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탈의 특이점. 여자인 것 때문에 종말이 온다

왕회장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은비사의 시선이 그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그림이 그려진 족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림이 아닙니까?”

“그래. 오랜 된 그림이지. 바로 전설에 관한 그림이야. 마지막 괴물 그림이 보이느냐?”

“네.”

“저 괴물은 암컷이란다.”

“아, 그.. 그렇습니까?”

“이런. 녀석. 이렇게 감이 없어서야..”

왕회장의 핀잔에 무언가 알아챈 듯 순간 은비사의 눈이 번뜩였다.

-바탈에 관한 그림이다.-

그 생각에 놀란 눈으로 은비사가 물었다.

“그래서 여자 아이라고 아까 말씀 하신 겁니까? 여자 바탈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맞아. 그래서 예언을 얘기한 거라네.”

“그렇다면 예언이 사실로 되는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왕회장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의 미소를 은비사는 달갑지가 않았다.

또한 그런 왕종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언이 사실이 된다면 멸망은 기정사실.

세상이 사라진다는 데 웃음이 나올 수 있는가?

어이가 없어 은비사는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왕종철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예 눈을 감고 이 사실을 즐기는 듯 보였다.

너무 태연하고 평화로운 모습에 은비사는 그가 그러는 데에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 다른 생각이 있다.

그의 예상이 적중한 듯 왕종철이 눈을 다시 뜨고 나직이 읊조렸다.

“아니. 그렇게 되지는 않지.”

“그럼 왜 제게 예언을 말씀하신 겁니까? 예언이 사실대로 되는 거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까?”

“그래. 맞다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아.”

왕종철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언제나 그는 답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답으로 가는 길에 힌트를 주듯 분절시켜 말을 한다.

구구절절 자세히 설명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은비사는 그의 대화에서 항상 궁금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묻는 게 다반사였다.

또 그렇게 은비사가 눈을 크게 뜨자 왕종철이 입을 열었다.

“궁금하구나. 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여자 바탈이 나타났다는 건 엄청난 바탈 스톤이 떨어졌다는 소리라네. 바로 아수라가 말한 마지막 바탈 스톤이란 뜻이지. 오운족도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바탈 스톤이야.”

“마지막 바탈 스톤..”

은비사가 혼자 낮게 읊조렸다.

그도 모르게 나온 말.

뭔가 믿을 수 없을 때나 나오는 행태.

왕종철은 그런 그가 이해가 된다는 듯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파이온도 그걸 노리고 있었던 거야. 마지막 바탈 스톤을 말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런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힘을 지닌 무기인 것이 분명하다. 비사야.”

“하지만 이번에 떨어진 바탈 스톤이 그 오운족이 말하는 마지막 바탈 스톤이는 근거가 희박합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여자 바탈이 나타났는데!”

갑자기 왕종철이 역정을 내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은비사는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왕종철이 다시 말을 뱉었다.

“이런. 이런.. 쯪쯪. 이 보게. 비사야. 아까 보여 준 그림은 세 명의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 거라네.”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은비사.

그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한 왕종철의 표정은 누그러졌다.

이어 차분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까 말한 예언 구에 등장한 파괴의 신이 바탈 스톤에 해당되는 것이야. 그래서 그 바탈 스톤을 가지고 세 명의 바탈이 하나로 합쳐져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얘기란다.”

“하. 그렇습니까?”

왕종철의 말을 끝까지 들은 은비사의 눈동자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상당히 심각하고 놀란 그의 모습에 왕종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투덜거렸다.

“뭘 그렇게 놀라나? 하나가 차갑게 식어 있는데.. 둘 만으론 그 마지막 바탈 스톤이 무용지물이란 얘기야. 셋이 하나로 합쳐져야 하지만 둘 밖에 없어 합치지 못하게 될 게 아닌가? 그래서 멸망은 오지 않아. 단지 내 세상이 오는 게지. 하하하하하”

말을 마친 왕종철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치 세상이 모두 제 것이 된 것처럼 환의에 찬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따라 같이 웃고 있는 은비사는 입은 웃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하나가 차갑게 식어 있어 바탈 스톤이 무용지물이라는 왕종철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바탈은 현재 둘이 아니라 셋이다.

이 사실은 오직 은비사만 알고 있는 것.

자신의 혈육인 동생이 바탈이라는 사실은 숨기고 싶고 또 숨기고 있던 은비사에게 지금은 고역 같은 순간이었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창고 안에 울려 퍼지는 왕종철의 웃음소리가 마치 악마의 비웃음 같은 착각마저 일어 은비사는 현기증까지 일었다.

-정신 차리자.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초연하자. -

그는 이렇게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

한참을 웃어 대던 왕종철이 웃음을 멈추고 다시 은비사를 향해 말을 뱉었다.

“그러데 말이다. 비사야. 더욱이 기가 막힌 건 말이야. 내가 대통령에게 했던 운석 속에 세상을 멸망시킬 무기가 들어있단 허무맹랑한 소리가 사실이었다는 걸세. 이런 걸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마치 그 바탈 스톤의 주인이 내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까지 드니 말일세.”

“물론입니다. 회장님. 정말 회장님을 위한 우연 같습니다.”

은비사의 말에 더욱더 기분이 좋아진 왕종철.

그 다음 말을 잇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듯 한껏 커졌다.

“비사야. 이제야 내 세상이 올 것 같구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무서운 사람이 되는 게야. 아무도 나를 이길 자가 없게 되는 게지. 흐흐흐흐”

“당연한 거죠. 회장님. 하하하하.”

