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_고려 태조 왕건의 친필 사인이 있었던 소중한 문화 유산

김탄은 지금 박토가 씨부렁거린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의 황당함 보다,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 황당한 소리를 마치 사실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아주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는지에 더 놀랐다.

그가 박토를 우습게 보며 비웃음 가득 담고 되물었다.

“호.. 홍 길동이요? 말도 안 돼. 그 사람 소설에 나오는 사람 아닌가요?”

김탄의 물음에 박토는 대답을 미루고 인상부터 썼다.

상당히 화가 난 듯한 그의 모습에 마음이 쫄린 김탄이 눈치를 보기 시작하자 박토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흠. 김탄. 이래서 문제야. 믿을 수 없겠지. 증명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홍 길동은 실존인물이야.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어. 물론 거기엔 도적으로만 기록되어 있지. 그러나 사실은 말이야. 홍 길동은 500년 전 바탈이야. 그리고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능력도 사실이고.. 약간 과장은 됐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걸 지금 증명할 순 없어. 우리도 우리 가문의 역사로 안 사실이니까. 그 홍 길동은 우리 가문에서 지킨 바탈이었어. 바로 조상님들의 업적이었지. 물론 실패했지만 말이야.”

“호.. 홍 길동이 바탈이라고요? 소설 속의 능.. 능력을 가진 게 사실이라고요?”

김탄이 깜짝 놀라 되묻자 박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누구나 홍길동이 바탈이라고 하면 놀랄 일이다.

혹자는 미쳤다고도 할 말.

그러나 사실이었기에 박토는 지금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맞아. 500년 전 초능력자 홍길동. 초능력을 가진 게 사실이지. 그러니까 네가 아까 500년 된 적송으로 천 년 전에 만든 우리 집안 가보를 주먹으로 내리쳐서 가루로 만들어 버린 그런 능력을 말하는 거다.”

김탄은 순간 당황했다.

홍길동이 바탈이어서 초능력을 가졌다는 사실보다 500살 먹은 적송으로 만든 천 년 전 가보인 탁자라는 소리에..

천 년 전 골동품이라면 상당한 가격이 나가는 건 당연지사.

그걸 홍길동 같은 초능력으로 가루로 내어버렸던 김탄은 지금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슈퍼컴 못지 않게 빠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만약 박 토가 김 탄에게 변상을 하라고 하면 큰일이다.

안 그래도 술집 사건 때문에 빚을 지게 됐는데 또 빚을 질 순 없다.

무조건 부정해야 한다.

이 길 밖에는 살길이 없다.

“에이. 그렇게 오래돼 보이지도 않고 500살이나 된 적송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김탄의 말에 박토의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아마도 자존심이 상해 그런 듯..

그가 김탄을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듯..

“진짜 천 년 전에 500년 된 적송으로 만든 탁자야. 그리고 이 탁자는 고려 태조 왕 건이 궁예를 축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우리 조상님께 하사한 탁자다.

게다가 탁자 상판 아래에 왕 건이 직접 쓴 글씨도 있었는데.. 김탄 너 때문에 모든 게 가루가 되었어. 우리 가문의 가보를 말이야.”

김탄은 박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심 안심을 했다.

만약 왕건의 친필 싸인이 사실이라 해도 증명할 길은 없다.

탁자는 가루가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한 김탄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눈을 말똥말똥 뜨며 박토를 똑바로 쳐다보기만 했다.

보통은 사과부터 해야 하는 일이지만 지금 김탄은 여기서 인정하면 안 된다.

인정하는 순간 빚이 늘어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런 김탄의 태도에 박토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쳐다보기만 했다.

아마도 그의 인성에 실망해서 그랬겠던 것 같다.

그렇다고 왕건의 친필 싸인을 증명할 길도 없었던 박토는 그대로 실의에 빠진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슬프고도 아픈 눈빛이었다.

김탄은 그런 그가 상당히 연기력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가슴 한 편엔 사실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보통은 윽박지르고 화를 내지만 지금 박토는 정말 실의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왕건 친필 싸인이 있는 나무 탁자는 천 년 전 보물이 맞다는 소리.

김탄이 천천히 시선을 내려 발 앞에 가루로 변한 빚더미를 한 번 쳐다보곤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흐흐. 왕 건이요? 구라 아니에요?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시는데.. 신화에서 소설로 가시더니 이제는 역사로 옮기신 건가요?”

김탄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실에 맴도는 정적.

무언가 절제되어 있었지만 살벌했다.

하나.

둘.

셋.

화가 나면 셋을 넘기지 못하고 폭발해버리는 박토의 얼굴이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무지 화가 났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대로 김탄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잠깐!”

어디선가 애절한 목소리가 들리자 김탄과 박토가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를 박월이 종이 쪼가리 하나를 들고 흔들며 웃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박토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박월은 촐랑대며 김탄에게 다가와 종이를 내밀었다.

김탄이 그 종이를 쳐다보자 박월은 기쁨에 넘치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 바탈 아저씨 이걸 보세요!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기증해달라고 요청한 문서예요!”

