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모아 놓은 비밀의 창고.

연구원 2가 쓰고 있던 안경이 부서지고 그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그가 그의 얼굴을 감싸자 부서진 안경 파편들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 순간 안경 다리를 잽싸게 낚아채는 이미캐.

운이 상당히 좋았고 그나마 자유로운 손가락이 있어 가능했다.

금속 재질에 가느다란 안경 다리였다.

이미캐는 손가락으로 귀에 거는 부분을 재빠르게 부러뜨려 뾰족하게 만든 후 자신의 팔 안쪽으로 안경 다리를 쑤셔 넣었다.

“흡!”

생살을 찢는 아픔이 전해지자 미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참으려고 물고 있던 연구원 2의 손을 더 콱 깨물었다.

그 바람에 연구원 2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 모습에 마치 복수라도 한 듯 미캐는 희열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지금껏 당한 모든 고통을 되돌려 주겠다는 듯 더욱더 그의 손을 콱 깨물었다.

더 크게 비명을 지르는 연구원 2.

그런 그의 모습을 즐기듯 보고 있던 미캐가 흘깃 상황실을 쳐다보았다.

-없다. 다른 연구원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여기로 오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안경다리를 숨긴 걸 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게 잘 되는 것 같다. 드디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

시간이 지나자 미캐의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약물의 효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따라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그래도 물고 있는 손가락은 놓지 않는 그녀.

마치 약물에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자 약물은 그녀의 모든 근육을 이완시켰다.

연구원 손가락을 물고 있는 턱 근육의 힘도 약해져 버렸고 그로 인해 연구원 2는 미캐의 입에서 손가락을 뺄 수 있게 되었다.

-제기랄.-

안경이 사라져 시야가 흐릿하지만 손가락에 뼈가 드러난 게 연구원 2의 눈에 보였다.

그 옆으로 살점이 너덜거리는 게 처참하다.

그때 실험실 문이 열리고 연구원 1이 안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정 선생!”

연구원 1의 목소리가 들리자 연구원 2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다시 뜨기가 힘들다.

약물에 취한 미캐의 눈꺼풀이 그녀의 눈동자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

귀의 신경은 아직 살아있는 듯 미캐의 귀로 연구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습니까? 빨리 응급처치를 하러 갑시다.”

“뼈가 드러났습니다. 제기랄.”

-훗. 그까짓 뼈 드러난 걸로 힘들어 하기는. 너희들도 똑같이 당해봐야 해.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었는지. 이유 없이 나를 고문하고 실험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나는 여기서 나가면 너희들을 반드시 다 죽여버릴 거야. 반드시..-

미캐의 마지막 염원 같은 생각을 끝으로 그녀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체 의식을 잃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처럼 새카만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 그녀.

모든 신경이 마비 됐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흘러나와 힘없이 떨구어진 그녀의 고개 아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먹물로 칠해진 듯 새까만 어둠뿐인 지하 창고에 순간 불이 켜지고 그 공간의 세계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100평이나 되는 창고에는 마치 누가 물건을 모아 놓으려는 듯 맞춤 제작 목재로 된 수납공간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컬렉션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시간을 가둔 듯 오래되고 낡은 골동품과 고서들이 가득한 이 곳.

오성 그룹 왕종철 회장이 취미로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는 그 컬렉션을 통해 마치 시간을 수집하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아주 오래 된 만년 전 유물부터 근대사 유물까지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그의 사적 유물들.

그렇게 지하 공간에 가두어 둔 시간들이 퇴색되지 않게 만드려는 듯 이미 설치되어 있는 제습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우웅 거리며 들렸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 화원에 들어온 듯 왕종철은 지금 흥분해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본 아이의 눈처럼 반짝이던 그의 눈이 순간 생각을 하는 듯 찌푸려졌다.

그대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미동 없던 그가 무언가 생각 난 듯 ‘그렇지’ 라고 나직이 내뱉곤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성급한 걸음인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생기는 기류가 허공에 춤을 추는 먼지들을 만들어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취미였는지 오랜 된 먼지들이 외로웠다며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갇혀 죽어 있던 시간들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듯 그의 움직임은 이 공간에 생기를 불러왔다.

그런데 갑자기 느려진 그의 걸음.

찬찬히 수납장을 살피며 걷고 있어 그렇다.

하지만 그가 찾고 있던 물건이 없는지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튕겼다.

무언가 기억을 떠올릴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

기억력이 남다른 그였지만 이번엔 바로 생각나지 않는 듯 보였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마, 그래 맞아. 거기였지.”

곧바로 왕종철은 지금 그가 서 있는 수납 칸 다음 다음 칸으로 몸을 옮겼다.

70 넘은 노인이었지만 날렵하고 빨랐다.

그 기세로 양 쪽 수납공간 사이를 걸어가는 왕종철은 이전 과는 다른 무언가 기대에 찬 밝은 표정이었다.

왕종철의 걸음은,

이 공간에 수납된 물건들의 위치와 목록들을 전부 다 외우고 있는 듯 불필요한 것들을 제외시키는 거침없는 걸음걸이였다.

목적지에 다다른 듯 왕종철이 우뚝 멈추어 섰다.

그가 멈춘 곳은 보관 창고 맨 끝 한 쪽 구석이었다.

