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를 기다리는 추명국(秋明菊)이 핀 직지사에 도착했을 땐, 가을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들른 직지사였다. 언제 들렀는지 주변 환경이 낯설어서 기억조차 흐릿했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꺼내 맨 처음 직지사를 왔던 시간 속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땐 사명 대사의 길과 공원도 없었다. 어린 소녀들이 기차를 타고 온 기억이 떠올라 동무들과 사진을 찍었던 장소를 찾으려고 경내를 몇 바퀴나 돌고 돌아서 겨우 커다란 벚꽃 나무를 발견했다. 몇 번이고 손으로 나무를 쓰다듬었다. 무려 30년도 더 전에 세 명의 친구들과 머물렀던 장소였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訥祗王) 서기 418년, 아도 화상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며, 천 육백 년이 흐르는 동안 많은 고승을 배출한 가람이었다. 다시 찾은 직지사는 여전히 경내가 아름다웠으며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직지사(直指寺)는 소백산맥의 한 자락에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황악산(黃岳山) 기슭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늦은 오후였음에도 대웅전에는 스님의 염불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고, 울긋불긋한 국화가 경내에 한가득 피어 있었다.

황악산은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있어 폭포와 기암괴석으로 그 결정이 빼어나고,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환자들의 발길이 아직도 이어진다고 했다.

어느 틈에 나는 약사전(藥師殿) 앞에 핀 추명국을 발견했다. 소담스럽게 핀 추명국 꽃잎 위로 염불 소리가 구슬처럼 매달려 있는 듯이 보였다. 손바닥을 펼쳐 향을 끌어모아 맡아봤다. 그윽한 부처님의 세계가 손바닥 안에 있었다. 마음의 평화가 들어차는 느낌이 들어 한참을 그곳에 앉아 추명국을 쳐다봤다.

직지사의 약사전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줬다는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319호)이 있던 자리였다. 현재는 마멸이 심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어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서리를 기다리는 추명국이 대신하여 아픈 이들을 위로해주는 듯해 약사여래의 영험함이 느껴졌다.

직지사에는 사명 대사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사명 대사(四溟大師)는 조선 중기 13세 때인 1556년 출가를 결심하고 황악산 직지사로 가서 선문(禪門)에 들어,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되었다. 30세에 이르러서는 직지사의 주지가 되기도 했다. 이후 사명 대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에서 큰 공을 세웠다. 사명대사는 승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적진에 들어가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을 하기도 했다. 왜란 종료 6년이 지난 1604년 4월에는 선조 임금의 국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면담하고 포로로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귀국했다. 이렇게 구국에 앞장을 선 사명 대사의 공로로 직지사는 조선 8대 가람(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곳저곳 도량을 둘러보다가 불전사물(佛殿四物)이 있는 곳에서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의 규모와 쓰임을 알게 됐다.

범종은 동종(銅鐘)이라고도 하는데, 대중을 모으거나 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종이며, 법고(法鼓)는 북을 두드려 불법(佛法)을 전하는 불구(佛具)였으며, 운판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와 동물을 위한 법구였다. 마지막으로 목어(木魚)는 언제나 눈을 뜨고 깨어 있으므로 물짐승들을 위한 법구였다.

직지사 도량을 한 바퀴 돌고 또다시 약사전 추명국 앞에 섰다. ​아네모네와 모란을 닮은 추명국!​ 가을을 밝게 한다는 뜻을 가진 가을꽃 앞에 서서 응진전 앞에 서 있는 커다란 파초를 바라봤다. 이파리가 펼쳐지면 심에서 새잎이 뒤따라 솟아난다고 해서 덕(德)과 지(知)를 상징하는 관엽식물이었다. 푸른 파초는 도량 곳곳에서 하늘을 향해 새로운 진리를 곧게 퍼 올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직지사 주소-경북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95

(지번- 대항면 운수리 216)

*대표번호 054-429-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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