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_커다란 힘에 맞서는 또다른 거대한 힘.

결국 신중함을 선택한 HTD 시스템 원장은 자신의 결정을 내뱉었다.

“물론 촉박한 일정이지만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하지만 내일 꼭 해야만 하는 특별한 사정이 아니라면 며칠 뒤로 미뤄도 괜찮을 것 같은데.. 뭐든 완벽한 게 좋지 않습니까? 허허.”

이 정도면 은비사의 눈 밖에 날 일은 없다는 생각에 말을 마친 원장은 은비사를 보고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의 생각이 맞는 듯 은비사는 그의 미소에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지금 HTD 시스템 원장은 상당히 만족해 흥분해 있다.

얼굴에 살짝 홍조까지 띤 그에게 은비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다 회장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원장님의 눈과 귀와 입은 철저하게 닫으십시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싱글벙글 웃고 있던 원장은 은비사 말의 의미를 파악하자마자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고 이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오성 그룹 총수의 뜻이 담긴 일.

그렇다면 거역할 수 없는 막중한 임무.

잘못된 결정을 내뱉은 원장은 불안함에 조바심이 났지만 동시에 마음도 설레었다.

이 기회는 보통 기회가 아니다.

만약 은비사의 요구대로 내일 하게 될 자이언트 호넷의 테스트가 성공하면 앞길은 창창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성 총수가 직접 지시한 일에 대한 성공은 즉 오성 총수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도 하다.

이 생각에 원장의 얼굴엔 신념으로 가득 찼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 어리고 있었다.

그가 그 의지를 담고 은비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오성 총수 왕종철의 뜻을 완수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은비사도 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그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을 읽은 HTD 시스템 원장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회사에 갓 입사한 포부가 가득 찬 신입사원 같은 모습이었다.

“자, 이제 가보십시오. 내일을 위해 준비할 게 많으실 테니..”

은비사의 말에 원장은 가벼운 목례를 하곤 방을 나섰다.

그런 그를 은비사는 말없이 바라보며 침묵했다.

***

이른 아침.

여민 1관 비서실은 분주했다.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회의로 수석 비서관들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색과 다른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비서실 사람이 아니 국정원 사람.

바로 국정원장 김동진.

그가 여기 온 건 비서실의 아침 회의 전에 비서실장 강석민을 만나기 위한 것.

비서실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그의 얼굴은 무언가에 흥분한 듯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실장의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리자 국정원장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선 비서실장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길래 아침부터 이곳을 방문하신 거죠? 전화로 얘기하긴 곤란하다고 하셔서 내심 불안합니다.”

비서실장의 말에 멋쩍은 웃음부터 보이는 국정원장 김동진은 이내 웃음을 지우고 무언가 다급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괜히 염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사실 VIP께서 유럽 순방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보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좀 급박한 정보인 것 같아 이렇게 비서실장님께 보고를 드리게 됐습니다. 저 대신 VIP께 보고를 부탁드리려고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국정원장은 가지고 온 파일을 비서실장에게 내밀었다.

강석민은 그가 내민 파일을 받아 들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파일을 내민 국정원장 김동진이 무한할 정도였다.

살짝 기분이 안 좋아진 김동진의 표정이 변할 때 그제야 그 파일에서 눈을 뗀 비서실장이 국정원장에게 조심스레 입을 뗐다.

“믿을만한 보고서입니까?”

“아, 그게 저.. 그러니까 경찰서 IO들의 보고서가 중구난방 터무니없고 허술하기도 하지만 가끔씩은 A급 정보가 있기도 합니다. 이건 운석 도난에 관하여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이렇게 급박한 보고를 올리려는 것입니다.”

비서실장은 표정부터 심각해졌다.

국정원장의 손에 들린 파일을 낚아채듯 받아들고는 곧바로 소파로 가 앉아 파일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류를 끝까지 다 훑어 본 강석민은 내색하려 하지 않는 듯 무표정했지만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또 그 후로도 깊은 생각에 잠겨 아무 말이 없었다.

국정원장 김동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살피며 같이 심각해졌다.

운석 도난에 관한 건 극비였다.

그런데 그 운석 도난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자가 나타났다.

이건 급박한 정보이자 심각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중대한 사항이라 파악한 국정원장이 비서실장에게 결례를 무릅쓰고 보고를 한 것.

한데 그렇게 난처해하는 비서실장의 반응을 본 김동진도 이 사안이 심각한 사안임을 명확해졌다는 사실에 침울하기까지 했다.

