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 왜 이래 자꾸 누나.. 누나 이상해..

다시 볼펜을 주워 든 한서리는 며칠인지 모를 정도로 감지 않은 떡진 머리를 대충 틀어 올리고는 볼펜으로 푹 꽂아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안경을 다시 고쳐 쓰고 노트북을 다시 보며 문서 작업을 시작했다.

역시, 한 시절 공부 하던 가락이 나오는지 집중력이 상당한 그녀.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은 듯 일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좀이 쑤셨는지 몸을 한 번 비틀고는 의자 위로 가부좌를 틀었다.

순간 은비칼의 눈엔 부처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데..

그녀의 발을 보니 양말도 스타킹도 신지 않은 맨발이라 더욱더 흡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언가 열반할 때의 모습과 비슷한 무아의 모습이다.

역시 학창시절 공부의 신이었던 한서리.

그녀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그런 그녀를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는 은비칼.

딱히 그거 말고 할게 없어 그랬다.

그런데 그녀를 지켜보던 은비칼의 얼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손으로 엄지발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손으로는 서류 한 장을 들고 유심히 보고 있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이 그러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은비칼은 자꾸 제 발가락을 만지는 그녀의 손에 신경이 쓰였다.

-저걸 까먹고 설마 과일 같은 걸 깎는 건 아니겠지?-

은비칼은 쓸데 없는 걱정에 머리가 아파왔다.

자꾸만 그녀가 발을 만지는 손이 거슬린다.

“아항. 이거였구나.”

그녀가 어떤 문제점을 해결한 듯 짧은 중얼거림을 내뱉을 때, 그녀는 발에서 손을 뗐다.

드디어 은비칼의 신경을 거슬리는 그녀의 행위가 끝났다.

다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한서리.

정말 무아지경에 빠진 듯 일 삼매경이다.

그래서 은비칼도 완전히 잊은 듯..

그래서 그런 것인지 그녀가 발을 만진 손으로 코를 후벼 파기 시작했다.

아무튼 정말 그녀는 옆에 은비칼이 있다는 걸 잊어버린 게 확실하다.

그러다 한서리가 코딱지를 손으로 보고 또 그걸 튕기고는 다시 코를 파는 모습에 기겁을 한 은비칼이 순간 헛기침을 했다.

“헛, 흠.”

그대로 시간이 얼어붙은 듯 온몸이 얼어 붙은 한서리.

은비칼의 헛기침 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듯 보였다.

그렇게 무언가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은비칼을 돌아보았다.

아주 섬뜩한 표정에 은비칼은 살짝 당황했다.

“너. 형한테 발설하면 죽는다. 은비칼.”

두려움에 떨며 답하는 은비칼.

“아무것도 못 봤어. 누나.”

“무조건 비밀이야. 알았어?”

은비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확답을 받은 한서리는 이제 안심한다는 듯 코에서 손가락을 빼고는 입고 있는 가운에 쓰윽~ 닦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은비칼은 그녀의 그런 행동에 왜 그가 당황한 건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 은비칼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오늘 이 방에서 본 한서리의 모습은 평소 그가 알아왔던 한서리가 아니었다.

한서리는 청순한 얼굴에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참한 여자다.

오늘 이전의 모습은 그랬다.

하나 오늘 그녀는 다른 어떤 존재에 빙의를 당한 것처럼 전혀 엉뚱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신경질적이었고 화도 잘 냈고 주접스럽기까지 했던 형의 미래 아내가 될 형수 한서리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사실 은비칼은 언제나 한서리를 볼 때면 미래의 형수로 항상 만점을 줘 왔다.

그런데 오늘은 빵점이다.

-이건 분명 무슨 원인이 있다. 사람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극도로 스트레스 상태일 때나 아님 어떤 대상에 증오나 편견 혹은 원망을 가졌을 때나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이렇게 만든 원인은 무엇인가? 혹시? 나?-

은비칼은 머릿속으로 그녀에게 어떤 스트레스를 줬는지 생각해 봤다.

-분명 나 때문에 저런 태도를 보인다. 대체 왜 누나가 안 하던 행동까지 하며 내게 신경질을 내는 걸까?-

말할 때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치 너를 무시하고 말 거야 이렇게 느껴지는 건 기우가 아닐 거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서리 누나. 아, 그거구나!-

“미안해. 누나. 검사 날짜를 잊어버려서.”

“그러길래 은비칼. 제 날짜에 검사를 받아야지. 이렇게 아무 때나 찾아오면 나도 좀 곤란하다고. 나도 스케줄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고맙겠다.”

역시 은비칼의 예상이 맞았다.

그가 약속을 어긴 것이 이렇게 한서리를 다정다감녀에서 한랭빙하녀로 만든 이유였다.

하지만 검사 날짜를 오늘로 잡은 건 은비칼이 아니었다.

이게 다 형 때문이다.

“사실은 오늘 형 보러 왔다가 형이 누나한테 검사 받으라고 해서 온 거야. 그러지 않았다면 약속을 잡고 왔을 텐데. 난 누나랑 형이랑 이미 약속을 잡아 논 건 줄 알았지. 누나를 곤란하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

은비칼의 말에 한서리는 하던 작업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놀란 눈으로 은비칼을 쳐다보았다.

“비사 오빠? 오빠가 보냈다고?”

“어, 근데 연락 못 받은 거야?”

은비칼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이는 한서리.

순간 은비칼은 형이 원망스러웠다.

왜 약속도 잡지 않고 미래의 형수를 곤란하게 하는지 같은 남자로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형이 너무했네. 미래의 마누라한테 연락은 했어야지.”

