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_ 죽을 때까지 미워할 거야. 아니 죽고 나서도..

“20년 전 일은 우리의 뜻과 달랐어.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때 우린 너무 어렸고 힘이 없었으니까.”

“그런 건 다 필요 없어. 그냥 꺼지라고. 너희는 오운의 자손이고 네 할아버지의 핏줄이니까. 그것만으로도 너희들은 잘못한 거야.”

“야. 박토. 우리가 죽도록 밉고 보기 싫겠지만 김탄의 폭주를 막아야 하는 것도 우리의 사명이기도 해.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게 맞아. 그게 파눔의 뜻이기도 하니까.”

“웃기고 있네. 사명이라.. 배신자 아수라의 핏줄 주제에 사명이란 소리가 입에서 나오나?”

아이신은 싸르르 가슴속에 이는 통증에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박토의 과거의 상처가 컸던 것일까?

도무지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흘러나오지가 않았다.

뱉는 말들은 모두 아이신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뿐.

아무리 부처같이 자비로운 사람이라 해도 계속되는 비난과 비아냥을 참을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일개 사람인 아이신은 오죽할까?

가해자인 아이신은 무조건 참아야 하는데도 그의 성정을 이기지 못하고 박토의 멱살을 확 움켜쥐고 말아 버렸다.

그때 모든 걸 지켜보던 아수하가 버럭 소리를 쳤다.

“아이신! 그만해! 제발!”

평상시 아수하의 말에 꼼짝 못하는 아이신.

왜냐하면 아수하가 아이신보다 싸움을 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아수하의 무서움에도 아이신은 박토의 멱살을 쉽게 놓지 못했다.

모두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아수하가 품에서 월을 떼어내고는 절뚝거리며 아이신에게 다가갔다.

아수하가 다가옴에 두려움을 느낀 아이신이었지만 그래도 박토의 멱살은 풀지 못했다.

왠지 지는 것 같은 느낌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다.

결국 그들 앞에 다가 선 아수하.

그럼에도 불고하고 서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둘의 모습에 기가 차다.

이대로 두었다간 진짜로 주먹다짐이 오고 갈 분위기였다.

그럼 화해는 물 건너 간다.

그럼 파눔의 예언을 지키는 일은 완수하지 못한다.

무조건 싸움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한 아수하가 박토의 멱살을 잡은 아이신의 손을 강제로 풀었다.

-어라? 이게 웬걸?-

너무 순순히 잘 풀려 아수하는 오히려 당황했다.

서로 싸우기 싫은 마음은 있었던 모양인 걸 읽은 아수하는 빙그레 미소부터 지었다.

“이제 그만해. 제발. 둘 다.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참.”

이쯤 되면 그만 할 법도 한데 도무지 죽일 듯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두 사람 때문에 아수하는 애가 탔다.

-남자의 자존심이란 이런 것인가? 쓸데없네. 정말.-

이 지긋지긋한 두 인간의 기 싸움을 완전 끝장을 내겠다는 듯 아수하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가로 막았다.

둘이 서로 노려보는 시선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박토는 재빠르게 고개를 옆으로 빼며 계속 아이신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허탈한 아수하.

그녀도 고개를 옮겨 박토가 아이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차단했다.

그러자 다시 고개를 옆으로 옮기는 박토.

그에 질세라 아수하도 따라 옮겼다.

그렇게 왔다 갔다 신경전을 하는 게 지쳤는지 박토가 더 이상 아이신 노려보기를 멈추자 아수하가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 박토. 정말 미안해. 지금 나는 이 말 밖에 못 하겠어. 미안..”

아수하의 사과의 말에 당항한 박토가 그제야 아수하를 쳐다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친 두 사람.

박토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지금 성인이 된 아수하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다.

9살 코흘리개였던 아수하의 아름답고 성숙한 얼굴에 잠시 흔들렸던 박토.

그러나 그는 이내 마음을 다 잡은 위해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저 여자는 오운족 아수하. 우리 집안 철천지원수다. 저 여자는 오운족 아수하. 우리 집안 철천지원수다. 저 여자는 오운족 아수하. 우리 집안 철천지원수다.-

그러고는 입 속의 혀를 지그시 깨물며 다시 눈동자를 돌려 아이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수하의 머리에 가려 아이신의 이마 위쪽만 보였다.

-어쨌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다.-

박토의 눈에는 다시 살기 어린 눈빛으로 되돌아 왔고 그걸 캐치한 아수하가 갑자기 그의 손부터 덥석 잡았다.

마치 이제 제발 그만 하라는 듯한 뉘앙스였다.

다행히 뿌리치지 않는 박토.

여자의 부드럽고 촉촉한 손의 느낌이 싫지 않아 그랬던 것.

그것을 모르는 아수하는 그에게서 긍정의 빛을 보았다.

“미안해. 정말. 토야. 하지만 김탄을 조금만 더 지켜보게 해 줘. 바탈이 깨어나서 다시 폭주하지 않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갈 게. 폭주를 막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니까.”

그녀의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일까?

박토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걸 기세 삼아 아수하가 다른 손으로 박토의 손을 마저 잡았다.

순간 박토는 깜짝 놀란 듯 그녀가 잡은 손을 쳐다보았다.

