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나소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소희 집은 잘 살았지만 부모님이 경제관념 교육상 용돈은 한계치를 정해 빠듯하게 주고 있었다.

제대로 된 소비를 하라는 뜻이었지만 나소희는 그 뜻을 헤아리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해소했다.

바로 반에서 힘없고 약한 아이들의 용돈을 갈취하는 방식이었다.

나소희의 마수에 걸린 다른 아이들은 모두 상납을 해왔지만 미캐는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줄 돈도 없었고 또 있어도 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틈만 나면 나소희는 패거리와 함께 떼거지로 미캐를 괴롭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잠도 못 자 피곤한데 괴롭히기까지 하니 신경이 예민했던 미캐는 성질이 났다.

하지만 분란을 일으키기 싫었던 미캐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꼬깃꼬깃해진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나소희에게 주었다.

“이것밖에 없어. 이제 놔줘.”

“장난 해? 오만 원이라고 했잖아.”

돈을 주면 잠잠해질 거라는 미캐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갑자기 나소희가 미캐의 잡은 팔을 거칠게 끌며 일으켜 세우고는 교실 뒤쪽으로 끌고 갔다.

그 바람에 아이들의 책상들이 삐뚤빼뚤 엉망이 됐다.

책상이 없는 교실 뒤편으로 가자 나소희의 패거리들이 미캐와 나소희를 빙 둘러쌌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볼 수 없게 만든 것.

그러자 나소희가 갑자기 미캐의 팔을 잡은 손을 놓는 것과 동시에 미캐의 가슴을 밀쳤다.

미캐는 그대로 교실 뒤편 사물함에 몸이 부딪히고는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미캐가 화가 나 나소희를 째려보았다.

“뭘 꼬라 봐? 풰이스 존나 구린 게.”

나소희의 말은 미캐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녀는 혼혈이었다.

당연히 외모가 한국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밝은 갈색 머리 색을 검게 염색해도 얼굴에서 풍기는 묘한 이국적인 느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미캐는 어렸을 때부터 그 얼굴이 싫었다.

미캐의 콤플렉스였다.

나소희 말은 그 콤플렉스를 정확히 건드린 것.

미캐는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태어나 보니 혼혈이었고 또 자라고 보니 달랐다.

정말 미운 오리 새끼처럼 외로웠고 또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 사람 그리고 또 그냥 아이였다.

왜 다들 다르게 대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나소희 입에서 나온 말은 혼혈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미캐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울면 또 조롱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만 가득했다.

그때 갑자기 나소희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로 들렸다.

“야! 뒤져 봐.”

그 순간 미캐는 만 원을 나소희에 준 게 큰 실수라는 걸 깨달았다.

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저 여느 때처럼 협박이나 하나 되돌아 갔을 것이다.

“나 진짜 돈 없다고!”

미캐가 소리를 쳐 봤다.

그러면 그만 둘까 그래서였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소희의 명령에 그녀의 시녀들은 사정 없이 그녀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진짜야. 진짜라고.. 뒤져도 소용없어. 그만 해.”

미캐가 겉옷을 여미며 저항했다.

“야. 시은이하고 나정이 너. 뒤로 가서 쟤 팔 잡아.”

나소희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 두 아이가 미캐의 뒤로 가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이제는 옷도 여밀 수 없게 된 미캐.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소리쳐봤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만원 때문에 더 돈이 있을 거라 생각한 나소희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시녀들이 겉 옷을 뒤지고 안 쪽에 있는 옷을 뒤지기 시작하자 미캐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미캐는 사실 돈이 있었다.

어젯밤 잠을 못 잔 게 화근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와 괴롭히는 나소희가 성가셨던 미캐가 빨리 쫓아 보내기 위해 던진 만 원의 미끼.

그 미끼에 지금 미캐가 걸린 꼴.

더 참았어야 했다.

어젯밤 하필 늦게까지 술주정을 한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이 꼴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미캐는 지금 억울하기만 했다.

