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仙巖寺)는 좀 남다른 특징이 있지

그게 앞인지 뒤인지 그런 것 같아 내려가면서 보면 뒤인 것도 같다가 올라오면서 보면 앞에  있어보여 송광사는 본래 송광산에 있는 절이라 그렇겠지?

누구는 슬픈 일이 있으면 해우소로 가서 싫컷 울라 했더군 깊어서 그랬을까?
흠뻑 울어도 눈물  많이 흘려도 표시조차 나지 않을 만큼 거기는 크고 깊지 않던가?

그런데 해우소나 정랑이나 다른 동네사람들이 만든 이름이란 걸 아는가?

우리네는 그저 뒤에 있는 집이라고 뒷 일 보는 집이라고 뒷간이라고 했던 것이네보기에 따라 깐뒤라고도 보네 한자 쓰는 순서로 한글을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써서...
거긴 냄새가 거의 없다네 이른바 생태화장실이지 확 트여있어서 다 볼 수 있으나 다 보이지는 않는다네.

그처럼 아무리 다녀보아도 선암사 특징이라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들 하던데 들어보았는가?

보아도 보아도 들어도 들어도 모르는 것이 있겠지.

같아도 다르고 달라도 비슷하게 느끼면 그것으로 그 뿐이라네.

첫째,사천왕문(四天王門)이 없다네.

둘째, 주련(柱聯)이 없었다네.

셋째, 어간문(御間門)이 없다네.

넷째, 협시불(協侍佛)이 없다네.

사천왕은 장승이 대신한다네.

주련이 없는 것은 마음  보는 선찰이라 그렇다네만 

요새사 누가 하나 걸었다네.

어간문은 있으나 턱을 높이하여 드나들 수 없다네.

꼭 그 이만 드나든다네.

초기불교 가르침  따라가되 발달된 명상법인

참선하는 도량이라 그렇다네."

어느날 총무원 주최의 최초 구족계 수계산림을 기획해서 2박3일간의 산림을 총괄해 진행하다

차 한 잔 나누는 기회에 선암사에 관한 궁금함을 여쭸더니 말씀해주셨다.

"아! 그렇군요 좋은 전통인 듯 싶습니다.

제가 실제 도량에 거주할 복이 모자라서

마음도량(心刹)이라 해왔는데..."

"그랬는가? 뜻이 있구먼..."

네. 그래서 아시다시피 저희 은사스님 의지해서 출가해 유발, 삭발하여 살았어도 염불은 예불만 하고 나머지는 참선하리라 맘 먹고 살았답니다.

일이 있는 도반네 절에서 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불보살님께 헌공하고,영반시식을 하되 한글 염불을 주로 했답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누구나 어디에서나 으레 읊는 천수경 독송하는 것을 본 도반스님이'어,법현스님이 천수경을 다 읊네?'하였답니다."

"그랬는가? 조금 달리 살았구먼!"

"네. 그랬습니다. 참!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우리 태고총림 선암사 북전(北殿=無憂殿)에 있는 큰스님 주무시고 면담하시는 방이 너무 좁습니다."

"아! 좀 그렇제? 붓다의 가르침 좋아한 유마(淨名=위마라끼르띠)가 있었다네.
<유마경>에 따르면 스님 제자들보다  뛰어난 이론가요, 수행자인데다 어마어마한  부자였다네. 그런데도 서너 평쯤 되는 작은 방에 살았는데 그 넓이를 1 방장(方丈)이라 중국 넓이로 이른다네. 모름지기 수행자는 그래야한다는 의미에서 큰 절의 최고 지도자스님이 사는 방을 방장(方丈) 또는 방장실(方丈室)이라 이름해 부르네.

그 스님을 일러 방장(方丈)이라 한다네.

작고 좁아도 5백 대중이 문병차 들어가도 모자람이없는 불가사의한 방이라 부사의방(不思意房)인 것이네."

그래서 지금 시방도 방장스님이 사시는 무우전(無憂殿)의 접빈실 말고 사시는 방이 그만하여 참 방장실이요, 부사의방이요,선암사의 참 특징이다.

알아도 잊고, 몰라서 못보고, 보고서도 익히지 않으면 도움되지 않는다.
맘공부 곧 참선도 그럴 것이다.

그 좁은 방차지 복도 없다가 월세 포교원인 서울 은평구 열린선원에서 설법하신 큰스님께 그나마 100여년 된 전통사찰 보국사에 선장을 걸게 되었다고 아뢰었더니 많이 기뻐해주신 기억이 새로웠는데 급히 가셔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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