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_네가 이렇게 우울한 건 처음 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박토는 그대로 김탄의 시선을 피해 딴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면에 마치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처럼 시치미를 떼며 딴청을 부리고 있는 박토를 본 김탄은 얄미움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하아, 진짜. 미치겠네. 저 진드기 같은 인간 때문에.. 화악, 그냥 씨..-

순간 울화가 치민 김탄은 분노조절장애자가 왜 되는지 알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소심하고 착한 그는 그렇게 생각대로 분노를 표출할 순 없었다.

-그냥 내가 꾹 참아야지. 어쩌겠냐? 씨부레.-

그가 이렇게 억울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모두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만약 김탄이 박토에게 화를 내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면 이 또한 신우 프로텍 식구들에게 또 다른 오해를 불러올 게 뻔하다.

박토는 절대 쉽고 만만한 자가 아니다.

무조건 입을 못 열게 하고 무조건 간섭하지 말게 해야 한다.

김탄이 화를 가까스로 삭이며 박토에게 입을 열었다.

“잠시만 자리 좀 비켜 주세요. 박토 씨.”

잘근잘근 씹어대는 김탄의 음성.

무언가 억울함에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박토는 지금 알고 있다.

김탄이 왜 저러는지.

하지만 무시했다.

“그럴 수는 없어. 너와 나는 한 몸이니까. 항상 같이 있어야 해. 운명이니까.”

집착도 병이다.

정신병.

그 집착과 더불어 또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박토 때문에 식겁해진 김탄은 더욱더 화가 나 아예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원래 찢어져 사납게 생긴 눈이 더 찢어져 더 사나워진 김탄.

게다가 정말 화가 났다는 듯 코에선 뜨거운 김이 나와 아지랑이를 피워댔다.

“도.망. 안. 갈. 테.니.까. 잠.시.만. 좀. 비.켜. 달.라.고.요. 제.발. 박.토. 씨~”

이를 악물며 바득바득 말을 마친 김탄, 지금 그는 엄청 화가 났지만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참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심상치 않음을 당연히 느낀 박토.

-화가 났군. 그럼 달래야겠어. 김탄이 만약 바탈은 안 하겠다고 하면 끝장이야. 몰아붙이는 건 여기까지!-

김탄이 마음의 변심을 완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박토는 그의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김탄의 눈 앞에 대고 흔들었다.

“알았어. 그럼 입구에서 기다릴게. 빨리 해결하고 와. 잊지 마. 고려시대 왕건.”

바득바득 바드득!!

지금 이건 김탄이 이를 가는 소리다.

잡히면 물어 뜯어버릴 거라는 듯 이를 갈고 있는 김탄을 본 박토는 부리나케 입구 쪽으로 도망치듯 걸어갔다.

그렇게 박토가 입구 쪽으로 가고 있는 사이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반장과 마영식 그리고 세네갈 출신 외국인 노동자 코피는 머릿속으로 대 서사시를 쓰고 있었다.

채권과 미스터리한 남자인 박토 그리고 김탄.

이 셋의 삼각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대서사시를 쓰고 있던 이들은 박토가 신우프로텍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들이 쓴 시나리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탄아. 정말 신체 포기각서까지 쓴 것은 아니겠지?”

영식의 말이 끝나자마자 코피가 물었다.

“저 멀대 같이 키 큰 남자는 누구야? 상당히 싸움을 잘하게 생겼는데.. 요즘 조폭은 좀 젠틀하고 지적인 게 트렌드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가 봐?”

이 둘의 대화를 들은 반장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진짜 사채 쓴 거야? 그러다 새우잡이 배로 팔려가면 안 되는데.. 아이고 이런”

모두가 쏟아낸 자발스러운 속사포 같은 질문 때문에 영혼이 털릴 것만 같았던 김탄은 그동안 박토에게 시달리며 겪은 고난과 역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이제는 사채를 끌어 쓴 빚쟁이로 만들어 나의 체면을 걸레로 만들다니..

그런데도 신우 프로텍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걱정하며 염려하고 있다.

완전 극과 극인 두 세력.

갑자기 설움이 북받친 김탄은 고개를 툭 떨구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입을 꾹 다물어버린 반장과 마영식 그리고 코피.

그 정적 사이로 김탄의 흐느낌만 신우 프로텍 작업장에 울러퍼졌다.

채권, 미스터리한 남자 그리고 김탄의 삼각 관계의 서사시를 써댔던 신우 프로텍 김탄의 사람들은 지금 김탄에게서 그동안 그가 당했던 모진 고난으로 인한 고통이 이상하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영식이 반장을 쳐다봤다.

그러자 반장도 영식을 쳐다보았다.

둘 다 걱정 한 가득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때 마영식이 '제발 어떻게 좀 해 봐요'라고 말하는 듯 눈짓을 보내자 반장이 울고 있는 김탄의 손을 턱 잡고선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야?”

“끅. 아니요. 끅끅. 아니요. 끅. 괘..괜찮아요.”

“울지 말고 말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해 봐.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줄 게.”

반장의 말에 김탄의 마음이 달래졌는지 고개를 들고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그를 쳐다보았다.

