하는 거야. 산처럼 어깨를 마주하고 붙어서 기생할 수는 없는 거야. 해서 난 산굼부리에 올라오면 너를 생각한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 비아를 향하고 있는 그리움을 최면이라도 걸어 풀어버리는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비아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지. 난 매일 고백성사를 한단다. 비아를 사랑한 죄를 고백하면서도 다음 날 또 사랑하게 되지.’

한참을 서서 나는 요셉의 음성으로 내 생각을 듣고 있었다. 소중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신은 늘 앗아가 버렸다.

신은 자신이 이길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한없이 유약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뿐, 내가 고통을 이겨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눅눅한 이슬에 젖어 들어 발끝에 차가운 이물질을 밟는 느낌이 들었다. 정상에 오르자, 몹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산굼부리는 마치 종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처럼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다. 깊이가 100m 둘레 2km가 되며 봉우리가 발달하지 않은 특이한 분화구였다. 산굼부리 분화구는 제주도에서 유일한 밑에서 폭발하여 폭발물이 쌓이지 않고 다 분출되는 바람에 뻥 뚫려버려 봉우리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일명 구멍 화산이라고 불렸다. 그 분화구에는 희귀한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는데, 분화구의 일조량에 따라 활엽수림의 종류도 다양했다. 나는 그 가운데 서서 요셉 신부를 그리워했다.

이경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22년 직지소설문학상 중편소설 최우수상 수상 ‘달루에 걸린 직지’

*저서: 장편소설 『는개』, 『탈의 꽃』,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아름다운 독』,『달루에 걸린 직지』에세이집『아난다가보내온 꽃씨』 출간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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