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친해지는 거야?
아수하의 말은 박토와 아이신의 가슴에 울림을 만들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드리워진 짐.
무단과 아바라 그리고 파눔의 예언을 지키는 자들.
그 역할로 주어질 수밖에 없었던 삶의 굴곡과 질곡들.
또 그로 인해 얻게 된 마음의 상처와 아픔들.
이 모든 것들이 이번에 나타난 마지막 배달석과 바탈로 인해 종지부를 찍게 될 수 있게 되어 버렸다.
박토는 이 사실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더 이상 책임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아가지 않아도 되고 또 무단 그리고 예언을 지키는 자로서의 정형화된 삶이 아닌 나 자신 그 자체로 살 수 있는 길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겐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희망이자 소망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소망을 가진 자들이 오운족 아이신과 아수하라는 사실에 그는 묘하게 그들에게 끈끈한 동질감도 느껴졌다.
-그래서 이렇게 기뻐했던 거구나. 그래서 그렇게 우리 집 노비로 쓴다는 말에 흔쾌히 허락을 한 거였어.-
이 생각에 박토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아주 찰나동안만..
-그래도 오운족은 믿을 놈들이 못 된다. 이 놈들은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기어오를 놈들이다. 항시 긴장해야 한다.-
잠시 오운족에게 마음이 갔던 박토는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그가 그의 얼굴에서 기쁨의 기색을 지우자, 갑자기 아이신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아주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거야. 박토. 이게 바로 네가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거야. 우리의 빌어먹을 사명의 모든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 배달석. 그게 오운족과 바룬족의 악연도 끝낼 수 있는 기회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걸 마무리 지어야 하는 거니까 말이야. 부모 세대 또 그 이전의 부모 또 그 이전의 부모들이 만들어낸 악연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거라고.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건지도 몰라.”
아이신의 말에 박토의 눈이 깊어졌다.
그 또한 아이신 같은 생각을 안 했던 게 아니었다.
바룬족과 오운족은 지금 박토 세대 이전에는 예언을 지키는 자로서 본질을 흐리고 집착을 넘어선 광기까지 보였었다.
협력 관계이자 경쟁 관계였기에 그 두 가문의 묘한 대립과 긴장은 많은 사건들을 만들어냈었다.
그 중 가장 최악이었던 건 20년 전 바룬족의 몰살이었다.
어쩌면 그 사건도 그들의 부모 세대의 욕심으로 인한 비극인지도 모른다.
그 비극이 박토와 아이신과 아수하의 우정을 깨버렸고, 박토에게선 유일한 친구를 앗아갔다.
물론 박토만 그런 건 아니었다.
아이신과 아수하도 마찬가지.
그들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그들의 친구인 박토를 빼앗겼다.
“빌어먹을 가문. 그게 뭐라고..”
박토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아수하가 빙긋이 웃으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래. 빌어먹을 박달 박 씨, 병풀 아 씨. 우리 다시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말을 마친 아수하가 박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친구가 되자는 제안의 제스처였다.
그런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박토가 심경의 변화가 왔는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사실에 환희에 찬 아수하가 아이신을 돌아보자 그 또한 기쁨에 젖어 있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시 박토와 친구가 될 생각에 들 뜨기 시작한 오운족에게 박토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무조건. 그리고 아직 친구는 될 수 없어. 난 말을 신뢰하지 않아. 거짓말은 말로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협력은 할 수 있어. 그리고 명심 해.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
박토가 손을 잡은 건 친구가 되자는 뜻이 아니라 협력의 의미였다.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 손을 잡을 필요까지 있었을까?
게다가 아직도 놓지 않고 있다.
아수하는 이 현상을 보고 그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박토는 마음이 변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희망을 읽은 아수하는 박토가 잡을 손을 위로 들어올리며 재잘거렸다.
“물론. 아쉬운 사람이 져 주는 수밖에..”
-말의 뉘앙스가 이상하다. 바룬족 임시 노비 주제에 져 준다니..-
박토가 기분이 나쁘다는 듯 아수하를 째려보자 그녀가 에둘러댔다.
“아이고. 진짜. 농담이야. 농담. 너무 진지해서 탈이다. 어렸을 때도 그러더니 여전하네.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믿어.”
아이신도 그녀의 말에 덧붙였다.
“그래, 네가 우리를 믿을 수 있게 증명할 거야.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니까.”
박토가 오운족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난 그래도 안 믿을 거니까. 그럼 다들 들어가서 자. 너무 늦었으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냉혈한 같으니라구.. 이 정도면 가식으로라도 알았다고 말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사회성 전혀 없는 박토의 냉정한 말투에 아이신과 아수하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 오운족의 표정이 뭐가 웃긴 건지 아무튼 미친 듯이 웃어대는 박토.
그 때문에 바룬족 임시 노비로의 수치보다 더한 그의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에 아이신과 아수하는 자존감마저 강탈하는 기분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그런 그들에게 박토가 웃음을 멈추고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거절할 때는 말이야. 너희들 실망한 마음이 바로 얼굴에 드러나는 거 알아? 어렸을 때도 그러더니 커도 그러네? 아이신, 아수하.”