또 조만간 그녀가 안쪽 깊숙이 숨겨 논 돈이 발각될 거라는 사실에 미캐는 두렵기도 하면서 화도 났다.

결국 그녀의 조끼 안주머니에서 돈을 찾아 낸 나소희의 시녀들.

돈을 보자마자 흔들며 조잘거렸다.

“야. 이것 봐. 존X 거지가 돈은 많이 가지고 있네. 대박.”

그제야 팔짱만 끼고 명령만 하던 나소희가 움직였다.

시녀의 손에 들린 돈을 낚아채고는 얼마인지 세었다.

“10만 원이네. 그러길래 오만 원을 줬으면 이걸 뺏기지 않지. 멍청이.”

나소희는 돈을 접어 바지 주머니 넣고 미캐를 풀어주라고 고갯짓을 했다.

그제야 결박에서 풀린 미캐.

그대로 나소희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내놔! 내 돈! 엄마 만나러 갈려고 모은 돈이라고! 빨리 내놔!”

갑자기 달려가던 미캐의 배를 시녀 하나가 발로 찼다.

그대로 뒤로 쿵 나가떨어져버린 미캐.

충격이 상당히 컸는지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몸을 추스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모두가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미캐는 순간 세상이 싫었다.

결국 힘없게 몸을 일으킨 미캐가 울먹였다.

“돈 돌려줘. 그거 엄마 만나려고 모은 돈이야. 나한텐 소중한 돈이라고..”

나소희의 패거리 중 한 여자애가 비웃었다.

“쟤 뭐래는 거냐?”

그 여자애의 말에 다른 여자 아이가 비꼬았다.

“쟤 엄마가 매매혼이라 적응 못하고 도망 갔는데 찾으러 간다는 말이래. 크크.”

그 뒤로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쏟아졌다.

“우웩. 더러워!”

“그래서 풰이스가 구린가 봐.”

“돈 때문에 결혼했는데 돈 없어서 튀었다며? 큭큭.”

계속되는 조롱에 미캐는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엄마를 희롱하는 건 더욱더 그랬다.

“아니야! 우리 엄마 그런 사람 아니야! 사과해. 당장!”

하지만 나소희와 그녀의 시녀들은 사과할 마음이 없었다.

대신 더 과격한 말들을 미캐에게 쏟아냈다.

“뭐래? 병X이..”

“제발 학교 좀 나오지 마라. 니 와꾸 보기도 싫으니까.”

“너도 빨리 너네 나라로 꺼져. 병X아.”

미캐가 받아 쳤다.

“나는 한국인이야. 그런데 왜 꺼지라고 하는 건데?”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나소희가 입을 열었다.

“몰라서 물어?”

미캐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나소희를 노려보자 그녀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길게 기른 미캐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우리랑 다르니까. 네가 아무리 검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해도 네 머리칼은 원래 밝은 갈색이거든. 너무 튀어서 재수 없어. 그래서 꺼지라는 거야. 넌 한국사람이 아니니까.”

순간 미캐는 울컥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나소희와 시녀들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참았다.

그리고는 나소희를 향해 이를 갈았다.

“니들이 더 재수 없어. 재수 똥이라고. 그래서 너희들한테서 똥 냄새 난다고.”

미캐의 말이 나소희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녀가 굳어진 얼굴로 그녀의 시녀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마치 본보기를 보이라는 듯.

그녀의 의중을 알아들은 시녀 중 하나가 주머니에서 커터 칼을 꺼냈다.

칼을 본 미캐는 곧 끔찍한 일을 당할 거라는 생각에 몸을 움츠렸다.

시녀들이 다시 미캐를 둘러쌌다.

밖에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커터칼을 든 시녀가 미캐의 낡은 패딩 점퍼를 그어대며 조롱했다.

“옷 구린 거 봐라. 언제 적 유행하던 건데.. 촌발 지대루네..”

그러자 다른 시녀가 덧대었다.

“거지라서 그런 거지. 엄마는 돈에 팔려 왔다 도망갔잖아. 아빠가 거지라서. 크크크.”

이런 식으로 나소희의 시녀들은 한동안 미캐와 욕과 비야냥을 퍼부었다.

