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수의 아버지

한정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눈빛은 먼 과거를 향해 줄달음쳐 가고 있는 듯이 눈물이 가득찼다. 한정달의 사진을 수첩에서 꺼내 보이며, 서글서글한 눈매와 두툼한 입술, 미남형이지 않냐며 손으로 사진을 쓰다듬었다.

한국전쟁 때였다. 한정달은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당시 고위 간부의 아들이었던 한정달은 대학생이었다. 나라에 충성할 기회를 주겠다며 학도병으로 지원을 강요했다. 인천 상륙 작전에서 참패를 당한 북한은 어린 소년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시켜 입대시켰다. 한정달도 군사훈련을 받고 학도병으로 자원했다. 그런데 정세가 위급해지자 한정달에게 비밀공작원의 특수임무가 맡겨졌다. 의대에 다니던 중이라 야전병원으로 부임 받을 것으로 예상했던 터라 몹시 당혹스러웠다. 지리산 게릴라 전사들에게 자금을 전달해 주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3명이 한 조가 되어 밤이면 산을 탔고, 낮엔 땅굴을 파고 들어가 몸을 숨겼다.

한정달이 태백산맥을 타고 소백산맥에 이르렀을 땐 겨울이 깊어 있었다. 물론 전세는 최악의 상태였다. 지리산에서 게릴라 전술을 폈던 빨치산 부대에 수시로 자금조달을 위해 비밀 요원과 접속했다.

한정달은 비밀 요원으로 임무를 다했지만, 지리산 게릴라 전사들과 식량 조달사업에 동참하라는 직책을 부여받고 남게 됐다. 식량 조달사업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한밤중에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양민을 학살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국방군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총성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민간인 옷을 입고 변장하고 있다가 대항을 하는 바람에 서로가 무차별하게 총을 발사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한정달은 만삭이 된 여자의 배에 총알이 박히고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갈수록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탈출하기엔 너무 산이 깊었고, 사방이 연합군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굶주림에 지친 그의 소속 부대 몇몇이 마을로 내려갔다. 검은 무리의 움직임이 훤히 보일 만큼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열 명이 한 조가 되어 마을 입구에 진입하려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병 하나가 꼬꾸라졌다. 원을 그리며 밀려드는 연합군대에 일당은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였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백기를 든 그들 무리는 곧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고 말았다.

한정수의 아버지 한정달은 그렇게 해서 거제도 수용소 포로가 된 것이었다. 거제도 포로 이송 중인 트럭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한정달은 북에 남은 가족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포로수용소 심사에서 최상위 반동 골수분자로 분류됐다. 한정달의 아버지가 북측에서 영향력이 있는 당의 간부라는 이유였다.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은 포로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했고, 절대적 복종을 강요했다. 수용소 내에서 추종받고 있던 한정달은 포로들 앞에서 자주 고문을 받았다. 거제도 수용소 내에선 여러 번의 심사를 거쳐 반공포로와 공산군 포로 나누었다. 한정달은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산군 포로 구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용소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1952년 5월 포로 수용소장이 공산군 포로들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정달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또 한 번의 곤욕을 치렀다. 그 폭동으로 반공포로들이 105명이 사살되었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느껴 충성심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산군 포로들은 수용소장 도드 준장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공산 포로의 대우를 개선해 줄 것과 자유로운 포로 송환해줄 것 그리고 포로의 심사를 중지하라는 항목을 내세워 협상했다. 또한, 포로 대표위원단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국군에 의해 거제도 폭동 사건은 제압되었고, 공산군 포로들을 철저한 감시와 억압을 받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때, 한정달은 반공포로로 전향했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고문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3.8선으로 나라는 양분되었음이 발표됐다. 한정달은 남한 생활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표류할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었다. 피붙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의 정착은 무리였을 수도 있었다.

한정달이 처음 정착한 곳은 제주도 표선리였다. 갈 옷처럼 순박한 표선리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의학도의 꿈을 키워왔던 그가 갑판에 널려져 있는 그물에 걸린 생선을 손질하는 잡부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 모든 게 캄캄했다. 그러다가 선주의 눈에 들어, 그의 딸과 결혼하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한정달은 기회만 되면 언젠가 잃어버린 자신의 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한정수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한정달은 유언을 남기고 조용히 표선리를 떠났다.

‘일본 갔다가 제기제기 올 테니, 어망! 말 잘 듣고 있어라.’

일본으로 건너간 한정달은 북송선을 탔다. 1959년 12월 14일, 재일 교포 234대 975명을 실은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루구쿠호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일본의 미카타항을 출발했다. 한정달이 잃어버린 꿈을 좇아 떠난 북송선을 탔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정수는 평생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했다. 한정수에게 아버지는 선택은 자신에게는 엄청난 걸림돌이 됐다. 빨갱이 가족으로 늘 감시 대상이 되던 것이고. 정부 기관이라든가, 그 산하단체에 취직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당신 자신의 꿈을 위해 북송을 선택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 집이 망가진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아버지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민들레 씨앗이 생각나네요. 민들레는 꽃을 피워 열매를 맺으면 날개를 날고 날아가죠. 만약 인수 씨가 아버지였더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민들레 씨앗이길 포기했을까요? 어쩌면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을 겁니다. 잃어버린 자신의 꿈을 말이죠.”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사라진 꿈

대학에서 자동차공학을 전공한 한정수는 획기적인 자동차부품을 개발했다. 자동차부품 대부분을 수입해 한국에서 조립해버리는 방법이었기에 자체 개발은 시급했다.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그는 일찍 깨달았다. 그 당시 대기업에선 엘리트 공학도 집단을 대거 스카우트해서 기획 상품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개발한 상품을 팔아넘길 수는 없었다. 해서 서울에 올라와 자동차 부품공장을 차렸다.

