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촛불 아래에서 광란의 춤만 아니었더라면, 엄마와 동생이 불구덩이 속에서 처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신보살을 향한 원망은 오랫동안 풀어지지 않고 계속됐다.

신보살과 같이 살고 있던 젊은 여자의 몸에 잡귀가 붙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여자는 보름날이 되면 가라앉아 있던 악마의 본능이 활활 살아났다고. 그러다 벌거벗고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일이 빈번해졌다. 보고도 믿기지 않은 광경이었다. 좀처럼 신보살이 살풀이 굿을 해봐도 소용이 없던 젊은 여자의 광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젊은 여자가 무슨 인연으로 신보살과 함께 살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갈수록 그녀의 앓는 소리는 담을 넘어 들려왔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신보살은 그런 그녀를 신을 모시는 애제자로 만들어보겠다며 온갖 비방을 사용한다고 했다.

신보살이 산 기도를 떠나던 날 밤, 몹시 바람이 불었다. 그 사이 법당에 갇혀 지내던 젊은 여자가 법당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불꽃은 혀를 날름거리며 온마을을 순식간에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바로 옆집에 살던 엄마와 동생은 그날 화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지내고 있어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요셉 신부의 소개로 서울 화가의 집에서 지내며 그림을 배우고 있던 것이다. 화가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엄마한테 그 마을을 떠나 살자고 졸랐었다. 그런데 엄마는 혹여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이 떠났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실망하겠냐며 한사코 거절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이젠 아버지가 왜 우리 곁을 떠나야만 했는지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넌 영락없이 아버지를 쏙 빼닮았지 뭐냐. 그래서 우리 딸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했다. 지언아, 독해야 산다. 독해야만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어. 아버지는 몸이 아파서 외딴섬에서 살고 있단다. 먼 남쪽 바다 끝에 있는 요양원에 있지. 요셉 신부님을 통해 간간이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있구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떠난 거야. 가족이 불행해지는 걸 지켜볼 수 없었던 거야.”

“아버지가 어디가 아픈가요?”

“몹쓸 병에 걸려 많이 아프단다.”

엄마는 아버지의 고향이 제주라고 알려줬다. 고향이 제주였던 아버지가. 어떻게 충청도에서 흘러들어와 엄마를 만나게 되었는가를 말하려다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때가 되면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이란 말을 되풀이했다.

그게 엄마와의 마지막 밤이었다. 엄마와 동생은 새까맣게 타버린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두 모자의 시신을 강제로 떼어내야 할 만큼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고. 그 말을 전해 듣고 오열했다. 신문에는 ‘불길 속의 모정’이란 타이틀로 사회면을 크게 장식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그 기사를 읽고 살아있는 모성애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엄마의 그 천주는 어디로 갔단 말인지. 화염 속에서 울부짖었던 그들의 울음소리를 과연 신은 듣지 못했단 말인지. 그 후로 나는 신을 외면했다. 모두가 엄마와 동생의 죽음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엄마와 동생의 장례식을 도와주었다. 공동묘지에 묘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줬고, 조그만 비석도 세워 엄마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장례식은 요셉 신부의 집전되었고, 입관식을 할 무렵, 나는 그만 기력을 차리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의식이 돌아와 눈을 떴을 땐 성당 안이었다. 요셉 신부의 슬픈 눈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있었다.

엄마와 동생의 죽음이 매스컴을 타자, 각지에서 생필품과 후원금을 보내왔다. 마을 사람들은 당장 천막을 치고 살아야 할 형편이었다. 국유지였던 동네의 땅을 지분으로 분할받았으며, 새로 지어도 된다는 승인이 떨어졌다. 여론 때문에 특혜를 준 것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예전의 그대로의 형태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주민 모두가 현대식 구조의 집을 지을 형편들이 못됐다.

요셉 신부는 위로금이 든 통장을 내밀었다. 나는 통장을 가방 속에 쑤셔 넣으면서, 독해야 산다던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요셉 신부의 말을 듣고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요셉 신부의 도움은 절대적이었으며, 대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요셉 신부의 후원이 있어 가능했다.

엄마가 누워있는 봉분 한쪽 부위가 푹 꺼져 있었다. 칡덩굴과 아카시아 뿌리가 묘지를 감지 않아서 그나마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애 장터에 묻었던 당시의 풍습과는 달리 동생은 엄마와 함께 묻혔다. 엷게 퍼진 햇살과 바람 한 점 없는 하늘, 겨울 철새가 몰려와 지절댔다. 나는 묘 주변을 돌며 술을 부었다.