박월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김탄.

사실이 아닐거야 라고 속으로 되뇌며 서류를 훑어보는데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보낸 문서가 맞았다.

그리고 진짜 왕건의 친필 싸인은 사실이었다.

-내가 역사의 흔적이 담긴 바로 왕건의 손길이 직접 닿았던 소중한 문화 유산을 부쉈다니.. 이럴수가..-

이 사실에 눈앞마저 캄캄해진 김탄은 그대로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올해 들어서 무슨 마가 낀 건지. 악재는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했는데. 하나의 악재가 끝나니 또다른 악재가 덮치는 꼴이다. 제기랄. 이젠 벌어 논 돈도 모자라 미래의 자산까지 빚으로 변하는 순간이구나!-

이 순간 김탄은 바룬족에게 배상해야 할 액수가 걱정이 됐다.

오래된 문화유산이라면 상당한 가격이 나가는 건 기정 사실.

김탄은 문화재 감정가도 아니지만 확실하게 고가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시.. 시.. 시가 어.. 어.. 얼마나 되.. 되.. 되.. 되나요?”

상당히 바들바들 떨리는 음성이었지만 조심스러웠다.

이제는 완전 을로 변한 김탄.

박토의 입에서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나오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한편 김탄의 물음에 박토는 답이 없었다.

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자세 팔짱을 끼고는 가루로 변한 탁자를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표정은 심각해져만 갔다.

그의 모습에 심장이 더욱더 쪼그라드는 김탄.

이제는 흙빛이던 얼굴이 파랗게 변해버렸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탁자야. 아마 그때 1억을 준다고 했던 것 같아. 20년 전이었는데.. 지금 시세로는 10억 정도 가겠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린 박토의 말에 김탄은 숨부터 턱 막혀왔다.

-10억이라니..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저번에 진 빚 때문에 가진 돈도 없기에 완전 거지였던 김탄.

그가 10억이라는 돈을 변상하려면 앞으로 20년은 종살이를 해야만 변상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난처하다. 정말. 조금만 깎아주면 좋겠네..-

일단 김탄은 박토에게 사과부터 했다.

정말 진심을 다해..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아니, 뭐.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까진 없어. 조상님에게 면목은 없지만 우리 집 가보를 함부로 쓴 우리도 문제가 있지.”

박토의 발에 김탄은 가슴부터 쓸어내렸다.

지금 이 소리는 그 사고를 그냥 넘어가겠다는 소리.

순간 김탄은 박토가 생각보다 참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여태까지 잘못 판단한 건지도 모른다.

“정말요? 아, 정말 고마워요. 정말 좋은 분들이군요. 어떻게 변상해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그런데 박토의 표정이 살짝 언짢다는 듯 변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정신병자 싸이코 같은 사람인데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그의 표정에 불길함을 읽은 김탄은 지금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았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김탄을 본 박토는 상당히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으로 입을 가린 체 헛기침을 했다.

무언가 어색한 말을 꺼내거나 난처한 말을 하기 전 제스처다.

그런데 박토는 김탄이 아닌 박월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팔천이면 되겠지?”

그때까지 말 없이 박토를 지켜보던 박월의 어두웠던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기쁨에 넘친다는 듯 밝은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토가 말한 팔천에 호응한다는 뜻.

이 순간 김탄은 깨달았다.

‘파.. 팔천? 뭐지 이건? 변상액을 말하는 건가?’

-10억은 아니지만 팔 천만 원도 너무 많다. 한 푼도 안 받을 것 같더니 받으려고 하네..-

확실한 건 아니지만 팔 천이란 숫자가 김탄이 물어야 할 변상액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낀 김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가루로 변한 팔 천만 원짜리 탁자를 허무하게 쳐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변상액은 아니지요?'라는 표정으로 박 토를 쳐다보자 그가 교활하게 씨익 웃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김탄.

그를 향해 박토가 냉정하게 다그쳤다.

“팔천이야. 빨리 변상하길 바래. 정말 인심 써서 많이 깎아 준거야.”

박토 집에서 도망치려 했던 때보다 심장 박동이 더 빨라졌다.

총격 전 총알이 스치던 때보다도 심장이 사정 없이 더 쿵쾅거렸다.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채무. 정말로 눈앞이 캄캄한 게 이거구나. 말로만 들었던 건데 이게 진짜구나.-

이 모든 걸 실감하고 있던 김탄은 현기증마저 일었다.

변상 액수가 무려 팔천.

물론 10억은 아니지만 이 액수는 김탄이 로또에나 당첨 되야 해결할 수 있는 능력 범위였다.

“네? 그게.. 하지만 전 그렇게 큰돈이 없어요.”

연민을 한 번 베풀라 김탄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박토에게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버럭 내지른 성질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당장 갚으라고! 힘들어서 할부로 하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마. 방법은 하나 있어. 그건 여기 남아서 바탈이 되는 거야. 그럼 없었던 걸로 해줄 테니까.”

“갑자기 그러시면.. 지금 제가 가진 돈이 어디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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