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_ 드디어 꿈을 이룬 김 탄.

“다음 생엔 타국 생활을 하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들었어요. 저는.”

“그걸 들었다고?.”

“네. 잘 들리던데요.”

“귀도 밝구나.”

반장의 칭찬에 김탄은 멋쩍게 배시시 웃어본다.

그 후로 또다시 찾아 온 어색한 침묵.

자 이제, 드디어 둘 만의 시간을 갖게 된 반장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조건이 형성되었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아까 코피 때문에 혈압이 오른 뒷목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하이고~ 이거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참.”

혼잣말로 중얼거린 반장은 그대로 먼 산 바라보듯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마치 뜸을 들이듯 말을 못하고 있는 반장을 본 김탄이 궁금함에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반장은 김탄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멀뚱히 그를 쳐다만 보다 아까부터 마시지 못하고 손에 들린 캔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상당히 말랐는지 한 번에 끝까지 다 마신 반장은 빈 캔을 테이블에 탁 내려 놓으며 김탄에게 대뜸 물었다.

“얼만데?”

“네? 뭐가요?”

“그 사채업자한테 갚을 돈이 얼마냐고”

“어휴. 그건 왜요?”

“빨리 말해.”

“저기. 7800만 원이요.”

“뭐?”

아주 깜짝 놀란 듯 입이 떡 벌어진 반장은 그러다 턱까지 빠질 기세였다.

그는 넋이 나간 듯 한참을 그러고 있다 순간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마치 이곳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뭐, 망상이나 환상 속에서 벗어나고픈 그런 몸 짓.

그러던 그가 이곳이 현실임을 인지한 듯 김탄을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아니. 뭘 했길래 그렇게 큰돈을 빚을 진 게야?”

고려 왕건 친필 싸인이 있는 문화재를 박살 내 생긴 빚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김탄은 그저 수줍게 머리를 긁적이며 둘러댔다.

“아이고. 나쁜 짓은 안 했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믿어 주세요.”

김탄의 말을 들은 반장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시간이 지나자 급기야는 화가 났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당황한 김탄이 가슴이 콩닥거리자 갑자기 반장이 또 버럭 소리를 쳤다.

“방 빼!”

“네?”

“네 원룸 방 뺀 보증금에 나머지는 내가 얹어서 갚아주마. 대신 우리 집으로 와. 그리고 여기 그냥 다녀서 기술 배워. 기술 배워 놓으면 먹고 사는데 어려움은 없으니까.”

말을 제대로 들었지만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김탄은 잘 못 알아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네?”

“그냥 몸만 와. 나하고 집사람 둘이 살기엔 집이 너무 크고 조용해. 그냥 와서 살아.”

“아니 그게 무슨..”

분명 이건 제안이다.

같이 살림을 합치자는 제안.

하숙이나 동거, 그런 류의 제안인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

김탄은 그 제안에 지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런 김탄을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곁눈으로 눈치를 살피던 반장이 퉁명스럽게 다시 말을 던졌다.

“살다가 우리가 맘에 들면 그냥 아버지, 어머니 하면 되지 뭐.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지만..”

이제서야 반장의 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김탄은 깜짝 놀랐다.

이건 양자 입적에 관한 제안이었다.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었지만 분명 가족으로 함께 하자는 말.

모두 김탄의 결정에 따르는 제안이었고 강압도 없었다.

살다가 아버지, 어머니 하면 되는 책임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모두 김탄만을 위한 배려 같았다.

이 제안에 김탄은 가슴이 심하게 콩콩콩 뛰기 시작했다.

그는 솔직히 반장이 너무 좋았다.

평상시 엄하지만 너무 좋은 사람이라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하고 있던 터.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입양이 이루어지는 순간.

지금 그는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가 보육원에 있을 당시 그는 단 한 번도 입양을 위한 선택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보육원에 온 예비 부모들에게서 선택은 커녕 눈길조차 받지 못했던 김탄이었다.

그런 그가 그 보육원에서 지낼 수 있을 때까지 지낸 후 사회로 나와 회사에서 이렇게 선택을 받다니..

꿈에도 생각 못 해본 일이었다.

꿈이 이루어진 이 순간 김탄은 너무 기분이 좋아 날아갈 것 같았다.

게다가 잘 모르고 낯선 사람이 아닌, 그가 좋아하는 반장님이 한 입양이다.

탄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

그런 김탄의 표정에 긍정의 뜻을 읽은 반장은 희망에 부풀었다.

그가 김탄의 마음에 더욱더 부채질을 했다.

“그냥 그렇게 해. 토 달지 말고.”

“네 그럴 게요. 그렇게 할 게요. 좋아요. 반장 님. 흐흐흐.”

이제는 입이 귀에까지 걸린 김탄은 그대로 가다가는 찢어질 기세였다.

그런 그의 표정에 반장의 광대도 승천했고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원 녀석. 혹시 좋은 게냐?”

“네. 좋아요.”

김탄은 지금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

그렇게 꿈에 그리던 가족이 생기는 순간.

드디어 아버지 어머니가 생기는 순간.

설레는 마음에 날아갈 것 같은 걸 너머 눈물까지 나려 했다.

