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찾아온 희생이 마음을 바꾸다.

은비칼은 이 둘의 의견에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과 뜻이 다르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목을 가다듬고 마치 속된 말로 꼰대처럼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학자들 성격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희생자가 맞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연구를 하니까요. 부와 명예를 얻는다면야 좋겠지만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연구가 많은 것으로 압니다.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인정해 줘야만 하는 게 맞아요. 설령 정말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무턱대고 혐오해선 안됩니다. 그리고 대중매체에서 그런 식으로 다룬다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고정 관념화가 되는 데 일조하는 거니까요.”

과학자를 옹호하는 은비칼.

과학자를 혐오하는 나채국과 오강심.

이 둘의 이견은 갈등을 유발한 듯 공간에 침묵을 불러왔다.

무언가 각자 따로 국밥처럼 생각하는 듯 서로가 다른 곳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양보가 없는 서로의 생각들.

누가 맞는 지 누가 틀린 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단지 중요한 게 있다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다고 그 사람 전체를 깎아 내리거나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는 같은 나무지만 다르다.

소나무가 참나무가 될 수 없듯 또 참나무가 소나무가 될 수 없지만 같은 나무로 이들이 서로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숲처럼, 사람도 서로 다르지만 서로 어울리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아무튼 마음이 더 넓고 그릇이 큰 자였는지, 은비칼은 그들과 생각이 달랐지만 존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또 그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오강심과 나채국을 사랑한다.

이해심 많은 은비칼이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짓자 갑자기 나채국이 우물쭈물 머뭇거렸다.

마치 말할게 있는데 할까 말까 갈등하는 듯 조바심이 난 몸짓 같았다.

그 무언의 제스처를 읽은 은비칼이 나채국을 쳐다보며 말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눈을 크게 치켜 떴다.

그러자마자 나채국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우. 실장님. 저는 파견근무를 간다고 말했는데 갑자기 가기 싫어지는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요? 강심이의 말을 듣고 보니까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요.게다가 분야도 다른 거라..”

이건 난관봉착이다.

나채국은 이미 알앤디 센터로 파견근무를 간다고 약속했었다.

그래서 오강심 설득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나채국까지 이러다니..

은비칼은 이 모든 게 오강심이 과학자를 싫어해서 그렇게 된 거라는 생각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강심은 나채국을 보며 두 집게손가락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물론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나채국 결정에 대단히 즐거운 마음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이 둘의 행태에 은비칼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식이면 형이 부탁한 일은 들어 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실 이 일은 은비칼이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형 은비사에게 부탁 받았던 일이었다.

극비 프로젝트라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하며 또 주파수 해독에 관한 일이라 때마침 오강심과 나채국이 적임자인 것 같아 연락한 은비사의 부탁.

그때 은비칼은 흔쾌히 수락을 했었다.

지구를 지키고 인류를 지키는 일이니 은비칼은 당연했지만 정작 일을 시킬 오강심과 나채국의 거절에 은비칼은 머리가 아파왔다.

이들의 단호함에 그저 연신 답답하다는 듯 한숨만 내쉴 뿐..

물론 은비칼은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환경으로 파견근무를 떠나야 하는 오강심과 나채국이 느낄 낯선 두려움.

또 그들이 새로운 조직 구성원들과 맞부딪힐 갈등에 대한 염려에 대해 은비칼이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은비칼이 어떻게 해서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나채국과 오강심을 알앤디 센터로 보내려고 했지만 실패다.

그렇다고 이 프로젝트를 포기할 수도 없고..

겨우 과학자들이 싫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 따위로 무산시킬 수 없었던 은비칼의 머릿속에서 어떤 불합리한 것에 대한 타협으로 복잡해지고 있었다.

-아,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버려야 하는가? 신이 내게 너무 시련을 주시는 군.. 하지만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나는 자존심, 우월감, 권위, 수치심.. 이 모든 걸 버려야 한다.-

이렇게 다짐한 은비칼이 갑자기 나채국의 팔을 붙잡고 몸을 부르르 떨며 코맹맹이 소리로 아양을 떨었다.

“아앙. 나채국 씨잉. 저를 봐서 알엔디 센토로 가시면 안 될까옹?”

말을 마친 그 순간 은비칼은 다짐을 해 놓고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후회부터 했다.

한편 나채국과 오강심은 처음보는 은비칼의 이상한 모습에 얼굴색부터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렇게 한동안 썩은 표정으로 말없이 은비칼을 쳐다보던 그들이 갑자기 아무 말없이 몸을 돌리더니 다시 일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은비칼은 당황했지만 놀라기부터 했다.

일을 하라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을 해서 그런 것.

게다가 상당히 열심히 하기까지 하는 그들의 모습에 은비칼은 반가웠지만 이상하게 뒤가 켕겼다.

그들의 숨은 메타포(본뜻을 숨기고 비유하는 표현만으로 대상을 설명하는 은유 방법) 같은 행동의 이면에는 명백히 은비칼을 무시로 일관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쓸데 없었고 효과 없었던 은비칼의 아양.