“엄마, 나왔어. 그동안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올 수가 없었어. 잊고 살고 싶었어. 엄마는 알고 있지? 내가 얼마나 요셉 신부를 사랑하는지. 독해야 산다고. 엄마가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허물어졌을지도 몰라.”

엄마의 얼굴과 어린 동생의 검은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나는 참았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성당을 나서던 날이었다. 요셉 신부는 내 손을 꽉 잡고 한동안 울먹였다. 비아의 후원자라고 말하던 요셉 신부는 눈물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을 애써 피하려고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신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요셉 신부는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신의 큰 뜻을 어찌 알겠니? 천주님의 뜻을 알게 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날이 오면 새로운 희망이 생겨날 것이란다. 기도 끝에 천주의 목소리를 들었지. 널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목소리였어. 천주는 우리가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을 주신다고도 했지. 비아!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지켜줄 거야.”

요셉 신부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은, 호의를 받아 줄 만큼 아량이 남아 있지 않은 탓이었다. 내 나이 겨우 스무 살이었다.

엄마의 봉분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는 병에 남아 있던 술을 모두 마셨다.

“엄마, 나의 삶이 힘들었던 것을 두고 남의 탓이라고 구차스러운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어.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 참 이상하게도 내 얼굴 속에 엄마의 얼굴이 보여. 그 흔적을 화장으로 지워내려고 해도 점점 닮아가고 있지.”

쌍꺼풀이진 두 눈에 어린 물빛과 희고 작은 입술이 엄마와 똑같아지고 있었다. 고단했던 엄마의 인생을 답습하고 싶진 않았다.

긴장했던 몸이 느슨해지면서 긴장이 풀렸다. 모처럼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햇살이 얼굴 위로 내려와 앉았다. 새 소리, 바람 소리에 이어 기차가 철길을 지나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뭉클하고 시린 바람이 가슴으로 치고 들었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가 점점 기울고 시작했다. 한기가 느껴져 살갗이 오소소 일어났다. 그제야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긴 머리카락을 한곳으로 모아 밴드로 묶었다. 그때, 엄마 곁에 낯선 봉분이 보였다. 엄마의 묘지와 너무 가까운 위치였다. 묏자리를 쓰려면 최소한의 거리를 두어야 했음에도 그렇게 가깝게 쓴 것이, 참 의아했다. 그곳도 봉분이 잘 관리되어 있었다. 혹시 아버지의 묘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사를 전혀 알 수가 없었던 아버지였다. 요셉 신부에게서도 아버지와 관련된 그 어떤 소식을 전혀 듣질 못했고, 잊고 지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다소 힘들었다. 구두를 신고 있어 경사진 곳에서 몸이 휘청거렸다. 겨우 큰 도로 가장자리로 나왔다. 지나가는 차도 없었고 주변에는 민가조차 없어 한적했다. 10여 분 정도 길을 따라 걸었다. 그때, 멀리 강변식당의 간판이 보였다. 식당 앞에 택시가 한 대가 주차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번호가 익숙했다. 청주 공항에서 타고 왔던 그 택시가 분명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여기 계세요?”

“아, 그 여자 손님이시군요. 배터리가 다 되었지 뭡니까?”

택시 기사는 매운탕을 국자로 뜨고 있었다.

“그 남자 손님은 떠나셨어요?”

“방금 식사를 마치고 저기 강변 쪽을 산책하고 있어요. 다행히 그 손님이 양해해주어서 카센터 직원을 기다리며 식사를 하던 중이었죠.”

“차를 고치면 기차역까지 태워다 주실 수 있나요?”

“카센터 직원이 와야만 알 수 있어요. 다행히 배터리만 나가면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식당 밖으로 나온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그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저기요?”

말없이 그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초점 없는 눈빛이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그는 여전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배터리 고칠 때까지, 식당에 들어가 술 한잔하실래요?”

그제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매운탕을 추가로 주문할까요?”

남자가 먼저 주인장에게 음식과 소주를 주문했고, 택시 기사까지 합석했다.

“뭣하시지는 분들이세요. 이렇게 앉아서 식사까지 했으니 통성명합시다. 저는 박일수입니다.”

기사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나와 남자에게 건넸다.

“저는 한정수라고 합니다.”

“저는 이지언이라고 해요.”

“두 분은 여행 중이가 보죠?”

택시 기사의 말에 구겨진 양복과 나는 동시에 피식 웃었다. 그의 이름은 한정수였다. 평범한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이름만큼은 특별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나이는 어떻게 되셨어요? 한국 사람은 통성명이 끝나면 의례적으로 나이를 묻지 않습니까? 저는 마흔을 겨우 넘겼어요.”

“저는 사장님보다는 몇 살 아래입니다.”