마치 진담 같은 농담에 아이신과 아수하는 곧바로 마음이 아이처럼 마음이 풀렸다.
아무튼 이 말을 기점으로 박토의 마음이 약간은 풀린 것 같다.
또 박토가 그들을 받아 들인 틈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에 아이신과 아수하는 지금 너무 기뻤다.
그 기쁜 마음으로 그들은 박토를 바라보았다.
박토는 지금 이순간이 상당히 어색했다.
마치 주인에게 충성하는 반려견 같은 눈빛?
마치 계속 그런 시선을 보내면 간식을 줄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진 듯한 아이신과 아수하의 눈빛에,
상당히 부담스럽기까지 했던 박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산기슭 위로 검은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박토가 그 별을 보며 아이신과 아수하에게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얼른 자자. 밤이 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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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길거리.
비둘기떼들이 날아가지 않고 길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혹시나 바닥에 뭔가 먹을 게 떨어진 건 없는지 살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개를 까닥거리며 마치 제 세상인 냥 돌아다니는 비둘기떼 사이로 사람이 다가왔다.
왜 성가시게 가로지르려 하느냐? 그냥 돌아가거라.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비둘기들은 살짝 날갯짓을 하곤 옆으로 비켜섰다.
사람이 지나가고 나자 다시 한 데 뭉친 비둘기 떼.
순간 저 멀리 한 사람이 지나가던 커피를 흔들자 다 마신 컵의 얼음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비둘기떼들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비둘기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손에 들린 다 마신 일회용 컵을 어디다 버릴 지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 온 다섯 개의 별 조각상.
쓰레기를 버릴 적소가 보이자 그 사람은 서둘러 그곳으로 재빠르게 다가갔다.
비둘기도 천천히 그를 쫓았다.
한 편 다섯 개의 조각상 위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노래하던 참새들은 깜짝 놀랐다.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험하다.
도망가자.
일제히 하늘로 푸드덕 날아오르는 참새들.
그렇게 참새들의 자리를 임시로 강탈해 버린 남자는 다섯 개의 별 조각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에 컵을 살며시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양심에 찔렸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 감시하는 사람은 없는지 혹은 본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는 듯 보였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그 사람은 유유히 그곳에서 사라졌다.
남의 보금자리에 쓰레기를 놓고 가다니..
잠시 자리를 빼앗긴 참새들은 화가 난 듯 다시 자리로 돌아와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한편 일회용 컵을 쫓아 온 비둘기떼들은 좌대 위에 올려진 컵을 보고는 그들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 어쩔 수 없다는 듯 관심을 껐다.
그들은 그저 예전처럼 다시 고개를 까딱거리며 길바닥에 뭔가 먹을 게 떨어진 건 없는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것 봐라! 이런, 이런..”
어디선가 노인 한 명이 다섯 개의 별 쪽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와 집게를 든 그를 본 참새들은 마치 사냥꾼을 본 듯 다시 화들짝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노인은 다섯 개의 별을 받치고 있는 좌대에 놓인 빈 일회용 컵을 집어 들었다.
흔들어 보니 다 마시고 얼음만 남은 컵이었다.
얼음 소리가 들리자 다시 비둘기떼가 다섯 개의 별 조각상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인은 컵의 뚜껑을 열고 컵 속의 얼음을 길에다 확 뿌린 후 들고 있던 검은 봉지에 넣었다.
한편 하늘에서 커다란 덩어리가 마구 떨어지자 흥분한 비둘기떼들이 길가에 떨어진 얼음으로 달려들었다.
이렇게 큰 먹이는 처음 본다.
대박.
마치 이런 생각을 하는 듯 무섭게 다가 온 비둘기 떼들이 서로 얼음을 마구 쪼았다.
순간 먹을 게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한 듯 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비둘기들을 보고 있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닭둘기 놈들.. 나 같으면 날개 달았으니 날아다니며 먹이를 구하겠고만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듯 저게 뭐람? 쯧쯧.”
도심의 비둘기들의 먹이활동에 불만이 컸던 노인은 나라사랑이 대단해 혼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봉사 활동 중 잠시 동안 가진 휴식 시간.
하늘이 무심한 건지..
6월의 아침 햇살은 삼복 더위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로 인해 그의 이마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땀이 성가신 노인이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 온 길 건너 높이 솟아 있는 알앤디 센터.
위풍당당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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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입 A. Biological signal. 대상 오브젝트에 주파수 빔 발사.>
바탈 스톤에 주파수 빔을 발사하자 겉면에 나 있는 무늬 일부분의 색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그러자 실험실에 가득 음성이 울려 퍼졌다.
<타입 A. Biological signal. Test. Exact. True!>
역시 저번 바탈 스톤을 열기 위한 실험은 성공이었다.
지금 그 연장선을 계속 하고 있던 은비사는 그 사실에 고무가 되었다.
타입 A는 확실한 성공이다.
이제 타입 B만 성공하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