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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_일방적인 사랑은 이용만 당할 뿐..

지금 이 순간 은비칼은 나채국과 오강심에게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도 일하는 사람인지라 무리한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진짜 멋있는 직장 상사처럼 칼출근에 칼퇴를 시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세상의 종말이 걸려 있는 지금 그런 멋진 모습은 사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중요하기에 종말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지켜야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나채국과 오강심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은비칼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서릿발 어린 시선으로 상황실 모니터에 띄운 김탄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수수하고 착해 보이는 김탄의 얼굴 때문에 마음이 다시금 살짝 흔들렸지만, 순간 눈을 감고 모든 걸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저었다.

다시 눈을 뜬 그의 얼굴엔 정말 마음을 굳게 먹었다는 듯 비장함마저 흘렀다.

‘미안해요. 김 탄 씨. 하지만 당신은 괴물이에요. 당신만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종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제가 반드시 찾아 낼 겁니다.’

***

늦은 밤 오성 알앤디 센터 B구역 분자 생물학 연구실.

모두가 퇴근한 듯 실험실 안은 한산했다.

그런데 그 텅 빈 실험실 안에서 혼자 남아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은비칼의 형 은비사의 약혼자인 한서리였다.

그녀는 혼자 청승맞게 책상에 앉아 무언가 집중하고 있는 중.

허리는 새우등처럼 굽은 체 다리는 차분하고 청순한 외모와 다르게 덜덜 떨고 있었다.

집중하느라 버릇이 나온 것.

그런 자세로 한동안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녀가 갑자기 두 손을 위로 번쩍 들어올리며 소리를 쳤다.

“아싸! 다 끝났다!”

누가 듣는 이도 없는데 대체 누구한테 보고를 하는 건지..

자축의 의미로 스스로에게 말한 것이겠지만 꼭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저러는 걸로 봐선 혼자 놀기의 대가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들어올린 두 팔을 옆으로 살짝 비틀어 몸을 풀었다.

아마도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있어 몸이 뻐근했던 모양이다.

경직된 근육을 푸는 데 스트레칭이 최고였던 듯 그녀의 몸은 한결 가뿐해져 보였다.

그런 그녀가 일이 다 끝났으면 가방을 챙겨 집에 갈 것이지 그러지 않고 책상 한 편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 시각이 몇 시 인지 확인한 것.

오후 11시 30분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스스로 집중력 끝판왕임을 자랑하듯 중얼거린 그녀가 스마트 폰에 있는 채팅앱을 켰다.

일이 끝났으면 집에 갈 것이지 그녀는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모양이다.

그녀가 친구 탭을 클릭하자 즐겨찾기 탭이 보였다.

맨 첫줄에 ‘나의 영원한 사랑’ 이라는 친구 이름이 있었다.

그 옆 프사엔 은비사의 얼굴이 박혀 있었고 그 은비사를 클릭한 후 한서리는 채팅을 하기 시작했다.

# 나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갈 것 같은데.. 집으로 올래? #

뾰옥~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다.

한서리가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방정맞게 책상을 두드렸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드디어 은비사에게서 답장이 온 것.

화사해진 얼굴로 메시지를 읽는데

# 미안. 약속이 있어서.. #

읽자마자 인상이 살짝 구겨지는 한서리.

오늘도 외롭게 혼자 잘 생각에 서글픈 그녀.

청승맞은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초췌한 모습.

대체 얼마나 피곤했던 것인지 한서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 수세미 같았고 예쁜 얼굴엔 다크서클이 짙어 커다란 눈이 더 퀭해 보였다.

그런 몰골로 청승맞은 표정을 지으니 처량함을 넘어 구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청승을 떨던 그녀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은비사에게 문자를 치기 시작했다.

# 혹시 이렇게 예쁜 여친 두고 바람 피우는건 아니겠지? #

또 늦게 답장이 올 거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제법 빨리 온 답신.

# 그런 거 아니야. 비상 시라 일이 많아. 일 때문에 잡은 약속이야. 시간이 되면 새벽에 들를게.. #

아싸!

그가 바람 난 건 아니다.

우울했던 한서리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연인으로서 정조를 지킨 은비사에게 감사하다는 듯 그녀의 스마트 폰을 가슴에 포옥 안고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새벽에 들를지도 모른다는 은비사의 답신 때문에 나온 미소.

오늘도 혼자 자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한 그녀가 다시 은비사에게 문자를 쳤다.

# 새벽 몇 시? 난 빨리 보고 싶은데.. #

# 만약 갈 수 있으면 네 시쯤 갈 수 있을 거야. 못 갈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고 있어. #

# 그래. 일 잘 봐. 오빠 사랑해. #

# 나도 사랑해. 서리야. #

연인끼리의 달콤한 문자였지만 한서리의 표정은 우울을 넘어 짜증이 난다는 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진짜 그녀가 신경질이 난다는 듯 스마트 폰을 책상 옆으로 툭 던져놓고는 고개를 책상에 콩 박았다.

그녀는 지금 절망에 빠져 체념하고 있는 중.

그 이유는 은비사의 문자 때문이다.

서리의 집에 은비사가 온다고 했지만 그는 절대 오지 않는다.

그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절망에 빠진 것.

오랜 연애 기간을 통해 은비사의 스타일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서리의 집에 못 갈수도 있다는 말은 안 간다는 말이었다.

그걸 정확히 캐치한 그녀였기에 지금 우울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섭섭한 마음에 한서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남자 진짜 어렵다. 그냥 버려버릴까? 대체 몇 년째 연애만 하는 건지. 어려워. 어려워. 칫. 간 만에 시간 좀 나서 보려고 했는데. 나빠. 은비사.”