은비사의 밝은 웃음 본 왕종철은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를 본 이래로 이렇게 밝은 웃음은 처음이다.

그런 그가 맘에 들었던 왕종철이 두 손으로 은비사의 양 깨를 잡았다.

“역시. 혁수의 아들답구나.”

“고맙습니다.”

“그래. 그러니 바탈 스톤을 무조건 열어야 해. 모두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바탈의 힘까지도 우리 것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더욱 강해지는 거야.”

“염려 마십시오. 바탈 스톤은 곧 열리게 될 겁니다.”

“그렇구나. 모든 게 우리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구나. 어쩌면 이 모든 게 운명이라는 생각까지 들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우연이 겹쳐 있으니까. 잘했다. 비사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열쇠가 무엇인가?”

“바탈의 생체 신호였습니다. 정확한 시그널은 아직 연구 중입니다. 그걸 안 다면 이미 죽어 버린 바탈의 생체 신호는 두 바탈의 생체 신호에서 열쇠에 해당되는 것만 찾는다면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즉 김탄만 잡게 된다면 마지막 바탈 스톤은 바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은비사는 왕종철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또한 그가 흥분을 했는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꽉 들어간 것도 불편했다.

왕종철은 지금 아이처럼 들 떠 있었다.

욕심 많은 아이처럼 눈동자에 욕망과 야심이 그득해 보였다.

살기.

아니다.

광기였다.

왕종철의 광기에 사로잡힌 안광은 은비사에게 부담으로 다가와 저절로 그의 시선을 피하게 만들었다.

“두려운 겐가?”

왕종철의 물음에 은비사는 고개를 떨구고는 끄덕거렸다.

“원, 나 하나쯤 똑바로 못 쳐다보면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게야?”

“죄송합니다.”

“이런 게 힘이라는 게야. 상대가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은비사가 고개를 들어 왕종철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에 눌리지 않겠다는 듯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작은 키의 왜소한 노인일 뿐인 왕종철의 힘과 카리스마는 냉혈한 은비사도 이렇게 주눅들게 만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 앞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왕종철.

지금 그 기세에 눌리지 않겠다고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은비사가 대견했다.

왕종철이 한 손으로 은비사의 어깨를 아기 달래듯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잘하고 있었구나. 기특한 녀석.”

칭찬이지만 알 수 없는 묘한 왕종철의 표정 때문에 은비사는 몸이 굳었다.

정말 칭찬인 걸까?

아님 속내를 알기 위해 저러는 걸까?

마치 속을 훤히 들여다보겠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때는 정말 진짜 아이 같다.

어떻게 그렇게 얼굴을 바꿀 수 있는지.

해맑은 왕종철의 표정에 은비사는 순간 긴장이 풀렸다.

그가 두 눈을 감고 한숨을 살짝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아직 부족할 뿐입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허허허허허.”

은비사의 말에 갑자기 왕종철이 껄걸 웃기 시작했다.

또 잘못된 대답을 내놨다는 생각에 은비사는 난처해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는 칭찬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그러는구먼.. 흐흐흐.”

왕종철의 말에 은비사는 순간 얼굴을 붉혔다.

-칭찬이 맞았다. 정말 이래 저래 감정에 휘둘린다.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가지고 노는 사람.-

평상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은비사였지만 이상하게 왕종철 앞에서는 작은 어린아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어려운 사람.

은비사 그가 20년 가까이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인물.

하지만 아직도 그는 왕종철의 진짜 속내를 모른다.

또 그의 의도도 잘 파악하지도 못한다.

난처해 했다 웃었다 불편해 했다 하는 등.

오늘도 어김없이 왕종철은 은비사에게 오만 잡가지 감정을 드러내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 그를 제 새끼를 보듯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왕종철이 그를 잡은 어깨의 손을 뗐다.

“자. 이제 가자. 진기한 구경을 놓칠 수야 없지.”

“뭐를 말씀이십니까?”

은비사의 물음에 왕종철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긴. 여자 바탈이지. 오늘인 거 잊은 게야?”

“아.”

그제야 원래 있었던 약속이 생각난 듯 가벼운 탄식을 내뱉은 은비사가 서둘러 왕종철의 뒤를 따랐다.

둘은 그렇게 왕종철의 색다른 수집품이 가득한 골동품 방을 나왔다.

그리고 진귀한 세계사 컬렉션을 지나며 육중한 철문으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꾸 뒤를 돌아보는 은비사의 기척을 느낀 왕종철이 물었다.

“뭐 놓고 온 게 있는가?”

“아.. 아닙니다.”

“그런데 뭐 하러 자꾸 돌아봐?”

“사실 그 죽은 아이가 자꾸 맴돌아서 돌아보았습니다.”

“왜?”

“아.. 아버지가 생각나서 그랬습니다.”

“훗~”

비사의 대답에 왕종철은 짧은 웃음으로 끝을 맺었다.

결국 철문 밖을 나온 왕종철과 은비사.

왕종철이 입구 쪽 지문 인식 키에 손을 대자 철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이제는 은비사가 두 번 다시 못 들어가게 될 비밀의 방.

아쉬움에 그 방을 눈에 담으려는 듯 은비사의 눈이 이글거렸다.

문이 닫히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

왕종철은 경쾌하고 신이 난 듯 했지만 은비사는 이상하게도 경직되고 무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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