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은 개뿔, 알고 보니 덫

은비칼의 말에 나채국은 갑자기 허공을 바라보며 눈시울 붉혔다.

마치 신에게 지은 죄를 참회하는 모습 같았다.

그러던 그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죽 속이 상하셨으면 목이 탈 정도가 될까요? 남의 물건은 손도 대지 않는 실장님인데 제 커피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마실 정도니까요.”

“우읍.”

잊고 있던 커피 생각에 은비칼은 다시 한 번 짧은 헛구역질을 한 번 했다.

그 모습에 나채국이 깜짝 놀라자 은비칼은 괜찮다면서 손을 위아래로 저었다.

그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나채국은 다시 말을 이었다.

“10분 동안 구역질을 하게 해서 미안해요. 실장님이 바퀴벌레가 목욕한 물을 마신 거에 대한 책임이 제게도 일정 부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이 바뀐 거예요.”

순간 은비칼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자신의 의도치 않은 희생으로 그들이 이렇게 인류를 위해 마음을 바꾸다니..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원하시는 보상을 다 들어주겠습니다! 말만 하십시오!”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은비칼이 먼저 보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은 기뻐하지 않는다. 절대 이럴 이들이 아닌데 왜 이러는 것일까?-

은비칼이 의아해하자 나채국이 무언가 멋쩍다는 듯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이번 파견 근무에 실장님도 가시죠?”

“아니요. 전 가지 않습니다.”

나채국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왜죠?”

“왜라뇨? 암호 해독하는 데 제가 필요한 가요? 전 컴퓨터 언어도 모르는데 쓸모가 없잖아요.”

“그럼 싫어요. 전 안 갈래요.

-변덕도 이런 변덕이 다 있을까?-

아이처럼 생떼를 피우며 돌변한 나채국에게 은비칼은 화가 났다.

“그럼 왜 가신다고 말을 했습니까? 장난하는 겁니까?”

“실장님이 같이 가는 줄 알았죠. 실장님이 같이 가면 가려고 했는데 안가신다니 가기 싫어졌어요.”

“아니, 굳이 왜 내가.. 아니 왜 나를..”

은비칼이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자 나채국이 아주 심각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썼다.

“프로젝트 난이도에 따라 보상에 대한 재 협상을 실시간으로 하려고요. 저번 보상은 너무 쉽게 결정을 해서 좀 손해 보는 느낌이었거든요.”

본심을 말한 나채국에게 순간 은비칼은 그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럼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다 짜고 친 상황극이라는 소리다.

이들은 처음부터 알앤디 센터로 파견근무 갈 생각이었다.

-그럼 그렇지.-

나중에 임원이 될 수도 있는 기회를 속물 근성 찌든 이들이 쉽게 버린다는 게 처음부터 어불성설이었다.

괴로운 마음에 은비칼은 제 손으로 마음을 달래는 듯 가슴을 토닥거렸다.

그러자 나채국이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장님과의 협상과정을 실시간으로 녹화도 할 거예요. 일종의 증거 확보죠. 제가 실장님을 좋아하지만 저번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걸로 신뢰도가 조금 하락했거든요. 그러니까 공과 사는 확실하게..”

지금 은비칼은 세상을 등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이 인간들은 언제나 대가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또 확실하게 계산도 잘한다.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

그리고 은비칼이 알앤디 센터로 같이 가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가지고 논 거라는 생각에 은비칼은 이들이 죽도록 미웠다.

언제나 은비칼보다 한 수 앞서는 나채국과 오강심.

이번에도 또 명확하게 은비칼이 졌다.

그 사실에 은비칼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분명 저번 보상보다 더 큰 걸 원할 텐데.. 심리전의 달인이다. 나의 조바심을 이용해 더 큰 걸 얻어내는 나채국 씨. 너무합니다!-

은비칼은 기분이 상당히 나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걸 안 할 수도 없고 또 안 하자니 인류의 미래가 저당 잡혔는데, 이걸 어쩌나?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내 손에 인류의 미래가 있는 걸?-

“좋습니다. 제가 같이 가는 걸로 하죠.”

나채국은 그가 원하는 대로 방향이 흘러가자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오강심도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간 걸로 보아 한패임이 더 분명해졌다.

-이런, 이런, 잔인한 사람들.-

이들의 표정에서 은비칼은 그의 미래의 불행을 읽을 수 있었다.

-대체 어떤 보상을 원하는 걸까? 교활한 미소로 봐서 상당히 출혈이 클 것 같다. 저번 보상에도 많은 돈이 지출 됐는데 또 지출이 늘면 내 속이 썩어 들어갈지도 모른다. 하아~ 빌어먹을 운석! 운석이 떨어진 이후로 이 둘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인류를 위해 또 그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이번에도 내가 희생하겠다.-

은비칼은 눈을 감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런 걸 배앓이 꼴린다고 하는 걸까?

