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있었던 죽음.

돈이 주는 즐거움이 고통이라니.

정말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은비사가 그 뜻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왕종철을 쳐다보자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뱉었다.

“허허허. 돈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야.”

“네?”

“돈이라는 게 말이다. 비사야. 사람에게 개가 되라면 개로 만들지. 또 사랑을 하라면 사랑을 하기도 해. 하지만 진실하진 않다. 그 진실함을 보지 못하면 돈의 주인은 이내 타락의 늪으로 빠지는 게야. 어느새 눈을 떠 보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빈 껍데기만 남아 있게 되는 거란다. 결국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사가 어렵다는 듯 말을 내뱉자 왕종철이 다시 껄껄 웃었다.

“하하하. 무엇이 어렵다는 겐가?”

“돈은 그냥 잘 쓰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그럼 왜 노예가 된다는 것이지요?”

“진실한 사람을 가리기가 힘드니까..”

“아첨과 아부, 가식 그리고 허영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그 모든 걸 상쇄시키는 게 사랑이란다. 바로 진실한 사랑이지.”

말을 마친 왕종철은 자신의 말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는 듯 은비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은비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실한 사랑이 어떻게 돈의 노예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잘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쓰기만 하는 은비사에게 왕종철이 다시 말을 이었다.

“돈을 사랑해도 진실하게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사랑해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고통스럽지 않단다. 그 고통이야 말로 노예가 되지 않고 진정한 나로 살 수 있는 법이거든.”

“도통 모르겠습니다.”

은비사가 머리를 긁적이자 왕종철이 그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왕종철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은비사는 그저 쩔쩔 맬 뿐이다.

그런 은비사의 어깨를 왕종철이 손으로 가볍게 툭툭 쳤다.

마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가볍게 흘려버리라는 듯.

“어려우니 그만하자. 따라오게.”

대화를 마친 왕종철은 비밀 공간에 딸린 작은 방으로 은비사를 안내했다.

가는 도중 그의 눈에 들어온 왕종철의 컬렉션들은 또 그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대체 저런 유물들은 언제 모아 놓은 걸까?-

유물 수집 팀이 따로 있다는 듯 왕종철이 모아 놓은 물건들은 세계사를 고스란히 이곳에 옮겨 논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결국 작은 방문 앞에 선 왕종철이 지문 인식 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내부에 불이 들어왔다.

이곳과 다른 공간.

그곳은 극도로 깨끗하고 차가운 공간이었다.

매끈한 벽면은 금속 재질이었고 환기가 중요한 듯 유난히 많은 통풍구가 천장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냉장고였다.

왕종철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은비사도 따라 들어갔다.

서늘한 기운에 은비사가 두 팔로 양 팔을 잡고 비벼댔다.

“젊은 놈이 뭐가 춥다 그러나?”

왕종철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건지 그가 한 말에 은비사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려놓았다.

분명 이렇게 서늘한 온도는 인위적으로 만든 환경이다.

그렇다면 썩으면 안 되는 물건을 보관하는 곳.

하지만 이 공간에는 벽과 기둥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전체가 뻥 뚫린 이 공간 중앙에 다른 일반적인 기둥의 크기와는 다른 기둥이 하나 있었다.

상당히 큰 직사각형의 구조물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형태였고 기둥의 표면은 금속 재질로 마감이 되어 있었다.

은비사는 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방에 대체 왜 그를 데리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왕종철의 뒤를 말없이 따를 뿐.

왕종철은 그 특이한 기둥 앞에 다가간 후 섰다.

그를 따라가던 은비사도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왕종철을 향해 은비사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왕종철은 무척 재미있는 걸 자신만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 은비사도 의미 없는 미소를 따라 지어봤다.

왕종철이 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공간에 음성이 울려 퍼졌다.

<반갑습니다. 왕종철 회장님. 패스워드를 말해 주세요.>

“열려라. 참깨.”

말을 마친 왕종철은 곧바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은비사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은비사의 입은 실룩거리느라 주체할 수 없었다.

“재밌지?”

왕종철의 물음에 은비사가 웃음을 참느라 큭큭 거리며 답을 했다.

“그런 단어를 쓰실 줄 몰랐습니다.”

순간 벽면에서 지이잉 거리는 기계 구동음이 들렸다.

그 소리에 은비사가 기둥을 보자 중간 정도 되는 벽의 앞면이 마치 슬라이딩 도어 문처럼 위 아래로 말려 들어갔다.

그걸 본 은비사는 이 기둥이 그냥 기둥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가 놀란 토끼 눈으로 그것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 갑자기 왕종철이 그를 잡아끌며 옆으로 세웠다.

“이리로 비켜서 서야 해.”

