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_왕종철의 또다른 아들.

-감정의 골이 깊은 사람과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술 한잔을 기울일 수 있는가?감정이 없는 사람이거나 아님 교활한 사람일 것이다. 정확히는 감정을 감추고 가면을 쓴 체 연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장님의 말의 의미는 이 모든 걸 배제한 진짜 리얼한 상황을 만들어내라는 거다. 그래야 완벽하게 속일 수 있으니까. 결국 나 자신까지 속이라는 얘기인데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은비사의 머릿속은 왕종철의 몇 마디에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복잡하기만 했다.

대답을 원하는 것 같은 왕종철에게 그저 말 없이 빙긋이 미소만 짓는 게 최선이었던 은비사.

그런 그를 보고 있던 왕종철은 가소롭다는 듯 픽 한 번 웃더니 그대로 쇼파에 몸을 기대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표정 속에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매서운 눈, 한 없이 인자할 것 같은 입매.

왕종철은 때로는 엄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자상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 이 세상에 그의 속마음을 알아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은비사는 그의 심리적 방어 체계가 부럽기만 했다.

이후로 서로 말이 없는 메마른 분위기가 계속 됐다.

한동안 계속 되던 그 분위기를 왕종철이 갑자기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며 끝을 냈다.

한 참을 같은 자세로 있었던 왕종철이 어깨가 뻐근했던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은비사가 황급히 일어서 그의 뒤로 다가가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안마가 시원했는지 왕종철은 두 눈을 감은 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나긋하게 은비사에게 말을 걸었다.

“공권력이 필요하겠네. 그렇게 만들어야지? 비사야.”

“김 탄의 행방이 묘연한 것 때문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이미 시작하고 있으니까요. 모든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숨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은비사의 말에 갑자기 말이 없어진 왕종철에 무언가 잘못 대답했다 생각했는지 은비사는 긴장을 했고, 그런 그의 감정은 그의 손을 통해 고스란히 왕종철에게 전해졌다.

갑자기 왕종철이 손으로 은비사의 손을 잡아 멈췄다.

“됐다. 비사야. 이제 그만하거라.”

당황한 은비사는 이유를 알고 싶어 왕종철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아니다. 잘했다. 비사야. 다시 네 자리에 앉거라.”

-대답을 잘 안 해주는 회장님. 아니 정확히는 답을 안 하는 왕종철.-

은비사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대로 왕종철의 말대로 불편하게 맞은편 쇼파에 앉았다.

그런데 그런 그를 왕종철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 이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은비사는 얼굴만 붉힐 뿐이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은 처음이라는 듯 얼빵한 표정을 짓기만 하는 그에게 왕종철은 누가 봐도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잘 했다고 했지 않니? 왜 그러고 있어? 그런 모습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거라. 나 보다 한 발 먼저 일을 처리해서 기특하다는 뜻이야.”

은비사는 이제야 그의 심중을 알고 밝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런 그의 변화에 맞장구 치듯 다시 말을 내뱉는 왕종철.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역시 내 예측은 틀리지 않는 거야.”

또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에 은비사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눈을 치켜뜨자 왕종철은 아주 그를 가지고 노는 듯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널 거둔 걸 말하는 게다. 납골당에서 내 너를 처음 봤지?”

“네. 그렇습니다.”

“그때 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았다. 처음부터 널 알아봤어. 총명한 아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니 내 생각보다 한 발 앞서 일을 처리하는 게지. 그래서 내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야. 내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거든. 허허.”

예상 못한 왕종철의 칭찬에 은비사는 겸연쩍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회장님. 그 정도로 칭찬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원 녀석. 그런 것까지 겸손할 필요는 없네.”

“네. 알겠습니다.”

은비사의 대답을 끝으로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은비사는 그냥 두 손을 공손하게 맞잡은 체 테이블만 쳐다보았고 왕종철은 그런 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왕종철은 가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무언가 깨달은 듯 해탈한 표정 같았다.

은비사는 언제나 말이 없고 또 한다고 해도 짧게 하는 스타일이다.

입이 무겁고 또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명석하고 때로는 교활한 면도 없지 않지만 가식은 없다.

이런 진중하고 말 수 적은 성격이 왕종철이 그를 맘에 들어 하는 이유였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왕종철이 다시 은비사를 쳐다보았다.

은비사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정확히 느끼고는 있었다.

분명 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걸 느낀 은비사는 그런 건 개의치 않다는 듯 여전히 두 손을 모으고 말없이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말 없이 그의 모습에서 왕종철은 어렴풋 과거의 어린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 그때도 이런 표정이었지. 너는 어렸을 때랑 지금이랑 별반 다른 게 없구나. 한결같은 녀석이야.’

왕종철이 은비사를 처음 만났던 그때.

두 부모를 잃은 열일곱 살 은비사는 지금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보통 가족을 잃으면 침울해하거나 힘들어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어린 은비사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 은혁수의 지인이라며 왕종철이 손을 내밀었을 때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한 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악수를 받아들이는 어린 은비사에게서 강인함과 초연함을 읽은 왕종철은 그를 아들을 삼았고 지금 이렇게 그의 최 측근에서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

그가 은비사를 아들로 삼은 이유가 단지 그뿐만은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분노.

