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_ 납치당한 김탄이 깨어나다.

박토의 치졸한 말에 박월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이건 무지막지 화가 났다는 뜻이다.

평소 같으면 박토가 이럴 때 할아버지가 보호하며 복수를 해줬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곁에 수호자는 없다.

서러움에 감정이 북받친 박월이 두 주먹을 불끈 움켜 쥐고는 박토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무슨 소리야? 그건 불가능해! 반은 번호고 반은 글로 쓰는 거야!

번호 찍는 걸 다 맞아야 50점이라고! 삼촌도 50점은 힘들어!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나이 많은 거 티 내는 거야?”

박월의 공격이 심상치 않았다.

월의 말에 박토의 표정은 굳어졌다.

바로 나이 많은 거 티 내냐는 말.

바로 그 말 때문이었다.

박토는 29살. 박월은 8살.

나이 차이는 21살이 났다.

말 그대로 아저씨 뻘.

둘이 같이 외출을 하면 박토가 아빠냐는 소리도 들었다.

진짜 아빠는 아니지만 그것도 맞는 말.

박토는 박월의 생부는 아니지만 아빠로서 월의 양육과 교육을 담당했다.

지금 박토는 키운 은혜도 모르는 저 배은망덕한 조카의 되바라진 말투에 기분이 상해 있었다.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저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겠어.

작은 아버지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싸가지가 없어지면 나중엔 더 곤란하다!-

결심을 한 박토는 그 누구 하나 걸림돌 없는 이 때가 바로 하늘에서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

그가 살벌한 표정으로 안면몰수를 하고 월에게 소리를 쳤다.

“이 자식이 삼촌을 뭘로 보고! 삼촌은 너처럼 그렇게 공부를 못하지 않았어! 가서 숙제나 해! 빨리. 박 월 초등학생!”

이러면 보통 초딩들은 눈물을 찔금거린다.

약자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또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월은 여는 초딩과 다르다는 듯 갑자기 박토 품에 매달려 촉촉이 젖은 눈으로 애교를 부렸다.

마치 한 번만 숙제를 건너 뛰게 해달라 말하는 듯 했다.

이건 선생님께 부탁해야지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박토.

-다 저 바탈 때문이겠지. 바탈이 깨어나는 걸 보고 싶은 거니까.-

또 그렇게 애교를 부리는 박월이 너무 귀여웠지만 오늘 그에게 휘둘리면 앞으로 영원히 휘둘리게 될 것이다.

-그럼 피곤해서 안 된다. -

박토는 월의 시선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그러자 박월이 5살 난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 아앙! 삼촌! 쫌만 더 구경하면 안 돼? 아아 아아앙.”

떼쟁이의 공격의 방어는 외면.

박 토는 곧바로 월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그래도 박월의 애절한 목소리는 방 안에 계속 울려 퍼졌다.

“십분 아니 오분 만. 삼촌.”

“응. 안돼!”

완전 단호한 박토.

철벽도 이런 철벽이 다 있을까?

지금 박월은 그를 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삼촌이라고 생각했다.

-몰인정한 삼촌! 괴팍한 삼촌! 악당 같은 삼촌!-

뭐 이런 생각들을 가득 담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없는 이 시점에 박월은 처절한 을의 입장.

그가 바룬족 서열 1위로서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때는 현재 오직 바룬족 수장인 그의 할아버지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순간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 박월은 시무룩해졌다.

그는 지금 숙제를 내준 학교 선생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놀기도 바쁜데 숙제까지 내주다니.

잔인하다.-

이 생각에 마음이 무지 무지 아파 온 박월.

그는 눈물을 삼키며 숙제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바탈이라는 신기한 구경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 그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경계인 삼도천을 건너기 전 심정으로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체 뒤를 돌아 김탄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죽은 듯 누워 있는 바탈 아저씨.

그가 깨어나는 걸 보는 건 요원하게 되어버렸다.

박월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바탈이 깨어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밥도 대충 먹고 세수도 눈곱만 뗐다.

그런 모든 기다림에 대한 수고가 물거품이 됐다는 생각에 아쉬움 가득 담은 마음으로 김탄의 얼굴을 쳐다 봤는데 순간 김탄의 눈이 움찔거렸다.

“어? 움직였어!!”

화들짝 놀란 박월이 소리치자 박토가 되물었다.

“뭐? 뭐가 움직였다는 거야?”

“눈.”

“뭐? 눈?”

삼촌이 김탄의 눈이 움직인 걸 보지 못했나 보다.

답답함에 박월이 손가락으로 김탄을 가리키며 다시 소리쳤다.

“저 바탈 아저씨 눈이 움직였다고! 깨어났나 봐!”

“그래?”

이렇게 기쁜 소식이.

자신의 발길질에 김탄이 황천행으로 가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던 박토는 기대감에 들떠 김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김탄은 박월이 뻥을 친 건지 전혀 움직임이 없는 걸 떠나 기척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숙제하기 싫어 뻥을 친 거 같다.-

이렇게 의심의 마음이 든 박토가 속을 꿰뚫어 본다는 것 같은 눈빛으로 박월을 째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박월의 표정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세상만사 찌들어 속내를 숨기는 어른이 아닌 아이인 월은 감정을 숨길 수 없다는 걸 박토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 박월의 표정으로 보자면 정말 진실함 그 자체.

그렇다면 김탄의 눈이 움직인 건 사실일 확률이 높다.

박토가 김탄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붙어 앉았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김탄의 얼굴과 박토의 얼굴이 떨어져 있는 간격이 겨우 10CM 정도 될까?

