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_죽는 게 싫고 또 죽으면 미안하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비사가 부탁하지 않았으면 오지 않았을 거야. 너네 다시 비상이라 시간 내기 힘들다며 나보고 가보라고 부탁하더라. 너 이뻐서 온 거 아니다.”

오늘 예정이었던 검사 날짜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은비칼.

그래서 한서리가 직접 방문했던 것.

그 사실에 은비칼은 당황하기만 했다.

-이게 다 나채국 씨와 오강심 씨 때문이다.-

드론과 콘서트 티켓이 아니었다면 약속을 어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은근슬쩍 부하가 치밀은 은비칼은 그들을 탓해 봤다.

하지만 그런다고 서리에게 미안한 건 해소되지 않는다.

그가 이렇듯 시무룩해 할 때 한서리는 한 손에 들린 케이스를 책상 위로 올려놨다.

은비칼은 한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무룩한 얼굴이 경직 되며 완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한서리가 케이스 뚜껑을 열자 그 안에 들어 있는 채혈 도구들이 보였다.

무시무시한 주사 바늘을 본 은비칼은 덜덜 떨며 오른팔을 서리에게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자 한서리는 손에 라텍스 장갑을 끼고 은비칼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덜덜 떨고 있는 은비칼.

그를 본 한서리는 한심하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비칼이 오늘 따라 유독 떠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그런데 왜 그래?”

“아니. 그냥.. 나도 모르겠네. 왜 이러는지..”

은비칼의 대답에 싱겁다는 듯 코웃음을 친 한서리는 비칼의 팔에 토니켓을 묶었다.

그리고 정맥을 찾기 위해 손으로 찰싹 때리자 상당히 아프다는 듯 미간을 심하게 찌푸리는 은비칼.

“어우. 살살 해. 누나. 검사 날짜를 잊어버려서 미안해.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분명 사심이 들어간 한서리의 정맥 찾기였다.

다 큰 어른의 엄살이 아닌, 진짜 아팠던 은비칼은 그녀의 감정 섞인 정맥 찾기에 약속을 잊은 것에 급하게 사과를 했지만 그녀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꾸 없이 소독 솜으로 팔 안쪽을 문질렀다.

대화가 급 단절된 조금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자 불편했던 은비칼은 곁눈질로 한서리의 표정만 살폈다.

순간 은비칼과 눈이 마주친 한서리.

정말 심통이 났다는 듯 볼이 불룩해졌다.

“급해서 채혈만 하는 거야. 나중에 시간 나면 까먹지 말고 센터로 와 나머지 검사받아.”

-역시 화가 난 거구나. 그렇다고 대놓고 세게 때릴 것 까지야.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야. 서리 누나가 이렇게 차갑다니..-

은비칼은 미래의 형수가 될 한서리의 새로운 모습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며 미소가 끊이지 않았던 그녀였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다른 때와 달리 차갑고 심술맞다.

왜 그럴까?

은비칼은 정확히 한서리가 심통 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까 말했듯 그가 한 달에 한 번 하는 정기적인 검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때문이었다는 걸 말이다.

한서리가 은비사의 약혼자라는 친분이 아니었다면 중요한 검사를 놓칠 수도 있었던 일.

이렇듯 은비칼에게 그녀와의 친분 관계는 고마운 것이었지만 한서리에게는 번거로운 것이었다.

그녀는 분자생물학 연구자로서 바쁜 와중에 개인적인 시간을 빼앗게 만든 은비칼이 제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의 동생이라도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은비칼을 대하는 태도가 지금까지 쌀쌀맞고 심통이 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은비칼은 지금 섭섭하기만 했다.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미래에 도련님과 형수 사이가 될 텐데.. 조금 희생하고 살갑게 대해주면 좋지 않을까?-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머릿속으로만 피력했지 입 밖으로는 절대 꺼낼 수 없었던 은비칼.

만약 그랬다간 죽음이다.

“시간 빼앗아서 미안해. 누나. 다음부턴 잊지 않을 게. 근데.. 형이랑은 대체 언제 결혼할 거야? 우리 형 낼모레 마흔이라고.. 누나가 노총각 좀 구제해줘야지.”

일단 후퇴하고 보는 은비칼.

그 대신 그녀의 약점을 훅 건드렸다.

즉, 형과의 결혼을 절실히 원하는 한서리의 조급한 마음을 건드린 것.

이건 한서리가 을이라는 위치를 다시 상시 시킨 것이다.

살짝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은비칼은 승리의 미소를 아무도 모르게 살짝 지어봤다.

어쨌거나 급한 건 한서리다.

은비칼의 말에 채혈 튜브에 비칼의 이름과 날짜를 적고 있던 한서리는 그 행동을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듯 미동 없는 그녀.

상당히 깊은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괘.. 괜히 건드렸나?-

심통이 난 얼굴에서 슬픈 얼굴로 변한 한서리를 본 은비칼은 지금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냥 던진 말에 상당히 아파하고 있는 한서리였다.

그녀가 생각을 마친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은비칼을 쳐다보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더 늙어버린 듯한 그녀의 모습에서 은비칼은 혼기 놓친 노처녀의 한이 어떤 건지 알 것도 같았다.

은비칼은 지금 이순간 그녀가 참 어색하기만 했다.

비칼은 어릴 때부터 한서리를 봐왔었다.

그러니까 6살 꼬꼬마 시절부터 봐 온 사이.

처음 봤을 때 중학생이었던 그녀는 지금 서른 중반을 향하고 있었다.