이걸 떠나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다.

은비칼은 더 이상 이들을 알앤디 센터로 보낼 수 없다는 절망에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또 포기할 수 없었던 은비칼.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애절하게 말해 본다.

“단기 프로젝트니까 조금만 참고 주파수 해독을 하시면 충분한 보상을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정말 약속해요. 나채국, 오강심 씨.”

속물 인간들에게 은비칼이 솔깃할 만한 제안을 해도 그들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냉정한 건가? 아님 해탈을? 그건 절대 아니다. 이들이 물질이나 보상에 초연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은비칼은 생각 끝에 한가지 귀결로 종결되었다.

-아항! 저번 보상에 대한 실망이 컸나 보다. 아마도 약속을 전부 지키지 못해서 그렀겠지. 아, 이런 걸려들지 않아 속상하다. 어떻게 이들을 꼬셔 인류를 구한단 말인가?-

애간장이 타는 은비칼은 목도 타 들어갔다.

목이 마른 은비칼이 목을 적실만한 것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봤다.

나채국이 마시다 만 커피가 눈에 들어 그걸 집어 들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꿀꺽 꿀꺽 액체가 목 젓을 타고 들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자 오강심이 은비칼을 쳐다보았다.

마치 도둑을 현장에서 목격한 듯한 표정을 짓던 오강심이 손가락으로 이 사실을 모르는 나채국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갑자기 옆구리로 들어온 오강심의 손가락에 화들짝 놀란 나채국이 소리쳤다.

“어우. 야. 왜 그래! 오강심!”

성질을 부리며 쳐다본 나채국에게 오강심이 은비칼을 보라는 듯 턱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은비칼을 돌아 본 나채국. 그가 마시다 버려뒀던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은비칼이 보였다.

그 순간 나채국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이런 상황을 은비칼은 곁눈으로 다 보고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내 목이 타는 게 우선이다.'라는 듯 커피를 끝까지 다 마시고 나서 '크하 시원하다'라며 한 마디내뱉고는 컵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나채국이 그에게 물었다.

“지금 제 커피 마신 거예요? 실장님?”

“네. 너무 목이 타서 마셨어요. 미안해요. 나채국 씨. 이따가 벤티 사이즈로 사드릴게요. 급해서 마신 거 미안합니다.”

“아, 이런..”

나채국이 얼굴을 확 찌그러뜨리자 은비칼은 당황했다.

“아니. 다시 사드린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말을 못 하고 있는 나채국.

그는 상당히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럼 두 잔 사드리겠습니다.”

은비칼의 말에도 나채국은 그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은비칼이 오강심을 바라보자 '그녀는 왜 이제야 돌아보십니까? 빨리 돌아보셨으면 더 빨리 말을 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은비칼이 아닌 나채국을 보고 말했다.

“실장님이 마신 커피는 어제 먹다 남은 커피이고! 아침에 왔을 때 커피 안에 바퀴벌레가 들어 있는 걸 보고! 무서워서 버리지 못하겠다고 저보고 대신 버려달라고 했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며 거절해서 지금까지 버리지 못한 커피를! 실장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마셨다는 걸 왜 말하지 못하시죠? 팀장님!”

오강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비칼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믿을 수가 없다. 지금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둘이 짜고 뻥을 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은비칼은 나채국의 텀블러를 오들오들 떠는 손으로 들어 올려 컵 안을 쳐다보았다.

분명 마실 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 바퀴벌레가 보이는 것이냐?

은비칼은 그대로 컵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안쓰러웠던 나채국.

얕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의자에서 일어나 은비칼의 등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비위가 약하시네요. 바퀴벌레가 목욕한 커피를 마신 거지 바퀴벌레를 먹은 것도 아닌데..”

기폭제가 되어 버린 나채국의 말 때문인지, 가볍게 하던 은비칼의 헛구역질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그 후로 그렇게 한동안 이 아이디시 룸에는 은비칼의 구역질 소리와 나채국이 그의 등을 손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이 지나고 결국 구역질을 멈춘 은비칼.

그가 구역질을 처음 시작한 후 10분쯤 뒤였다.

그러는 동안 나채국이 두드려 댔던 등이 얼얼했던지 은비칼이 손을 등 뒤로 꺾어 문질러댔다.

오강심은 정신차린 비칼에게 시원한 물을 가져왔고 은비칼은 그 물을 마신 다음 맥 빠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어휴. 죽다 살아났습니다. 구역질을 멈추려고 해도 멈춰지지가 않았어요. 우욱.”

자신이 말한 구역질이란 소리에 다신 한 번 비위가 상한 은비칼이 짧은 구역질을 하고 나자 나채국이 다시 다가와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뱉었다.

“고생하셨네요. 실장님. 그런데 전 파견근무를 가겠어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저도 가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오강심도 파견근무를 가겠다고 말했다.

그들의 변화에 얼떨떨했던 은비칼이 다시 확인했다.

“정말입니까? 정말 가겠다고요?”

나채국과 오강심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다는 의미.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완고하셨던 여러분들이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건가요?”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