아무튼 그 상태로 박토가 김탄을 유심히 살폈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는 깨어날 기미조차 없었을뿐더러 그저 의식 없는 시체 같기만 했다.

그 순간 박월에게 속았다고 판단이 든 박토는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안 그래도 바탈을 죽인 가문의 역적이 될 상황이 될 지도 몰라 가슴 졸이던 박토였다.

그런데 자꾸 하라는 숙제는 안 하고 거짓말을 한다라..

-이 자식이..

자꾸 삼촌을 속이려 드네.-

박토는 신경질이 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그 얼굴로 고개를 돌려 월을 바라보자 월이 다시 다급하게 소리쳤다.

“진짜야. 진짜라니까! 가짜면 진짜로 또티 티비 끊을 게!”

그가 이렇게 얘기 한다면 김탄이 눈을 움직였다는 건 진실.

박월이 또띠 티비를 건다는 건 모든 걸 건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토는 박월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박월은 8살 아이치곤 상당히 약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토가 화가 난 듯 의심의 눈초리로 박월을 째려보기만 하자 갑자기 박월이 깜짝 놀란 듯 김탄을 가리키며 다시 소리쳤다.

“삼촌! 진짜야! 봐 봐! 바탈이 깨어났다고!”

-뭣이라?

바탈이 깨어났다고?-

박토가 그대로 고개를 돌려 김탄을 쳐다보았다.

월의 말대로 눈을 뜨고 있는 김탄.

죽지 않고 살았다.

그 사실에 바탈을 죽인 가문의 역적에서 벗어나게 된 박토는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소리쳤다.

“이야! 깨어나서 고마워. 바탈!”

한편 김탄은 지금 자신이 저승세계에 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처음 보는 낯선 풍경.

저승 세계가 아니면 볼 수 없지 않은가?

눈 앞에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한 남자.

나를 반기는 그는 누구란 말인가?

김탄은 그대로 눈알만 돌려 주변을 스캔했다.

지옥인가?

천국이라고 치기엔 너무 꼬질한 풍경이다.

아, 내가 살아생전 너무 잘못 살았기에 이곳에 떨어진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편 없는 방이었다.

처음 눈에 들어 온 건 검은색 바탕에 자개 무늬를 한 네 짝 장롱이었다.

이건 1980년대나 볼 법한 비주얼.

오래된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 장롱 옆으로 도배한 지 오래돼 보이는 벽의 색깔이 참신했다.

다시 눈을 돌리니 자신의 발 앞 쪽 벽에 서 있는 5단 서랍장.

너무 오랜 된 건가?

아님 누가 발로 찬 건가?

손잡이 몇 깨가 떨어져 나가 없었다.

대체 저러면 서랍은 어떻게 열지?

그 서랍장 위로 숫자가 아주 크게 인쇄된 농협 달력이 걸려 있었다.

5월이라는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다시 눈알을 돌려 옆을 보았다.

단발머리를 한 꼬마 여자 아이가 신기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만 보면 천사가 맞는 것 같은데 왜 꼬질한 곳에 있는 거지?

김탄은 다시 눈알을 돌려 바로 위에서 환한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는 박토를 쳐다보았다.

순간 뇌혈관이 터질 듯한 두통.

갑자기 번개처럼 스치고 떠오른 한 장면.

박토의 화난 얼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낯익은 박토의 얼굴에 혹시 아는 사람인지 기억을 더듬던 김탄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몸부터 반응한 다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

보름달이 뜬 밤하늘과 권총을 들고 자신을 조준하던 박토의 얼굴.

그리고 총격전과 자신의 배를 발로 차던 박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극 초음속의 속도로 스쳐갔다.

-나를 죽이려던 자다!!-

그 사실에 김탄은 유령을 본 듯 얼굴이 공포에 질려 하얗게 변했고 그에 따른 괴성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악!”

***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

자꾸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소리에 짜증이 난 신우 프로텍 작업 반장인 김성식.

그가 신경질이 난다는 듯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액정 화면에 김탄의 이름이 떠 있었고 그걸 한참 노려보던 반장은 다시 발신 버튼을 누르려다 관뒀다.

“이 녀석, 이런 적이 없었는데.. 10분 전엔 항상 도착하던 녀석이. 어디 잘못됐나?”

반장의 중얼거림 대로 김탄은 정말 정확한 사람.

항상 10분 전에 도착하던 그가 보이지 않자 조급증이 나서 그에게 전화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혹시나 왔을까 고개를 들어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보고 싶은 김탄은 보이지 않고 세네갈 출신 외국인 노동자 코피가 눈에 들어왔다.

“어이, 코피! 영식이 불러!”

반장은 김탄의 행방을 가장 잘 아는 자는 영식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코피에게 대리 출결 확인을 시키려 했던 것.

한편 이 사실을 모르는 코피는 아침부터 반장이 부르는 소리에 덜컥 겁부터 집어 먹었다.

작업 시작 전 반장이 영식을 찾는 다는 건 그가 또 사고를 쳤다는 게 분명하다 뜻이기 때문이다.

작업장의 평화가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에 코피는 다급한 마음으로 반장에게 달려왔다.

“영식이요? 아직 안 왔는데요?”

코피의 말에 반장은 얼굴부터 구겼다.

심히 불쾌하다는 뜻.

그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작업 시작 2분 전.

그런데 아직 오지 않았다라.

코피는 그런 반장의 표정을 보고 오늘 하루는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대체 영식이 무슨 사고를 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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