그렇게 누가 들을 필요도 없는데도 혼자 중얼거린 그녀가 책상에 콩 박았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순간 깜짝 놀란 한서리.

그에 따라 그녀의 그 커다란 눈이 더 커져 왕방울만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 책상 바로 앞에 한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자세 그대로 그러니까, 한서리처럼 책상에 얼굴을 기댄 체로 보고 있었던 것.

그의 신상을 바로 파악한 한서리는 얼굴부터 찡그렸다.

남자는 유전체 분석 랩 동료인 권동우였다.

그냥 동료가 아닌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낸 선배였다.

현재 분과는 다르지만 자주 보는 사이로 말 그대로 친한 지인 그냥 친구 남사친인 권동우에게 한서리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내 눈앞의 시야가 가리는데 좀 비켜주지?”

김 빠진 사이다를 먹은 표정으로 말한 한서리에게 실망한 듯 권동우는 책상에서 얼굴을 떼고는 일어섰다.

“왜 그러고 있어? 한서리. 바람맞은 사람처럼..”

“어떻게 알았어? 티나?”

그녀의 물음에 권동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누가 봐도 티가 나는 자신의 처지에 풀이 죽은 한서리.

그런데 그녀를 보고 있던 권동우가 갑자기 화가 난 듯 살짝 언성을 높였다.

“으이그 또 남친한테 퇴짜 맞았냐? 그렇게 속상할 거면 그냥 헤어지는 게 낫지 않아? 세상에 널린 게 남자라고.”

위로를 못해줄 망정 태클이라니..

헤어질 거면 벌써 헤어졌다.

그녀가 지금 원하는 건 은비사와의 헤어짐이 아닌 그의 사랑.

해법이 되지 못한 권동우의 말에 한서리는 못마땅한 듯 콧바람을 흥 내쉬었다.

“시비 걸지 말고 저리 좀 비켜주지?”

퉁명스러운 그녀의 말투에 당황한 권동우가 살짝 삐친 듯 투덜거렸다.

“너도 참. 시비 걸러 온 거 아냐. 뭐 잊은 거 없어?”

“잊은 거? 뭐?”

힌트를 줬는데도 까마귀 고기를 먹었다며 얼빵한 표정만 짓고 있는 한서리에게 권동우가 유에스비 메모리를 쓱 건넸다.

“자 여기. 사진.”

그제야 무언가 생각난 듯 깜짝 놀란 한서리는 엎드려 있던 몸을 세우고는 유에스비 메모리를 받아들었다.

“벌써 내렸어? 전기영동?”

예상한 시간보다 너무 빨리 작업을 끝낸 권동우에게 놀란 서리가 묻자 그는 멋쩍은 듯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중얼거렸다.

“어차피 별 보면서 퇴근해야 하는 거지만 새벽 별은 보기 싫어서.. 내가 이 나이에 너 때문에 별 보며 퇴근해야겠냐?”

미안함에 한서리가 배시시 웃으며 애교를 떨었다.

“아. 미안해. 선배. 나중에 커피 살게.”

“그거 가지고는 안되지.”

“그럼 오삼!”

“오케이.”

겨우..

오삼이라고?

더 센 걸 원하는 줄 알았는데..

권동우가 아주 강력한 보상을 요구할 거라 생각한 한서리는 예상을 벗어난 소박한 보상 조건에 기분이 좋아 그녀도 모르게 촐싹거렸다.

갑자기 집게 손가락만 핀 두 손으로 그에게 권총을 쏘듯 제스처를 취하며

“쿨 가이~”

라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자 빵 터지는 권동우.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의 그런 모습에 한서리마저 조금 전까지 그녀를 지배했던 우울은 사라지고 화사한 웃음꽃이 피었다.

차라리 이 둘이 연인관계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한동안 계속된 그들의 웃음꽃은 광대가 아플 때쯤 멈추었다.

다시금 연구자의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 온 권동우가 궁금한 듯 서리가 들고 있는 유에스비 메모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그리고 거기에 네가 부탁한 혈청 결과도 들어 있어. 근데 누구 거야?”

“어? 아.. 비칼.”

“아~ 네 남친 동생.”

“어..”

“사적인 일이라 나한테 부탁했고만..”

“미.. 미안해. 선배.”

힘없이 한서리가 고개를 숙이자 권동우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양 어깨를 지그시 잡자 당황한 서리가 권동우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따뜻한 미소부터 짓는 권동우.

“서리야.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희생은 일방적이면 안돼. 나중에 널 아프게 할 거야. 사랑은 양방향이 되어야 해.”

그의 말에 눈동자부터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녀.

무언가 더 이상 그를 바라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아래로 턱 떨구며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 그래도 좋으니까..”

“뭐.. 네가 행복하다면야 할 말 없지. 네가 행복한 거니까..”

언제나 남자친구인 은비사를 위해 희생만 하는 한서리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권동우는 그런 그녀가 애잔했었다.

오늘도 역시나 그녀가 이렇게 밤을 새우는 것도 다 은비사를 위해서 그런 것.

그의 눈에는 그런 그녀가 불편했고 안쓰러웠으며 속도 상했다.

그래서 한 조언이었지만 친구보다는 애인이 우선인 것 같다.

권동우는 마음 한 편이 씁쓸했지만 뭐, 그녀의 결정이니 존중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를 향해 다시 미소를 씨익 짓자 그녀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쓸쓸함은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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