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하지 못한 이야기

박토의 물음에 아수하와 아이신은 조금 전 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들은

그 무엇이든 시키십쇼.

산에 가서 산삼을 캐오라면 캐 오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럴 정도로 박토의 셔틀이 될 준비 완료 상태.

그런 그들을 본 박토는

-내가 그렇게 쉬운 것을 시킬 거라 생각했나? 집안의 철천지원수에게 시키기엔 너무 편한 일이다. 나는 너희들이 행복한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

이런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바탈과 배달석은 나 혼자 가지고 올 거야. 토 달지말고 아무 말도 하지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아이신, 아수하. 분명 너희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했다.”

박토의 말에 아수하와 아이신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수긍하겠다는 뜻.

하지만 속도는 느렸고 표정은 침울했으며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도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박토와 같이 배달석을 찾으러 가기 위해 박토가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는 조건에 허락을 한 오운족은,

배달석을 찾으러 가기는커녕 이 바룬족 집안의 노비로 부려질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박토의 입가에는 오운족이 행복한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한다는 걸 실현한 듯 만족의 미소가 살짝 어리기 시작했다.

***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일과는 상관 없다는 듯 김탄은 여전히 영혼을 잃어버린 상태다.

그의 마음에 깃든 어둠처럼 그가 있는 방은 여전히 어둠 속.

스스로를 놓아버린 반사(半死).

그런 삶과 죽음의 묘한 경계 같은 그의 표정은 생명 없는 마른 꽃잎처럼 바스러질 듯 창백했다.

그가 그나마 살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건 그의 눈에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뿐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반짝여 그의 숨을 연장시키려 애 쓰는 듯 보였다.

순간 다시 살아난 듯 그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김탄은 자꾸만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답답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울지 않으려 애써 봤지만 결국 끅끅 거리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흐느끼는 소리가 방을 가득 메우자 갑자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고 있어?”

-이 목소리는?-

깜짝 놀란 김탄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로 눈 앞에 반장이 서 있었다.

환각일까 그가 손으로 두 눈을 비벼봤다.

하지만 진짜 반장이 맞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꿈 같은 일.

“어?”

김탄은 그냥 깜짝 놀라 그저 외마디만 내뱉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왜 그러고 있는 거냐? 탄아.”

부드럽고 인자한 반장의 말투에 김탄은 그저 눈물만 솟구쳤다.

그간 서러웠던 마음이 한꺼번에 물밀 듯 밀려왔다.

보고 싶은 반장이 눈앞에 살아 돌아왔는데 왜 기쁘지 않고 서러운 마음부터 드는지 그도 잘 몰랐다.

“반.. 장님.. 흑흑.”

김탄이 서럽게 흐느끼자 반장이 그대로 탄 앞에 쭈그려 앉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던 게야? 왜 울고 있어. 사내자식이 이렇게 울면 못 써.”

탄은 반장의 말에 울음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다시는 울지 않겠다는 듯 손등으로 눈물을 서둘러 훔쳤다.

그 때문인지 마음이 조금 진정된 탄이 반장에게 물었다.

“다시 살아난 거예요? 정말 살아나신 거예요?”

탄의 말에 반장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보고 살아났다니?”

“돌아가셨잖아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죽었다는 거야?”

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반장은 그저 재밌다는 듯 웃었다.

“허허허. 요 녀석 봐라. 농담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순간 김탄은 지금 여기가 현실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꿈 속이나 아님 진짜 정신이 돌아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풀이 죽은 체 중얼거렸다.

“꿈이야. 꿈 속이라고… 그럴 리가 없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리가 없어. 흑흑..”

탄은 사람이 너무 간절히 원하면 이렇게 환상을 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정말 정신이 돌아버린 것도 같다.

그 생각에 또다시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런 그가 다시 흐느끼자 갑자기 반장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길 같았다.

다시금 깜짝 놀란 김탄이 반장을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탄아. 그런데 왜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어. 항상 밝고 씩씩한 녀석이 이러고 있으니까 내 맘이 아프구나.”

이렇게 반장이 얘기해도 지금 이건 사실이 아닌 환상이다.

너무 큰 죄책감에 환상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마음의 병이 만들어낸 착각.

그래도 김탄은 이렇게라도 그를 보는 게 좋았다.

그가 적어도 반장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 때문이다.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전..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봐요. 그럼.. 반장님이.. 돌아가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반장은 김탄의 말에 그저 말없이 두 손으로 그의 두 어깨를 꽉 움켜 잡았다.

순간 김탄의 뇌리에 그가 반장을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올랐다.

주눅들어 있던 그에게 반장은 지금처럼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으며 힘내라고 말했었다.