세상 혼자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울어서 퉁퉁 부어 축 처진 눈은 마치 엄마 잃은 강아지 같아 원래 그의 눈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반장님. 저기..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이고. 그래 그래. 일단 저기 가서 좀 앉자.”

반장은 곧바로 김탄의 손을 잡아 이끌며 작업장 한쪽 구석에 마련된 휴식 공간으로 데려갔다.

의자에 그를 앉히고는 그도 의자에 앉아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말없이 있는 김탄.

무언가 지친 듯 힘이 없어 보였다.

반장은 김탄이 할 말이 있다고 말을 하자고 해 놓고선 막상 자리를 깔아주니 아무 말이 없자 가슴부터 답답해져 왔다.

그렇다고 채근하기엔 김탄의 모습이 너무 처량하다.

게다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넋조차 나가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애가 더욱더 타는 반장은 분명 김탄이 할 얘기라는 게 가벼운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미리 짐작한 반장은 조바심이 났지만 김탄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위를 둘러보자 그 동안 김탄에게 신경 쓰느라 옆으로 코피와 영식이 다가 온 지도 몰랐다.

그들 또한 김탄이 염려스러운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김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밝고 씩씩했던 김탄.

지금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데 어색했던 코피와 영식.

그래서 퇴근까지 미루고 있는 그들이다.

그런 그들을 본 반장은 살짝 언짢았다.

혹시 김탄이 옆에 있는 코피와 영식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갑자기 화가 살짝 난 반장이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코피 넌 빨리 퇴근 해. 그리고 영식이 넌 이리 와 봐.”

반장의 말에 코피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영식은 재빠르게 반장 곁으로 다가왔다.

“왜요? 반장님.”

“가서 마실 것 좀 사 와.”

“네.”

반장의 심부름에 대답까지 마친 마영식.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지 알 수 가 없었던 반장은 의아함에 영식에게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마실 것 좀 사 오라니까.”

“그럼 돈 주셔야죠.”

순간 망부석처럼 몸과 얼굴이 굳은 반장.

도무지 저런 영식에게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반장의 속도 모르고 마영식은 눈만 끔벅거리며 '빨리 돈을 줘야 사러 가는데..'라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 영식 때문에 한숨부터 터져 나오는 반장.

“하~”

왜 한숨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반장은 말없이 호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열자마자 반장의 표정이 난처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지갑 속에 오만 원짜리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그 오만 원짜리 중 한 장을 꺼냈다.

그런데 왜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일까?

돈을 꺼낸 반장은 영식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돈을 건네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여기 있다. 가서 얼른 사 와.”

돈을 받아 든 마영식.

제 돈도 아닌 데 해맑기가 그지 없다.

그 오만 원을 두 손에 들고 영식이 물었다.

“몇 개 사 올까요?”

“대충 알아서 사와!”

빨리 가서 사오라는 음료수는 사오지도 않고 계속 뻘 짓만 해대는 영식에게 화가 난 반장이 순간 욱하는 마음에 버럭 했지만 왜 영식은 지폐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짓고만 있는 것인지..

마치 길을 가다 길에 떨어진 돈을 주워 횡재했다는 표정 같았다.

불길한 예감.

불길한 마음.

지금 반장의 마음.

마영식의 표정에서 미래의 삥땅을 읽은 반장은 내심 불안해졌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김탄이 할 말이 있다는 말을 할 테니까..

“뭐하고 있어? 빨리 가서 사와!”

반장의 벼락 같은 성화에 그제야 마영식은 몸을 움직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반장님!”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업장에서 사라진 마영식.

반장은 마영식의 달리기가 그렇게 빠르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저렇게 날렵하고 잽싸게 움직이는 걸로 봐선 태능선수촌에 있어도 이질적이지 않는 마영식이, 왜 여기 신우푸로텍에서의 작업은 항상 엄청 더디고 엉망인 것인지에 대해서..

그 생각에 씁쓸함마저 맴돈 반장은 말없이 영식이가 사라진 작업장 입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아이스 아메리카노~ 카라멜 마끼. ♩♪♩”

“♩♪♩ 아이스 아메리카노~ 카라멜 마끼. ♩♪♩”

“♩♪♩ 좋아. 좋아. 좋아. ♩♪♩”

호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IDC 출입문을 향해 걸어 오는 은비칼.

한 손에 테이크 아웃 커피가 들려 있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가 문을 열고 카드키를 단말기에 가져다 대자 부저음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저 멀리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채국과 오강심의 뒤통수가 보이자 은비칼은 함박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나 채국 씨! 오 강심 씨! 졸음을 날려줄 커피가 배달 왔습니다!”

은비칼이 이렇게 쩌렁쩌렁 외쳐도 그들은 뒤 돌아보지 않고 일에 삼매경이다.

그 사실에 더욱 더 미소가 커진 은비칼.

그는 나채국과 오강심 때문에 기분이 너무 좋아 날아갈 것 같다.

선생에겐 말 잘 듣는 학생이 좋은 법이고 직장 상사에겐 일 잘하는 부하 직원이 이상적인 법.

자신이 그런 직장 상사가 된 지금 이 순간 은비칼은 하늘에 감사를 했다.

‘신이시여. 제게 저들을 보내주시어 너무 고맙습니다.

저에겐 이 이상 더 훌륭한 직원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 아름다운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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