절대 타인이 읽을 수 없는 묘한 깊은 감정.

어린 은비사에게 그런 분노를 읽은 왕종철은 묘하게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었다.

육친의 아들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자신의 친 아들 왕태자보다 더 애착이 갔다.

허약해빠진 재벌 3세보다 분노를 아는 자들이 힘이 있다는 것을 내심 부러워했던 왕종철은 그런 연유로 고아인 은비사를 마음으로 낳았다.

새로운 아들 은비사를 잘 다듬어 길을 열어 준다면 거침없는 질주를 할 수 있는 재목이라는 걸 이미 오래 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분노는 때로는 무자비함과 집요함으로 그 힘을 증폭시켜 길게 끌고 가는 강인한 인내를 만들어 낸다.

분노하지 않는 자는 높이 오를 수 없다는 게 평소 왕종철의 지론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은비사는 그의 맘에 딱 드는 사람이었고 지금 완전히 그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회상에서 벗어난 왕종철은 다시 은비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쩌면 솔직하게 왕종철의 아들 왕태자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은비사를 바라보는 왕종철의 얼굴엔 정말 그렇다는 듯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왕종철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은비사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김탄을 도와주는 그놈이 바룬족인 것 같지 않은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얘기하지 않았누?”

“확실해지면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됐다. 내 심기를 아는 게지.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이런.. 바룬족을 모두 멸족시킨 줄 알았는데 살아있을 줄이야.”

무심코 내뱉은 왕종철의 말에 은비사는 살짝 호기심을 보였다.

“그때라면 혹시.. 20년 전 그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맞다. 그때 네 아비도 그 일에 휘말려 죽었지. 안타까운 죽음이었어. 아까운 사람이야. 네 아비는..”

순간 은비사는 표정이 굳어졌다.

보통은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그이지만 이상하게 은혁수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 감정을 읽은 왕종철이 입을 열었다.

“네 아비가 죽었을 때 그때 자네 나이가 열일곱이었던가?”

“네. 그렇습니다.”

“열일곱이라..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상처를 입고 아물기엔 더딘 나이긴 하지. 그동안 마음 고생이 많았을 것 같구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왕종철은 은비사를 타이르듯 말을 뱉어낸 후 자리에서 일어서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버티컬을 활짝 열어 창 밖을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짜증이 난 그는 그냥 손을 뒤로 한 체 뒷짐을 지고 구두 앞을 들어 바닥을 두 번 치고 난 후 읊조렸다.

“끈질기게 살아남았구먼. 바룬족 놈들..”

***

차 하나가 간신히 다닐 정도의 비포장 도로.

그 길을 혼자 터벅턱벅 걷고 있는 김탄.

그의 눈에 길 양 옆에 만발한 민들레 꽃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고 상큼하다.

유치원생, 병아리 뭐 유약함이나 어린 의미를 상징하는 노란색은 새로움과 희망의 색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꽃을 바라보는 김탄의 얼굴에 수심이 그득했다.

그런 얼굴로 털레털레 신작로를 계속 걷는 김탄.

그러던 중 그의 눈에 들어온 민들레 꽃 중간중간 다 여문 민들레 홀씨들.

바람만 불면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하늘거리는 민들레 홀씨들을 본 김탄은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려왔다.

하늘거리는 민들레 홀씨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김탄이 걸음을 멈추고 민들레 홀씨를 하나 꺾어 들었다.

후~

입김을 불자 홀씨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자유롭게 저 멀리 바람에 몸을 싣고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들.

-아 저런 것이 자유인 것이겠지. 바람 따라 정처 없이 마음대로 날아가는 것.-

지금 김탄은 민들레 홀씨가 부럽기만 하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가득한 그였기에..

붕.

부앙.

갑자기 들린 엔진음 소리에 인상부터 쓰는 김탄.

아까부터 차 한 대가 자꾸만 김탄의 뒤에서 공회전을 해댔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 중.

하지만 그는 그 차가 그러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박토가 탄 차가 분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차는 벌써 김탄을 추월해 지나갔을 거다.

또한 그는 지금 도로 가장자리를 걷고 있는 중이다.

박토가 탄 차가 아니라면 그 차가 그를 지나치지 않을 리가 없다.

바룬족의 찰거머리 행태에 소름까지 돋은 김탄.

그는 분명 박토의 집을 나설 때 혼자 모든 문제를 정리하고 되돌아온다고 말했었다.

그때 박토가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말했지만 김탄은 거절했다.

절대 그들과 동행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조금 불편하고 힘들어도 혼자 가는 게 편하다.

그래서 바룬족의 만류도 뿌리치고 이렇게 혼자 무작정 박토의 집을 나선 후 걷고 있는 중.

뭐 가다 보면 버스가 다니는 길이 나오겠지.

모든 길은 다 통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김탄이 박토의 집을 나선 후 40분 정도가 지나자 차 한대가 김탄의 뒤로 다가왔었다.

그 후로 추월하지 않고 가끔 엔진 가동 소리를 시끄럽게 내며 김탄의 뒤를 쫓는 중이니

안 봐도 뻔하다.

박토가 분명했다.

이런. 씨…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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