그때의 일이 다시 떠오르자 김탄은 다시 울음이 북받쳤다.

그가 언제나 힘들 때 이렇게 위로해 주던 반장.

그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반장은 환상이다.

영원히 사라져버린 그의 위로자.

이렇게 환상으로 밖에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에 김탄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현실이길..

그 바람이 김탄의 마음을 헤집어 놨다.

“사실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이렇게 제 옆에 있어 주세요. 제가 미쳤다고 해도 상관 없어요. 그대로 있어 주세요. 모두 제가 잘못했어요. 반장님.”

김탄의 말에 반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그가 다시 김탄의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탄아. 나는 말이다. 내 아들이 죽었을 때 내 탓 같았어. 뭐, 따지고 보면 다 내가 잘못해서 죽게 된 거니까. 그때 얼마나 힘들었지 몰라. 그냥 죽고만 싶었단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책으로 시작해 저녁이 되면 원망으로 눈을 감았어. 그다음 날은 절대 눈을 뜨지 않길 바랐지. 나는 그때 그대로 죽어버리는 게 소원이었단다. 하지만 이미 죽은 내 아들은 내가 죽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 같아.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거든.”

말을 마친 반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눈물을 참기 힘들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그의 얼굴에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반장은 김탄 어깨에서 두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 내쉬곤 계속 말을 이었다.

“하루는 그냥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소주 3병을 단숨에 들이켜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지. 그런데 아파트 옥상 난간에 죽어버린 내 아들이 서 있는 거야. 그런데 웃긴 건 말이다. 그렇게 보고 싶은 아들이 나타났는데 선뜻 그놈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거야.”

“왜요?”

“굉장히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거든.”

“왜.. 요?”

“모르지. 나도.. 그리곤 아들이 그대로 사라졌단다. 그때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 자책으로만 하루하루 버티며 나를 버리려고 애를 쓰는 내 모습을 보고 그 녀석이 슬퍼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 생각이 들더라고.. 그 후로 계속 곱씹어보니 아들 녀석이 슬퍼했던 게 맞더구나.”

“왜요? 원망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

“왜죠?”

“내가 녀석을 사랑했다는 걸 녀석도 알고 있으니까. 한 때의 잘못된 판단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지만 서로 사랑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 거야. 죽은 이도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자책하고 괴로워한다면 저 세상에서도 편히 쉬지 못할 게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 네가 슬퍼하면 안 돼. 네가 슬퍼하면 그들도 슬퍼할 거니까.”

“하지만.. 전 제가 용서가 되질 않아요.”

“에이. 이 녀석. 그렇게 얘기해도 몰라?”

“네?”

“네가 널 용서하는 게 아니라 널 사랑해야 하는 거란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 그래야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거지. 죽은 이들에게 평안을 줘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저 때문에 모두가 죽었는걸요? 반장님도.. 영식이 형도.. 코피 형도..”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한 김탄은 그대로 흐느꼈다.

아이처럼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김탄을 본 반장은 깊은 한 숨을 쉬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그런 모습에 김탄의 마음은 더욱더 아렸다.

-내 잘못으로 죽게 만들었는데 또 이렇게 걱정을 끼치게 하고 있다. 울지 말아야지.-

하지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런 그의 눈물을 반장이 손으로 훔치며 입을 열었다.

“그만 울어.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이렇게 울면 내 마음이 아프잖아.”

“하지만..”

“탄아. 내가 만약 그때 너처럼 자책만 하다 죽었다면 난 너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 난 아들을 만난 이후로 밥도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잤단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네가 내게 왔지. 처음 봤을 때부터 난 네가 맘에 들었단다. 만약 내가 아들을 잃지 않았다면 너를 만난 기쁨을 느낄 수 없었겠지. 널 보자마자 내 아들이 보낸 사람이라 생각했어.널 마음으로 낳으라고 내게 그런 아픔을 준 거라 생각했다. 난 널 만난 게 큰 기쁨 그 자체였다. 내 피붙이도 아닌 사람을 내 피붙이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하늘에 감사도 했지. 아들 같이 생각한다고 했지? 아니, 정말 나는 너를 아들로 생각한다.오죽하면 영식이가 너만 편애한다고 지랄을 해대겠니?”

탄은 목이 메였다.

돌덩이가 막힌 듯 답답했다.

그렇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반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만 자책 해.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사랑하지. 알았지?”

“하지만.. 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전부 내 탓 같아.. 너무 힘들어요.”

“에이. 진짜. 사내녀석이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쓰나. 툭툭 털고 일어서! 그래야 나도 저 세상에서 편히 널 볼 수 있어!”

“반장님..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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