결국 미캐의 패딩 점퍼는 그게 원래 그 옷이었던 지도 모를 정도로 너덜해졌다.

날리는 오리 깃털에 미캐의 얼굴과 머리 그리고 그 주변은 엉망이 되었다.

정말 미운 오리 새끼.

섞일 수 없는 이방인.

잘못 태어난 아이.

미캐는 서러움에 목이 메었다.

하지만 나소희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나소희가 시녀들과 떠나자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선생님이 이꼴을 보면 분명 뭐라 할 게 뻔했기에 미캐는 서둘러 엉망이 된 패딩 점퍼를 벗어 돌돌 만 후 휴지통에 넣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오리 깃털을 손으로 쓸어 모았다.

자꾸 눈에서 솟구치는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눈물.

손으로 훔쳐봐도 소용 없었다.

이를 악 물어봐도 멈추지 않았다.

미캐는 오리 깃털을 모으는 걸 포기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이 모아 놓은 오리깃털로 떨어지자 그녀의 귀로 음성이 들렸다.

<뮤턴트 A-0. 시냅스 스케일링 해제.>

음성과 함께 현실로 돌아 온 이미캐.

눈을 뜨자 삭막한 천장이 보였다.

조금 전 생생한 과거 때문인지 이곳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그녀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냥 혼자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어쩌면. 그 악마 새X 말대로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정말 X같잖아?”

미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이전의 실험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썩 반갑지도 않았다.

어차피 장소만 달라졌지 또 다른 실험의 연장을 위한 장소만 달라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이전과 다른 실험인지 주변에 색다른 의료기기들이 보였다.

그 의료기기 사이로 방호복을 입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뭐가 무서운 건지..

언제나 그녀를 대할 땐 저렇게 철두철미하게 보호를 하는 모습에 미캐는 웃음도 나왔다.

-나도 사람일 뿐인데.. 아무 해가 없는 사람일 뿐인데.. 오히려 너희들이 내게 더 해를 끼쳤으면서.. 마치 내가 다 잘못인 거처럼 그러니 X 같다.-

갑자기 한 사람이 다가와 미캐의 팔에 주사 바늘을 꽂았다.

반항할 힘도 없었지만 반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쓸데 없는 몸부림인걸.. 그래 니들 맘대로 해라. -

다 포기한 마음으로 팔을 쳐다보니 채혈을 하고 있었다.

-내 피가 다르다. 사람들하고는..-

그 생각에 미캐는 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쩌면 나는 잘못 태어난 게 맞는지도. 잘 태어났다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 테니까.-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고가 높은 회색 콘크리트 사이로 서치라이트 같은 조명이 군데군데 매입되어 있었다.

빛에 눈이 부셨던 미캐의 뇌리에 순간 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게 다 어렸을 때 만났던 꽃미남 오빠 때문이다.

엄마 볼 수 있다 힘 내라 그래서 결국 이런 일을 겪게 됐잖아?

미캐는 6살 꼬꼬마 때 길에서 한 중학생 남자를 만났었다.

그때 미캐는 죽는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죽으려고 했었다.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 없다는 아빠의 말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던 그녀에게 나타났던 천사 같은 중학생 오빠.

꼭 살아서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말에 열심히 살아왔던 그녀.

지금 미캐는 그를 만난 걸 후회하고 있었다.

빛을 계속 봐서 그런지 눈이 피로해진 그녀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채혈이 끝났는지 주사 바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귀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뮤턴트 A-0. 시냅스 스케일링 시작 3. 2. 1.>

미캐에게 다시 약물이 투입되자 그녀의 의식은 깊은 내면으로 빨려 들어가듯 흐려지지 시작했다.

그녀의 감은 눈 사이로 의식을 잃지 않으려는 마지막 발악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정말.. 진짜.. 이방인.. 어쩌면.. 태어나지 말아야 할 괴물이 맞을지도 몰라. 차라리 그 악마새끼 말대로.. 그냥.. 이대로.. 죽는 게 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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