퓨슉.

공기압 빠지는 소리가 나며 잠금장치가 열렸다.

이 정도의 보관함에 무언가를 보관했다면 그건 대단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기둥에 집중한 은비사의 눈은 깜박임조차 없었다.

계속해서 기계음이 들리며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말려 들어갔던 마감이 없는 벽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되는 금속 끝단이 나오자 그 뒤로 투명한 유리관이 이어져 있었다.

유리관 속에 무언가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은비사는 화들짝 놀라 단말마를 내뱉었다.

“저.. 저건..”

무언가 엄청 당황한 듯 말을 못하고 있는 은비사에게 왕종철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말이다. 비사야. 내가 혹여라도 실수를 한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흐흐흐흐흐.”

답을 하지 않고 무엇이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낮은 목소리로 웃고 있는 왕종철.

그런 그를 보고 있는 은비사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웃던 왕종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나고 보면 처음에는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또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좋은 일이 되기도 하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다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은비사는 온통 유리관에 모든 신경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그에게 왕종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비사야. 좋은 일이라고 너무 기뻐하지 말고 또 안 좋은 일이라고 너무 침울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란다.”

-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시체를 눈 앞에 두고..-

은비사의 눈 앞에는 유리관 속 시체 한구가 들어 있었다.

그런 시체를 앞에 두고 왕종철이 은비사에게 한 말은 그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다만 왜 이 시체를 자신에게 보여주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투명한 관 속의 시체는 5세 정도 되는 남자아이였다.

냉동상태였고 언제 얼려졌는지는 모르지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예쁘고 잘생긴 외모였다.

피부는 푸르렀지만 살아있었다면 뽀얀 피부색이었을 것 같았다.

순간 묘하게 누군가와 겹쳤다.

바로 은비사의 동생 은비칼이었다.

그의 어렸을 때와 정말 흡사했다.

그 사실에 은비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감추었다.

왕종철이 유리관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아이의 얼굴 쪽 유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의 체온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그로 인해 아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진귀한 보물을 다루듯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한참을 유리를 쓰다듬던 왕종철이 갑자기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흠.”

한숨 소리에 은비사가 왕종철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너무 기분 좋아하던 그가 이제는 근심으로 가득한 듯 보였다.

왕종철은 회한이 어린 깊은 눈으로 죽어있는 아이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던 그가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은비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비사야. 네 아비가 이 아이를 죽여서 데리고 왔을 대 참으로 허망했었지.”

은비사는 왕종철의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버지가 죽인 아이입니까?”

왕종철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추억에 잠긴 눈으로 기억을 더듬는 듯 허공을 바라보다 기억의 서랍장에서 기억을 꺼낸 듯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말이다. 이제 와 보니 그 당시 네 아비를 꾸짖은 게 외려 미안해지더구나.”

은비사는 왕종철의 말에 그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이 시체와 아버지의 연관에 은비사는 과거 20년 전 모종의 사건이 더 있음을 알아버렸다.

이 아이가 죽음으로 은비칼이 살 수 있었던 것. 모두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은비사는 지금까지 이 사실에 대해 지금 처음 알았다.

그러니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모습을 본 왕종철이 나무랐다.

“힘 빼게나. 항상 냉철한 자네도 가족 얘기엔 심히 흔들리는구먼.”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은비사는 곧바로 무표정한 평소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런 게 아닙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뜻을 알기 힘들어 잠시 집중을 하다 보니 그게 얼굴에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변명이었다.

왕종철은 은비사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 두 눈을 치켜올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은비사는 변명을 들킨 것 같아 곧바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의 귀로 왕종철의 가벼운 코웃음이 들렸다.

“훗.”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주의 하겠습니다. 도무지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감정을 숨길 수 가 없습니다.”

“그게 문제야. 자네는.. 대체 아비에게 왜 그리 집착하나. 이제 놓아 주게.”

은비사는 대답대신 고개를 숙였다.

힘들다는 의미였다.

왕종철은 그런 그를 뒤로 하고 벽면에 부착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어린아이가 들어 있는 시체 보관함이 다시 기둥 안으로 들어갔다.

은비사는 지금 머리가 복잡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회장님. 왜 제게 저 아이를 보여 주신 겁니까?”

은비사의 물음에 왕종철이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히죽히죽 웃었다.

그 모습에 은비사는 야릇한 기분마저 들었고 손에선 식은땀이 났다.

또 그런 심리 상태를 왕종철에 들킬까 조바심도 났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외웠다.

그러자 조금 진정이 됐는지 심장의 두근거림은 잦아들었다.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던 왕종철이 웃음을 멈추고 그제야 은비사의 물음에 답을 했다.

“여자라서 보여준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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