그곳에는 아까 지나쳤던 목재 수납장은 없었다.

대신 붓글씨나 그림이 그려져 있을 것 같은 두루마기 같은 것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수납함이 있었다.

그곳을 확신에 찬 듯 쳐다보고 있던 왕종철은 무언가 찾으려는 듯 곧장 그 앞으로 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살폈다.

찾는 것이 아닌지 펴 본 두루마리를 보고 짜증난 듯 다시 말지도 않고 뒤도 넘기듯 훅 던졌다.

그리고는 다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펴 보며 그마저도 찾는 것이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이런..”

다시 기분이 나쁘다는 듯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뒤로 훅 던진 왕종철.

잠시 얕은 한숨을 내쉰 그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보관함에 꽂힌 두루마리를 꺼내 펴보았다.

그 후로 그런 반복 행위가 끊이지 않았고 속도도 빨랐다.

흡사 무언가 광기에 사로잡힌 집요함과 비슷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의 취미의 중요도에서 약간은 배제가 되어 구석에 방치되었던 두루마리들.

수납장에 있는 목록은 그가 다 외우는 것이었지만 수납함에 꽂힌 두루마리는 그가 외우고 있지 못했다.

갑자기 그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천천히 보관함을 훑어보았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이런 식이면 끝이 없어 보이는구먼.”

보관함의 크기는 폭이 1미터에 길이가 5미터인 박스형에 칸칸이 두루마리가 하나씩 들어가게 제작되었다.

그곳에는 옛 그림이나 글씨가 있는 족자형 두루마리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대충 훑어봐도 족히 3000개나 넘어 보이는 두루마리들.

그것을 왕종철 혼자 다 살펴보기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또한 버겁기도 마찬가지.

짜증이 났는지 왕종철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 골을 내던 왕종철이 갑자기 환하게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신바람이 난 듯 걸음을 옮기더니 한 쪽 구석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여기 있었군. 그래. 내 기억이 틀렸을 리가 없지.”

손에 들린 두루마리엔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손을 대지 않은 듯 두꺼운 먼지 더께였다.

왕종철이 그 먼지를 털어내려 입으로 훅 불었다.

먼지가 일어 사방이 희뿌옇게 변하자 그가 연신 기침을 해댔다.

시간이 지나 먼지가 가라앉자 그의 기침도 멈추었다.

진정을 한 그가 조심스레 두루마리를 펼치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다 벽에 못이 튀어나온 걸 발견한 그가 그곳으로 걸음을 옮긴 후 두루마리를 못에 걸었다.

위아래에 달린 나무 봉 때문에 그림이 구부려지지 않고 곧게 펴진 두루마리는 배접 상태는 오래됐어도 나쁘지 않았다.

감정사라도 되는 듯 왕종철이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는 그림을 살폈다.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는 족자.

그곳엔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맨 위로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그 위로 별자리를 나타낸 듯한 일곱 개의 점이 찍혀 있었다.

점의 크기는 제각기 달랐고 먹의 농도로 달랐다.

별자리 점을 살피던 그가 그 아래 괴물 그림을 훑어 보았다.

사람의 몸에 멧돼지 얼굴.

튀어나온 엄니 때문에 매우 사나워 보였다.

왕종철은 그 맷돼지 사람 아래로 그려진 괴물 그림을 살폈다.

사슴뿔이 달린 사람의 얼굴.

하지만 몸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림을 보던 왕종철은 흥미로운 듯 입맛을 다시다 그 아래 그림을 살폈다.

온몸이 검은색으로 칠해진 사람의 형상과 비슷한 괴물 그림.

머리는 두 개였으며 하나는 붉은 뱀의 머리, 다른 하나는 푸른 뱀의 머리였다.

이 그림은 왕종철이 바탈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다 얻게 된 그림이었다.

처음에 그 그림을 보고 그 의미를 몰라 구석에 방치했던 것이 이제 그 의미를 알게 될 시간이 와 펼쳐 보게 된 것.

그림을 보던 왕종철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찼다.

그 표정으로 마지막 괴물 그림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대로 자세히 살피는 왕종철.

그러던 그의 눈에 검은색으로 칠해져 잘 분간이 되지 않던 가슴에 달린 유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무언가를 알아챈 듯 깜짝 놀란 그가 환희에 찬 듯 중얼거렸다.

“이런. 그 이야기가 맞았군. 오운족 아수라의 이야기가 사실이었어. 그럼 그 예언도 사실이었던 거야.”

상당히 흥분한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안면에 홍조까지 띤 그가 갑자기 맥이 풀린 듯 턱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깊이 쏟아낸 한 숨.

“휴~”

소리와 함께 긴장했던 그의 다리가 맥이 풀렸는지 후들후들 떨렸다.

나이를 속이지 못한 노년의 맥 빠짐은 그를 제자리에 서 있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가 눈을 돌려 앉을 만한 것이 없는지 주변을 살피다 한 의자를 발견했다.

그는 힘 빠진 몸으로 그 의자를 지익 끌고 와 족자 앞에 앉았다.

그대로 다시 족자의 그림을 살피는 왕종철.

그의 시선은 온통 검은 여자 괴물의 유방에 가 있었다.

“우연이 아니구나. 모두 설계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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