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_ 커피만 노예 각성을 시키는 게 아닙니다. 배려와 친절도 각성시키죠.

내미. 씨부레옥잠씨.

이것은 조금만 난처하면 지구 종말을 들먹거리며 희생해 달라고 말하는 은비칼 때문에 나채국이 마음 속으로 욕을 한 것이다.

그는 나름 배웠다는 지성인이기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천불이 일어나고 있는 그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물론 오강심도 마찬가지..

그런데 자신의 부탁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 나채국과 오강심을 본 은비칼은 지금 마음이 착잡하다.

이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그냥 남 일이다.

단지 박망개군을 보지 못해, 그토록 원하는 드론을 받지 못해 생긴 마음의 상처만 드러내고 있는 오강심과 나채국.

자신들의 서운함만 생각하는 그들은 단지 재미와 즐거움만 추구하는 자들 같다.

이 사실에 더욱더 마음이 착잡해진 은비칼.

허나 그들을 달랠 수가 없다.

모두 그 상처는 은비칼 때문에 받게 된 것.

정말로 상처가 크다는 듯 오강심과 나채국은 한마음 두 몸처럼 동시에 컴퓨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은비칼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들 때문에 이번에는 은비칼이 상처를 받았다.

‘제 마음을 너무 몰라 주네요. 나 채국 씨. 오 강심 씨. 세상이 사라지면 대박 소년단도 드론도 사라지는 거예요. 지금은 조금 힘들겠지만 나중에 제 맘을 알아주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상처받은 마음을 혼자 추스른 은비칼은 티 테이블에 올려 놓은 커피를 가지고 와 나채국에게 내밀었다.

눈 앞에 커피가 보이자 나채국은 은비칼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웬 커피냐는 듯 커피를 보며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그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먹고 싶었지만 아닌 척 했다.

-이런 참. 어려운 사람.-

나채국의 마음을 읽은 은비칼이 빨리 받아 들라는 듯 커피를 더 들이밀었다.

그러자 마지못해 받는 것처럼 받아 든 나채국은 그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채국이 받아 든 커피를 한 모금 빨았다.

카라멜 마끼아또.

파아아아아앗!

그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의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감돌자 무언가 뇌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한 것인지 그의 표정은 마치 상쾌하다는 듯 밝아졌다.

“맛있네요.”

나채국이 커피에 마음을 열고 한마디 내뱉자 그것이 너무 반가웠던 은비칼은 그에게 답례로 미소를 한 번 남기고는 오강심에게 다가가 그녀만을 위해 산 커피를 건넸다.

“제가 직접 두 블록 건너 **카페에서 사 온 커피입니다. 피로에 지친 여러분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이죠. 오 강심 씨 취향에 맞춰 샷 두 개 더 추가했습니다.”

부하 직원의 취향을 일일이 기억하는 은비칼의 정성에 살짝 감동 받은 오강심.

말없이 커피를 받아 들고 마셨다.

화났던 게 누그러진 듯 그녀의 표정도 온화해졌다.

현대판 노예 각성 음료.

카페인이 들어가자 오강심과 나채국의 나른한 오후는 사라졌다.

다시 총명함을 되찾은 그들을 본 은비칼은 너무 흡족하다.

“자 이제 그럼 제가 하는 질문에 답해주세요. 저긴 어디입니까?”

은비칼이 가리킨 곳의 모니터를 나채국과 오강심은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크게 놀라지도 않았고 또 심각해 하지도 않았다.

사실 은비칼은 그 모니터가 어디를 비추는 모니터인 지 알고 있었지만 일을 시키기 위해 운을 뗐던 것.

그렇지만 이렇게 까지 알아서 알아들으라 운을 뗐지만 오강심과 나채국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서둘러 복구 할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그저 나채국은 여전히 멀뚱히 꺼진 모니터만 바라보았고 오강심은 은비칼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김 탄이 근무했던 회사. 신우 프로텍 입구 씨씨티비 화면입니다.”

“압니다.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은비칼의 말에 그제야 당황하는 나채국.

“어? 왜 저게 꺼져 있지?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실장님.”

서둘러 원인을 분석하는 나채국.

그의 자판을 두드리는 손놀림이 신묘하다.

한참을 그렇게 원인을 살피던 그가 무언가 알아낸 듯 박수를 한 번 쳤다.

“이런. 먹통이에요. 고장 난 것 같아요.”

겨우 알아낸 게 고장이라니..

은비칼은 나채국의 자판을 두드리던 신묘한 손놀림이 제 손인 것처럼 부끄러웠다.

“복구된 지 하루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또 고장이 났다는 겁니까?”

“그럴 리는 없겠죠? 그럼 대체 왜 꺼진 걸까요?”

이 사람들이!

그 원인을 알아내라고 일을 시킨 것인데 그 원인을 되묻고 있는 나채국에게 성질이 난 은비칼.

그의 얼굴이 살짝 굳어질 때쯤 갑자기 오강심이 무언가 알아낸 듯 박수를 한 번 쳤다.

드디어 오강심이 원인을 알아낸 것 같아 은비칼이 내심 가득 얼굴에 기대를 담고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아주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장이 난 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실장님.”