29살까지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 본 모태솔로 박토는 태어나서 엄마와 누나 외에 처음 느껴보는 어른 여자 손의 감촉에 멜랑꼴리해져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아수하.

그에 따라 박토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수하의 오빠 아이신은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바깥 남정네의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는 여동생의 행태와 철천지원수의 손을 즐기는 듯 용인하고 있는 박토의 행태에 왜 기분이 나빴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자존심이 상했던 아이신.

그러나 그도 묵인하기로 결정했다.

아수하의 희생에 박토의 마음이 풀린다면 좋은 게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잘 해결되면 그만이다.

아무튼 오운족은 무언가 긍정의 기운에 희망이 샘 솟았다.

한데..

갑자기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 박토가 얕은 한숨을 쉬며 아수하의 손을 슬그머니 빼며 입을 열었다.

“당장 꺼져. 배신자들아.”

이렇게 힘 없이 중얼거리고는 더 이상 대화 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 이후로 오운족에게 휘몰아치는 어색함.

그리고 절망.

공중에 머물러 있는 아수하의 두 손은 거절을 당해 마음이 아프다는 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이신 또한 그녀의 감정에 공명하는 듯 그의 손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박토는 곁 눈으로 그들이 그러는 걸 다 보고 있었다.

잠시 미안함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고개들 더 돌려 외면했다.

순간 누가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박토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수하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다가와 서 있는 박월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지금 상황 심각한 거 안 보여?-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박토가 인상을 확 쓰자 월이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바탈의 폭주를 막으려고 여기 있겠다고 하는 거잖아! 나쁜 거 하는 거 아니래잖아! 나한테 나쁜 거 하지 말라고 해놓고 삼촌은 왜 나쁘게 굴어? 그건 말과 행동이 다른 거잖아!”

박토의 뼈를 날카롭게 찌르는 박월의 말.

평상시 그는 박월에게 사람은 모름지기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진짜 사람이라며 앵무새처럼 주장해왔다.

학교 성적이 좋은 것보다,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사람으로서 중요한 건 언행일치다.

그것을 실천하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월에게 누누이 강조해왔던 터.

지금 이 순간 언행불일치를 하고 있는 박토는 난처하다.

또한 박월의 실질 양육자로서의 권위도 무너질 위기.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박토는 혼란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월의 양육을 위해선 오운족이 이 집에 머무르게 하는 게 맞다.

바탈의 폭주를 막고 또한 예언을 지키는 자로서 협력하는 게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집안의 피맺힌 원수.

절대 함께 하고 싶지도, 같이 가고 싶지도 않았던 박토는 이 난감한 상황에 속상했고 아니꼬운 마음도 불같이 일었다.

-어떻게 해서든 당장 이 집에서 저 놈들을 쫓아내고 싶다. 하지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박월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어쩌나. 이걸..-

순간 그의 뇌에 꽂힌 아이디어.

“작은 아버지가 지금 여기 없는 걸 다행으로 알아. 만약 계셨다면 너희들은 뼈도 못 추슬렀어.”

뜬금없는 박토의 작은 아버지 얘기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듯 황당해했다.

동갑내기에 친구였던 사이라 만만했기에 오운족이 버티는 거라 생각한 박토는 바룬족의 수장인 작은아버지를 거론함으로써 오운족이 두 가지를 알아듣길 바랐다.

첫째 너희들은 진짜 원수야. 작은 아버지에게는 통하지 않아라는 걸 확인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곧 돌아오시기에 알아서 사라져주라는 뜻으로 말했던 것.

그러나 박토 말의 의미를 제대로 못 알아 들었는지 오운족인 아수하와 아이신은 기뻐하고 있었다.

예상과 다른 그들의 반응에 박토가 말을 잇지 못하고 당황할 때 갑자기 아수하가 그를 와락 껴안으며 기쁨에 차 울먹였다.

“정말 다행이야. 어쩌면 이게 운명인지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 말이야. 고마워. 박토.”

-우연을 가장한 필연?-

박토는 순간 픽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아수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오운족이 없었다면 김탄의 폭주를 막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필이면 작은 아버지의 여행으로 이들이 여기 머물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이 집에 같이 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지금 단지 월의 교육상 바로 내쫓지 못하는 걸 오운족은 알지 못한다.

박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쫓아내고 싶을 뿐이었다.

박토가 월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오운족을 쫓아낼 수 있게 품에 안긴 아수하를 떼어내고 그녀에게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김탄을 지켜보기만 해. 내 눈에도 되도록 띄지 않았으면 좋겠고.그리고 작은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거니까 너무 오래 붙어 있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박토의 말에 당황부터 하는 오운족 아이신과 아수하.

박토의 집에 계속 빌붙어 있을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언제 돌아오시지?”

실망에 가득 찬 듯 아수하가 물어보자 박토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이상하게 월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는 아수하만 알아들을 수 있게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오시기로 했는데 아직 안 오신 거 보니까 내일 오실 것 같아. 아마 비행 시간에 차질이 생긴 모양이야. 그러니 내일 아침 동이 트자마자 이 집에서 떠나 줘.”

그리고는 다시 월의 눈치를 보는데 이런, 그가 들은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소리를 박월이 들을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박토.

그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먼 산 바라보듯 시치미를 떼며 허공을 바라보자 그의 귀속으로 월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꽂혔다.

“삼촌! 할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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