“국정원장님. 이 보고서에 대한 것은 당분간 함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양평 경찰서 김정구 경장의 동향도 파악해 주시고 이 정보를 제공한 사람의 신변도 확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서실장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말을 내뱉자 국정원장은 난색부터 표시했다.

“그럼 VIP께도 함묵하란 말씀이신 겁니까?”

“아닙니다. 좀 더 명확한 정보가 더 필요해 보여서 그런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구체적인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후에야 VIP께 보고를 올리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만..”

대어라고 생각한 보고서의 불발이자 경중을 다루는 급박한 정보 전달의 차단.

이해할 수 없는 비서실장의 결정에 국정원장 김동진의 낯빛은 살짝 어두워졌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비서실장 강석민.

“요즘 VIP께서 일정을 마치면 하루 종일 보고서에 파묻혀 계셨습니다. 아마 지금도 순방 일정을 마치고 보고서를 보고 계실게 뻔하죠. 안 그래도 잔뜩 챙겨가셨으니까요. 그나마 성한 이도 몇 개 없는 데 그마저 다 빠질까 염려가 됩니다. 허허.”

보고서의 보고를 미루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들은 국정원장은 다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엇이든 확실한 게 좋다.

비서실장의 말도 옳았다.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보완해서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국정원장이 맘에 들었는지 그를 보며 빙긋이 웃는 강석민.

평소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나름 케미가 잘 맞았다는 생각에 김동진도 웃음으로 맞받아쳤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변하더니 강석민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농담이지만 이가 빠지는 건 비서실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 그건 어떻게 아셨는지..”

“그 자리가 영구치를 내놓는 자리라고 청와대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허허허”

“그래요? 허허허허 허.”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제 모든 일을 다 마쳤으니 다시 돌아가려는 김동진이 몸을 돌리자

갑자기 강석민이 무언가 생각난 듯 그를 멈추게 했다.

“아참. 원장님. 오성그룹 휴민트(HUMan INTelligence)에서 나온 정보는 아직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테킨트(TECHnical INTelligence)에서 나온 정보는?

“어휴. 그것도 없습니다.”

오성의 첩보에 대해 아무 성과가 없었다.

그에 따라 비서실장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국정원장은 당혹했다.

“아. 저.. 그게. 대기업 보안이 군 보안만큼 철두철미해서.. 아시다시피 모기업 X파일 때문에 화들짝 놀란 기업들이 보안에 신경을 쓴 지가 벌써 15년이 넘었습니다.

특히 오성 알앤디 센터에서도 B구역은 코민트(COMMunications INTelligence), 시긴트(SIGnal INTelligence), 엘린트(Electronic signals INTelligence), 이민트(IMagery INTelligence) 등이 모두 무용지물입니다.

그곳은 내부 통신망을 따로 사용하고 있고 모든 통신이 암호화되어 있을뿐더러 무선 송신기의 고주파, 적외선 심지어 레이저까지 완벽하게 차단되는 곳입니다.”

철옹성보다 더 견고한 오성 그룹.

정녕 그곳의 정보를 알아낼 방법은 없단 말인가?

국정원장 김동진의 말에 비서실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흠. 그럼 운석에 관한 연구 결과를 우리가 알 방법은 없겠군요.”

“송구합니다. 현재로선 블랙들을 현장에 배치해 동향을 살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근대적인 방법인 첩보 활동만이 통한다니..

허탈해진 강석민 비서실장은 얼굴에 짙은 근심이 드리워졌다.

“그.. 그런가요? 결국 그 방법 밖엔 없는 겁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장님. 우리 블랙들이 상당히 실력이 좋습니다. 한 번 믿어 보십시오. 이미 현장에 배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군요.”

자신감 넘치는 국정원장의 블랙에 대한 말은 신뢰가 가긴 했다.

하지만 그 말로는 강석민의 가슴속 깊은 불안은 가시게 하질 못했다.

이제 진짜 모든 할 일을 마친 국정원장은 다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정말 모든 일이 다 끝난 듯 비서실장도 그들 다시 부르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던 강석민의 입에서 한숨과 비슷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실력 좋은 블랙들이라.. 제발 티끌만한 정보라도 얻었으면 좋겠는데..”

***

“여보세요? 어 아이고. 우리 강아지. 밥 먹었어? 아빠 지금 회사지. 어 그래. 용돈이 급해서 전화했구나?

엄마 몰래? 하. 이걸 어쩌나.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아빠가 회사에 일이 너무 많아.”

뚝.

지금 자신의 딸과 하던 전화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긴 이 남자. 상당히 상처를 받은 듯 손에 들린 2G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는 중.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듯 서글픈 눈동자를 한 그는 쌍둥이를 임신한 것 같이 유난히 배가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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