더 이상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을 미래.

그의 머릿속에선 지금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부모인 반장님과 그의 와이프를 중심으로 둔 대가족 사진을 찍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상상을 깨며 반장이 절대 너를 놓치지 않겠다며 다시 부채질을 했다.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살다가 결정 해. 집사람도 너를 좋아하니까 말이야.”

“다 커서 징그러워하시지 않을까요?”

“집사람이 먼저 제안한 거야. 너를 꼭 아들 삼고 싶다고 1년 전부터 졸라댔는데 이제야 얘기하게 되네. 일단 우리 집으로 짐부터 옮기자.”

“아 그건..”

갑자기 김탄이 우울한 듯 말을 얼버무리자 반장이 노심초사 웬일인지 물었다.

“왜? 다시 맘이 달라진 거야?”

“아이요.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머뭇거려?”

“그게.. 저.. 그러니까 옮길 짐이 없어요. 반장님.”

“뭐? 다른 데로 옮긴 거 아니었어?”

“아니. 그게.. 일단 저랑 같이 온 사람에게 얘기하고 올 게요. 정리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 그래라. 그럼.”

박토와의 계약 파기를 위해 일어서는 김탄의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또한 박토와의 계약 파기를 위해 그를 만나러 입구 쪽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이 바람처럼 빨랐다.

가는 도중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깡충깡충 뛰기도 했다.

김탄이 회사에 입사한 이래로 저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본 반장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나채국이 책상에 앉아 신들린 손놀림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하며 중얼대고 있었다.

“좋아. 좋아. 오케이. 그렇지! 역시 녹슬지 않았어.”

지금 그는 열심히 해킹을 하고 있는 중.

그런데 그 옆에서 신들린 손놀림을 바라보고 있는 은비칼은 뭔가 초조하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다.

아마도 나채국을 보고 그러는 걸로 봐선 나채국 때문에 무언가 불편해서 그런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은비칼이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나채국은 신들린 손가락 신공을 멈추더니 갑자기 신이 난 듯 소리를 쳤다.

“됐어! 다 끝났다!”

한 것 고양된 그가 만세를 한 번 하고는 몸을 그대로 옆으로 돌려 은비칼을 쳐다보았다.

앉아 있던 나채국이 그를 보기 위해선 고개를 올려다보아야 한다.

바로 옆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은비칼.

그런데 얼굴이 상당히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분위기 전환 차 피식 웃어보는 나채국.

그래도 여전히 굳어 있는 은비칼의 얼굴.

나채국은 그런 은비칼 때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바로 무시하고는 손으로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을 했다.

“보세요. 실장님.”

모니터엔 그가 해킹한 아이피 카메라의 송출 화면이 전송되고 있었다.

그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는 은비칼은 나채국의 대단한 성과지만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 것인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던 그가 정말 불만이 가득하다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대 당 1분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 때문이다.

1분.

은비칼의 표정이 굳어 있던 건.

그리고 은비칼의 목소리가 저음이었던 건.

1분 만에 아이피 카메라의 비번을 풀 수 있다는 말을 괜히 했다.

나채국의 섣부를 자랑질 때문에 나온 패수(敗數).

“어휴. 카메라 한 대당 4분 정도면 엄청 빨리 한 거예요. 요즘엔 ip 카메라 영상 데이터가 실시간 암호키로 암호화 되는 게 많아졌거든요. 탈취한 데이터를 복호화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예전이랑 많이 틀려졌네요. 저도 오랜만에 해봐서.. 흐흐흐.”

알량한 자존심이 치고 나온 나채국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 아무것도 모르는 자에게 변명을 했다.

사실 그가 요즘 아이피 카메라는 4분 만에 푼 건 대단한 실력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놀린 입방정 때문에 그 실력이 폄하되며 구라쟁이가 된 지금 그는 그걸 만회할 길은 없어 보인다.

은비칼은 어쨌든 나채국이 말한 1분을 믿고 맡긴 총책임자.

하지만 1분 만에 풀지 못해 지금 착잡함을 뛰어넘어 분노까지 하고 있었다.

나채국이 열심히 말한 변명 같은 설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그를 무시하곤 오강심에게 물었다.

“오 강심 씨. 카메라가 총 7대라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후아~ 이런!!!!”

절망에 빠진 듯 단말마를 내뱉는 은비칼.

그의 한숨 섞인 기묘한 소리에 이 세상의 절망이 다 담긴 듯 보였다.

정말 그는 그 후로 절망에 빠졌다는 듯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바닥만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실망으로 가득 찬 그의 부라린 눈에 살벌한 기운까지 어린것은 모두 대당 4분 걸린 나채국의 해킹 실력 때문이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오강심이 나채국을 나무라듯 쳐다봤다.

대체 왜 1분이라고 말했냐? 대체 왜? 왜?

뭐, 이렇게 말을 하는 듯..

오강심의 눈빛을 받은 나채국은 기가 죽었다.

솔직히 아까도 말했듯 대당 4분에 풀 실력이면 대단한 거다.

공인된 대회라면 세계 1등 감으로 검증될 실력이 지금 여기 오성 내부망 전산실에선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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