은비칼은 오강심의 말을 그냥 무시하며 팔짱을 꼈다.

지금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 실망 중이다.

자신이 원한 답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뭐라 하지도 못했던 그는 한 손으로 턱을 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직접 고치러 가기엔 시간이 너무 걸린다. 또 이대로 가만히 있자니 그럴 수도 없다.만약 김탄이 신우 프로텍으로 간다면 그걸 확인할 길이 없다. -

이 생각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절망적인 읊조림.

“큰일이군요. 집중 감시하는 곳인데.. 이를 어쩌나?”

“그럼 제시를 보내는 건 어때요? 오늘 같이 출근했거든요.”

나채국의 제안에 은비칼은 흥미를 보였다.

하나 그 제안은 은비칼이 이미 고려했던 것이다.

사람을 보낼 시간은 너무 오래 걸린다.

나채국의 허접한 제안에 이내 관심 없는 표정으로 바뀌는 은비칼.

그는, '네가 생각한 건 나도 이미 생각해 본거야.'라고 말하는 듯 푸념을 했다.

“사람을 보낼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시가 누굽니까? 새로 들어온 신입인가요?”

“잠시만요. 실장님.”

은비칼의 질문에 곧바로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나채국.

거기서 쭈그려 앉아 가방을 열고 뒤적였다.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알 수 없었던 은비칼은 천천히 나채국에게로 향하는데..

갑자기 무언가 찾은 듯 나채국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해맑은 표정으로 손에 들린 물건을 은비칼에게 보여주는데..

그걸 본 은비칼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은 듯 로봇같이 변했다.

그가 영혼 없는 얼굴로 나채국에게 되물었다.

“그게 뭐죠? 드론 같아 보이는데 혹시 드론 아닙니까?”

은비칼의 질문에 나채국은 새하얀 이부터 드러냈다.

'제시라는 이름을 가진 게 사람이 아닌 드론이라니.. 드론에게 사람 이름을 붙이는 괴상한 취미라니.. 나는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하겠다.'라고 은비칼이 생각하며 드론을 손에 들고 있는 나채국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채국은 지금 은비칼의 마음을 모르고 있다.

그는 그저 제 손에 들린 드론을 보며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구분 못하는 듯 판타지에 빠진 표정으로 웃고 있는데..

마치 직장 상사에게 자신의 애인을 소개해주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나채국이 아주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은비칼에게 제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 드론 맞아요. 얘가 제시예요. 나의 사랑하는 제시. 바디가 화이트라 여자 이름을 지어줬어요.”

-어디서 봤더라? 애니 캐릭터 그려진 배게를 진짜 애인으로 생각하며 소개하는 짤을 봤었는데.. 10덕도 이런 상 10덕이 다 있을까?-

나채국의 덕질에 저절로 혀가 내둘러지는 은비칼.

그대로 할말을 잃은 은비칼은 마치 자신 혼자만 그런 마음이 드는 건지 오강심을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이상한 거냐? 나채국이 이상한 거냐?' 라고 묻는 듯..

오강심은 환멸, 경멸, 능욕 같은 단어로 설명될 듯한 표정으로 나채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은비칼과 눈이 마주친 오강심.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빛으로 말했다.

-그냥 무시하세요. 저런 덕후는 병이거든요. 차라리 사람을 좋아하지 왜 저런데?-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오강심의 마음의 소리에 은비칼은 나채국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잘못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이들의 이런 마음을 절대 모르는 나채국은 연신 손에 들린 드론을 제 볼에 비벼대고 있었다.

정말 사랑하는 듯 한참 그러던 그가 은비칼을 향해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실장님. 여기에서 신우 프로텍까지 직선거리가 6.4km이고 제시가 시속 84Km니까 적절한 풍속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4분 57초 걸릴 거예요. 제시를 보내죠.”

“거절하겠습니다. 나 채국 씨.”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나채국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은비칼.

그러자 해맑게 웃던 나채국의 얼굴은 절망에 휩싸였다.

그리고는 이내 슬퍼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그보다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듯 어깨까지 아래로 축 처진 그가 원망하듯 웅얼거렸다.

“허락해 주세요. 실장님. 제발이요. 이번이 아니면 써보지 못할 거예요. 네?”

“드론은 마음대로 쓰실 수 있습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심지어 여기에서도. 그런데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나채국에게서 꿍꿍이를 읽은 은비칼 묻자 나채국은 말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그렇다면 분명 검은 속내가 있는 것이다.

의심의 눈초리로 나채국을 쏘아보는 은비칼이 '쟤가 왜 그러는지 너는 알고 있지?'라는 표정으로 오강심을 쳐다보자 그녀가 곧바로 자동답사(答射).

“오성 드론 관제시스템을 팀장님의 사랑하는 제시에게 써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오강심이 고자질한 나채국의 속마음에 은비칼의 표정은 더욱더 굳어졌고 급기야는 정말 화가 났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 채국 씨 정말 실망입니다. 정말 대의가 있긴 한 건가요? 오로지 노는 생각밖에 없군요. 절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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