“아니, 괜찮아. 비사 오빠가 보냈다며.. 그거라면 다 용서야. 난 또 네가 멋대로 찾아온 줄 알았지.”

한서리의 말에 은비칼은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형에게 너무 관대한 그녀다.

게다가 형 얘기만 나오면 목소리 톤부터 달라졌다.

지금도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여리여리한 말투로 바뀌어 있었다.

은비칼은 이것에 조금 적응이 힘들었다.

그가 조금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서리를 쳐다보고만 있을 때, 잠시 생각을 하던 한서리가 그에게 물었다.

“야위진 않았지? 우리 오빠? 요즘 밤 낮 없이 일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내게 연락하지 못했나 보네. 불쌍해서 어떡해.”

한서리의 말이 은비칼에게 일단 재수도 없었고 밥맛도 없는데다 닭살도 돋았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의문점이 앞섰다.

“형 못 본 지 꽤 되나 봐?”

“어. 3일 동안 못 만났어. 깨톡도 제대로 보지 않아.”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 거야?”

서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칼이 중얼거렸다.

“아니 얼마나 바쁘길래 누나 메시지 확인할 시간도 없어.

더군다나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잖아.

그런데 보지도 못하고 메시지도 확인도 안 했다는 거야? 이상한데?”

갑자기 한서리가 한숨을 쉬며 아쉬운 듯 푸념을 늘어놨다.

“하아. 비칼. 그건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비사 오빠는 내가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남자가 아니야. 난 B 구역에는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없거든. 오빠가 날 보러 오지 않으면 볼 수 없어.”

“그래도 B 구역 밖에서 만나면 되잖아. 아님 여기로 찾아오던가.”

“그건 내가 싫어.”

“아니, 보고 싶다며 그건 왜 싫은데?”

“나 때문에 오빠가 구설수에 오르는 게 싫고 또 오빠한테 피해가 갈까 봐 싫다고.”

비칼은 지금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매사 은비사 중심이었다.

정말 19세기나 볼 법한 여성상.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고전적 여성상.

콩쥐나 신데렐라 같이 착하고 헌신적이며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고인물 같은 모습.

뭐, 아직도 이런 여자들에게 환장하는 남자들은 많지만, 은비칼에게는 조금 답답했고 또 바보 같았다.

순간 그의 머리에 그의 부하 직원 오강심의 얼굴이 스쳤다.

오강심과는 완전 정 반대다.

자기 주장 강하고 남자에겐 기대지 않는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오강심.

이 둘의 차이가 너무 극명해 보였다.

-이런 걸 개성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잠시 두 여성을 비교질 하느라 멍 때리고 있던 은비칼에게 한서리가 다시 물었다.

“오빠가 많이 야위지는 않았지?”

“글쎄? 조금 야위기는 한 거 같은데..”

대답도 다 끝나기 전에 갑자기 한서리가 은비칼의 멱살을 잡았다.

깜짝 놀란 은비칼이 경황없이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자, 그녀가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뭐? 야위었다고? 얼마나?”

숨 넘어갈 듯 물어보는 그녀의 질문에 은비칼은 잠시 생각을 했다.

-형이 야위었다는 게 이렇게 내 멱살을 잡을 정도로 촉박한 일인 걸까? 이건 좀 오버다. -

그가 일단 그녀를 불렀다.

“누~ 나~?”

“응?”

비칼이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는 뇌전도 측정 모자를 가리키고는

“누나? 나 아직 검사 안 끝났는데.. 이렇게 멱살을 잡고 있으면 검사 받기가 곤란하지 않을까? 누나?”

이렇게 말하자 한서리는 잠시 얼어붙은 듯 침묵을 했다.

그녀는 지금 그의 멱살을 잡고 있는지도 몰랐다가 알아버린 것 같은 모양새.

순간 그녀가 은비칼의 멱살을 풀더니 헤벌쭉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헤헤헤. 미안. 미안. 내가 나도 모르게 네 멱살을 잡았구나. 내가 잠시 미쳤나 봐.”

그렇게 말을 마친 한서리는 얼굴을 붉혔다.

조금 부끄러웠던 듯.

그러던 그녀가 다시 서둘러 말을 잇는데 무언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한 말이었다.

“그런데 형은 왜 보러 왔어? 낮에는 잘 돌아다니지 않는 녀석이. 중요한 일이었나 봐?”

“어. 형한테 볼 일이 있어 왔는데..”

순간 비칼이 말끝을 흐렸다.

형을 만난 일을 떠올리다 괴물을 마주친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은비칼의 낯빛이 변하자 한서리가 물었다.

“너 얼굴빛이 왜 그래? 백지 장처럼 하얘졌어. 조금 있으면 파래지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비칼이 깜짝 놀라 자신의 얼굴을 만지면서 되물었다.

“내 얼굴이 하얘졌어?”

“그래. 무슨 일인데?”

한서리의 물음에 은비칼은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그 말로만 듣던 괴물을 봤거든.”

서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혹시 A-0라는 괴물?”

“응. 맞아.”

“진짜? 어떻게? 오빠가 보여줬어? 너한테? 나도 못 봤는데?”

“어휴. 보여 준 게 아니야.”

“그럼?”

“그 괴물이 탈출을 시도했어. 어휴. 말도 마. 얼마나 흉측하던지. 모두 죽여 버리겠다며 괴성을 지르며 나한테 덤벼 들었는데 형이 구해줬어. 형 아니었으면 난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됐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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