앳되고 예쁜 얼굴은 다 사라지고 작년보다 더 늘어난 주름에 이제는 피부의 탄력도 예전만 못해 보였다.

오늘 따라 유난히 그녀의 늙음이 더 눈에 들어왔던 은비칼은 왜 둘이 결혼을 빨리 안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시집 가. 형한테.. 아무리 약속된 사람이라도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맘이 편한 거니까. 우리 형도 할아버지 되기 전에 제발 구해 주라. 누나.”

은비칼의 말에 더욱더 초췌한 얼굴로 변해 버린 한서리가 체념한 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에휴. 그러지 않아도 내가 엄청 조르는데 안 해주네. 나도 조금 있으면 마흔인데.. 너네 형 나쁘지?”

“아니, 그렇다고 우리 형이 그렇게 나쁠 것 까지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꼬박꼬박 챙겨 먹으라는 약병은 바닥에 뒹굴 거리고 검사 날짜는 까맣게 잊고 있잖아. 네가 이렇게 칠칠치 못한데 비사 오빠가 맘 놓고 나한테 장가를 오겠니?”

-뭐라고? 칠칠치 못한 나 때문에 형이 결혼을 미루고 있는 거라고? 이건 뭐 노처녀 히스테리도 아니고,.-

예고없이 그냥 훅 들어오는 한서리의 말에 은비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휴. 겨우 그런 거 때문에 형이 결혼을 안 한다고?”

한서리는 은비칼의 어이없다는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냥 인상을 확 구기며 주사 바늘을 추켜올리고는 그대로 은비사의 팔에 꼽았다.

“아야.”

상당히 아팠는지 은비칼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한서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엄살은. 한두 번 바늘에 꼽혔던 것도 아니면서..”

“엄살은 아니야. 정말 아팠다고.”

“정말? 주사 바늘이 아팠다고? 진짜 아픔이 무언인지 가르쳐줄까?”

“아니, 안 아팠어. 단지 그냥 싫어서 그랬네.. 하하.”

은비칼은 지금 한서리의 성질을 건드렸다간 진짜 아픔이 무언인지 가르쳐 줄 것 같은 그녀의 태도에 주눅이 들어 진짜 아팠지만 대충 얼버무리고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날이라 날카로운 건가? 물어 보고 싶지만 성희롱이기에 물어볼 수도 없다. -

억울하지만 그냥 참기로 결정한 그는 순순히 아픔을 잊고 그녀의 주사 바늘에 팔을 맞긴 채 눈물을 찔금거렸다.

그때 또 다시 한서리가 은비칼에게 훅 치고 들어오며 냉랭하게 말을 내뱉었다.

“싫어도 계속 주사 바늘에 찔려야 해. 왜냐하면 네가 나아야 모두가 행복해지니까. 그리고 나도 결혼할 수 있고..”

깜짝 놀란 은비칼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한서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은비칼이 쳐다보고 있는데도 일부러 그의 시선을 외면하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채혈 튜브에 피가 차는 걸 보고만 있는 그녀는 분명 원망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쓸쓸한 눈빛이 은비칼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녀의 외로움의 원인이 자신때문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형과 지금 눈 앞에 앉아 있는 한서리의 결혼이 늦어지는 이유를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로 처음 알았던 비칼은 마음이 아팠다.

결국 그가 가진 지병 때문에 결혼을 미루고 있는 게 아니라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버린 은비칼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원치 않는 희생을 하고 있는 예비 형수인 한서리에게 그는 딱히 뭐라 위로해 줄 말이 없었다.

모두 그가 병을 완전히 낳아야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님 어떤 신의 도움 같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은비칼은 제 스스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에 그대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도와 줄 수 없어. 미안해. 누나. 나도 내가 아픈 게 싫다.-

***

“싫어요.”

김탄의 대답은 정말 단호했다.

처음 보는 강단 있는 그의 모습에 박토가 당황을 한 건지 아님 스트레스를 받은 건지 눈가가 떨리다 못해 거칠게 경련까지 했다.

“뭐? 싫어?”

“네. 싫어요. 제가 왜요? 전 머리도 나쁘고 운동신경도 없어요.”

여전히 바탈 제안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김탄.

그는 절대 그 제안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듯 아주 두 눈을 부라리며 박토를 노려보기까지 하고 있다.

더 이상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박토는 할 말을 잃었고 뜻대로 되지 않아 성질이 난 그도 김탄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먼저 눈을 깜박이면 지는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둘 사이의 눈으로 싸우는 신경전이 참으로 대단하다.

살벌하기까지 한 둘의 눈싸움을 옆에서 지켜보던 박월은 이 분위기를 만든 원인인 박토가 싫었다.

달래고 얼러도 모자랄 판에 강요를 하는 몰상식한 삼촌의 안하무인식 방법에 치를 떨고 난 후 그는 마치 모든 걸 체념한 듯 혀를 한 번 끌 찼다.

아마 삼촌이 자상해 지는 것에 대해 포기를 한 듯.

그런 박월이 타이르듯 김탄에게 말을 걸었다.

“바탈 아저씨. 그래도 상관없어요. 운동 신경은 훈련하면 좋아지고 또 바탈이 되면 저절로 해결돼요.”

그 순간 박토는 깨달음을 얻었다.

-박월 말이 맞다. 훈련하면 운동 신경은 향상된다. 게다가 바탈이 되면 더욱더 향상된다. 그러니 무조건 바탈이 되면 문제는 해결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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