그가 관심을 두고 연구했던 분야는 자동클러치와 엔진 분야였다. 언젠가 지구에 석유가 바닥난다면 대혼란이 올 것이란 사실을 간파다. 물론 후속 조치로 태양력과 조력, 풍력도 있었다. 석유가 지구에 남아 있는 한 석유문명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거란 주장도 막강해서 일부 나라에선 다른 연료를 발견한 사례가 발표되더라도 지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석유를 이용해 재벌왕국이 된 나라들이 쉽사리 석유문명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과학자가 사명감으로 연구하려고 해도 자금을 지원받지 못해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가 설계했던 자동클러치는 모터를 움직이는 액추에이터, 기어노브 센서, 소형컴퓨터 등 아주 간단한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기계의 장점은 연료 절감의 효과가 크다는 점이었다. 기존 수동 변속기나 오토매틱 변속기보다도 연료비가 적게 들어 상품화 가능성이 될 것을 확신해서 연구를 계속했다. 개발 중인 부품을 사용할 경우, 연료 소모가 줄어든 만큼 배출 가스양도 줄어들어 환경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는 우수한 제품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동클러치와 관련된 특허를 따냈으나 광고의뢰자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가 명동의 마 여사를 알게 됐다. 재계는 물론 정계의 자금까지 떡 주무르듯 한다는 정보를 갖고 마 여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연구 내용을 설명했다. 그러자 마 여사가 큰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해서 한정수는 돈의 노예가 됐고, 마 여사의 로봇이 됐다. 한정수의 사업계획을 듣고 마 여사는 선뜻 사업자금을 주었고, 동업자 위치라는 계약서가 작성됐다. 더구나 마 여사가 한정수를 사윗감으로 점찍었다.

마 여사는 한눈에 한정수를 영특함을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한정수를 꼭두각시로 만들 계획을 짰다. 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됐고, 성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 마 여사는 한정수와 그녀의 딸을 결혼시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버렸다. 결국, 한정수가 특허 냈던 연구보고서는 마 여사의 손에 넘어갔고, 얼마 후엔 사업기밀을 대기업에 팔아버렸다. 처음엔 한정수도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마 여사의 말을 믿었다. 미국에서 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한정수는 작은 회사를 인수 해 첨단기술을 이용한 자동차 모델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그의 기술의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묵인했다. 몇 년 후에는 한정수는 잘 나가는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회사 규모도 확장해 나갔다. 무엇보다도 마 여사의 입김으로 자금 동원이 수월했고, 코스닥 유망 업종으로 뛰어올랐다. 한정수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곧 진흙탕에 빠져 버렸어요. 마 여사가 대선자금을 대주던 대통령 후보자가 선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거죠. 회사의 주식은 하루아침에 우수수 떨어지고, 장모는 회사를 계획적으로 부도처리를 하고 행적을 감추었어요.”

한정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막대한 자금을 한 사람에게 박은 것, 마 여사의 큰 실수였어요. 그리고 그 여파는 즉시 나타났어요. 연료를 기존 차량의 30% 이상 절감할 수 있도록 엔진을 다시 설계했고, 여성이나 장애인들에게 아주 편리한 자동차 엔진을 개발했는데,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요.”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은 가족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아내와 아이들은 미국에 이민을 떠났어요. 그리고 그 모든 일은 계획을 세워두고 파산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죠. 물론 장모가 밀던 대권 후보자가 당선되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내가 완전히 희생양이 된 셈이죠.”

“미국에 있는 가족과 연락은 되나요?”

사실 나는 그의 가족에 관해 물어보면서도 겸연쩍었다.

“서로가 필요 가치에 의해 결혼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힘들었지. 아내는 이미 결혼 전에 사귀던 남자가 있었나 봐요. 내 책임도 컸어요. 사업에만 빠져 아내를 외롭게 했거든요. 어느 날부턴가. 아내의 몸에서 낯선 남자의 냄새가 났어요. 마치 가미카제 정자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면, 두꺼운 장벽을 만든 다음 공격을 한다는 데, 가미카제 정자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을 비유하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에요. 점차 나는 아내의 몸을 가까이하지 않게 되었소. 그녀의 내부에 숨어있던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자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어요.”

“너무 비유가 과하네요. 듣고 있으려니 거북스러워요. 아내가 싫으면 그만이지 가미카제 이론까지 내세워 아내를 거부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당신은 몰라서 그렇소. 아내는 드러내놓고 남자를 만나러 다녔소. 그리고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지. 나는 아이들 때문에 쉽게 결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아내는 아이들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거요. 결국, 아내와 합의 이혼을 했어요.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제주도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일이요.”

그의 얼굴에 가득 찼던 수심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그토록 지고지순한 남자가 있을까 하는 놀라움을 갖게 했다.

그와 식당으로 갔을 땐,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영업하려면 점심때나 될 것 같아 자판기 커피만 한 잔씩 빼서 마셨다. 자꾸만 서늘한 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들어 옷깃을 여몄다.

이경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22년 직지소설문학상 중편소설 최우수상 수상 ‘달루에 걸린 직지’

*저서: 장편소설 『는개』, 『탈의 꽃』,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아름다운 독』,『달루에 걸린 직지』에세이집『아난다가보내온 꽃씨』 출간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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