그가 마치 나만 당할 수 없다는 듯 그들에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대신! 암호를 아주 빠른 시간 안에 해독하셔야 합니다!”

은비칼의 복수는 그들에게 무조건 잔인하게 일을 시키는 거였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그의 바람대로 그들의 마음을 전혀 아프게 하지 않았다.

나채국과 오강심은 너무 편안하고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살짝 당황한 은비칼이 다시 한 번 복수의 칼말을 뱉어내는데..

“며칠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 우리가 밤을 새운 게 하루 이틀 일인 줄 아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듯 오강심과 나채국은 동시에 고개를 끄떡였다.

도무지 복수가 통하지 않아 살짝 삐친 은비칼.

그런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다 “그럼 일 하십시오” 라며 차갑게 한 마디 내뱉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후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나채국이 그를 불러 세웠다.

“실장님! 잠시만요.”

나채국이 말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춘 은비칼은 순간 자신의 그런 모습에 자괴감에 빠졌다.

-지금 내가 돌아보면 바보다. 더 한 번만 불러주면 그때 돌아보겠다. 지금 돌리기엔 내가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아 눈물마저 날 것 같다.-

이런 마음으로 은비칼은 다시 나채국이 불러주길 기다렸지만 들리지 않아 그냥 몸을 돌려 버렸다.

나채국이 불러 섰는데 계속 우두커니 서 있기가 민망했던 은비칼의 자존심은 저 아래 땅 속 너머 지옥에 떨어진 기분.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 온 나채국의 표정이 이상하다.

마치 무언가 자랑할 때나 짓는 표정에 은비칼은 신경이 곤두서버렸다.

“왜 부르셨죠?”

“어, 그게.. 실장님. 깜박하고 못했던 말이 있어요.”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지금 은비칼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한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가 삐쳐 골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채국은 당황했다.

그는 갑자기 은비칼이 왜 저러는 지 알 수 없을 뿐이다.

나채국이 자신이 모르는 뭐가 있을까 오강심을 돌아봤다.

'실장님. 왜 저래?'라고 눈빛으로 물어보자 오강심은 '몰라요. 왜 저러는지' 라고 말하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삐치긴 삐쳤는데 왜 삐쳤는지 모르겠다. 실장이 삐치거나 말거나 내 일 아니다. 나는 내 일만 하면 되는 것이며 내가 할 말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나채국이 운을 떼기 위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실장님. 실장님이 오성 알앤디 센터에 가셨을 때 제 추적 시스템에 김탄의 신호가 잡혔어요. 그걸 보니 다행이 제가 설계한 시스템이 오류가 아니더라고요.”

말을 마친 나채국은 은비칼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생뚱맞게 갑자기 오강심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바람에 그녀가 앉은 의자에 딸려 앞으로 끌려 나온 오강심.

그녀는 대체 왜 이 인간이 이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나채국을 확 째려보자 나채국은 그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를 자신의 앞으로 밀어 놓은 후,

그러니까 은비칼이 제일 먼저 그녀가 보이게 만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증인도 있어요. 그렇지. 강심아?”

결국 제가 만든 시스템이 오류가 아님을 자랑질 하기 위해 멀쩡히 일하던 오강심까지 도구로 쓴 나채국 때문에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오강심은 골치 아픈 상사 때문에 머리에 스팀이 올라와 화를 삭이며 눈을 감고 있었고, 은비칼은 드디어 이걸 핑계로 나채국에게 소리라도 한 번 질러볼 기회가 온 것 같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니, 뭐라고요? 아니 왜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 얘기하는 겁니까?”

불 같이 화를 낸 은비칼.

나채국은 칭찬이 올 줄 알았는데 갑자기 돌아온 화에 당황해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그 대신 갑자기 오강심이 은비칼이 물어본 것에 대한 답을 했다.

“그건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실장님께서 알앤디 센터로 파견 근무를 가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고, 또 그 이후 바퀴벌레가 목욕한 커피를 마셔서 실장님 구역질을 하는 바람에 또 타이밍을 놓친 겁니다.”

의도와 다른 결과에 은비칼은 그저 이렇게 말해 본다.

“아. 그랬군요. 화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제가 오성 알앤디에 있었을 때 연락을 해도 되는 거였습니다. 왜 그랬죠? 나채국 씨?”

“까먹었어요. 죄송해요. 실장님.”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은비칼은 자신의 의도대로 강력하게 나채국을 깔 순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깔 수 있어 통쾌했다.

지금 눈앞에 젖은 미역처럼 축 몸이 늘어진 체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변한 나채국을 보니 복수는 확실히 통한 것 같다.

은비칼이 살짝 그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찰나 갑자기 오강심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 신호는 아주 짧게 잡혔다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팀장님은 까먹었지만 저는 혹시 시스템 오류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연락을 드리지 않은 겁니다. 저는 팀장님과 다릅니다.”

이건 혼자 살겠다는 소리다.

의리 없는 오강심에 화가 난 나채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야! 오강심. 진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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