한정수가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그럼 이쪽 아가씨는요?”

“기사 아저씨 보단 한두 살 더 위입니다. ”

“저보다 한참 아래로 생각했어요. 요즘 여성들의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어요.”

“말씀을 기분 좋게 하시는군요.”

“하시는 일은?”

“저는 한때 그림을 그렸어요.”

지난날 내가 붓을 잡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였던 구겨진 남자가 관심을 보였다.

“아, 그러셨군요. 어쩐지 풍기는 이미지가 남다르더라고요.”

구겨진 남자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며 내게 건넨 말이었다.

“두 분이 상상하는 그런 화가는 아닙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시나요?”

“유명화를 카피하는 직업이었죠.”

“자신을 너무 격하시키네요.”

한정수는 입가에 미소를 살짝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한정수와 시선과 마주쳤다. 잠깐이었지만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곳은 누구의 무덤입니까.”

굵직하면서도 비음이 약간 섞인 목소리로 구겨진 남자가 질문을 해왔다.

“보셨어요?”

“일부러 보려고 한 게 아닙니다. 산에 오르다가 우연히 보게 됐어요.”

“엄마와 어린 동생입니다.”

“묏자리가 참 좋아 보였어요. 앞으로 물이 흐르고 있고, 뒤로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어서 누가 봐도 명당이었어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엄마의 묘를 괴고 누워 중얼거리는 모습까지도 지켜보았을 수도 있었다.

“당시에는, 제가 너무 어려 그런 풍수를 따질 수가 없었어요. 다만 동네 사람들이 도와줘서 묘를 쓴 건데, 좋은 자리라니 다행이네요.”

“묏자리를 보실 줄 아십니까?”

음료수를 마시던 택시 기사가 궁금해하며 질문을 던졌다.

“남들도 아는 상식이죠. 누워있는 야트막한 산은 동쪽을 향하고 있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길게 뻗어있어 산새가 아주 좋습니다. 거기다가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어 평온했어요.”

그사이에 술안주가 추가로 나왔다. 밑반찬 몇 가지가 차려지고, 커다란 냄비에 민물고기 매운탕이 나왔다. 미나리와 쑥갓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매운탕에 끓자 인삼 냄새가 풍겨왔다.

“인삼 매운탕입니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가 있어요.”

택시 기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매운탕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인삼 향이 어우러진 매콤한 양념이 혀끝에 감겨왔다.

비행기를 타려고 새벽길을 나선 탓에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공항에서 마신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

큰 산 하나만 넘으면 내가 태어난 곳이었다. 고향이란 단어가 떠오르자, 나는 수저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왜. 안 드세요? 입맛에 맞지 않은가요?”

택시 기사가 물었다.

“고향에 왔다는 생각이 들어선 지 음식이 목에 걸리네요.”

“아! 여기가 고향이군요. 왠지…….”

“느낌이 어떠했는데요?”

“말씨가 낯설지 않았거든요.”

“차는 어떻게 바로 고칠 수 있겠어요?”

“배터리를 교체해도 시동이 걸리지 않으니, 곧 견인차를 불러 읍내에서 손을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손님은 어디까지 가시는 길이세요?”

내가 한정수한테 물었다.

“처음엔 제주도가 목적지였어요. 하루 늦게 간다고 큰일이라도 나는 것도 아니고 해서 무작정 내린 것입니다.”

“어머! 그래요?”

“두 분은 천천히 다른 택시를 불러 타고 오세요. 저는 견인차가 도착해서 가봐야겠어요.”

택시 기사가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고향은 언제 떠났나요?”

“아주 오래전에요.”

“그럼 이곳엔 친척은 없으신가요?”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요. 엄마와 동생이 묻혀 있는 곳인데, 청주 공항에 비상 착륙했기에 올 수 있었던 거죠. 수년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저는 제주도가 고향입니다. 서울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마음이 찹찹하시겠어요.”

그때, 물새 한 마리가 수면 위로 날아올랐다.

“지금 제주도는 억새꽃이 한창 피어 있을 겁니다. 산굼부리 쪽엔 유난히 억새꽃이 많습니다. 지금은 명소로 변해 버렸어요. 제가 어릴 적에 뛰어놀던 그 아릿한 정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어요.”

“저는 여행 목적이 아니어서 그런지 관광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나는 웃음기가 사라진 채 대답했다.

“이참에 고향마을엘 들러보고 싶은데 저와 동행해주시면 고맙겠어요.”

나는 구겨진 남자에게 엉뚱한 제안을 했다.

“글쎄요. 갑작스러운 부탁이라서….”

고향 마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 안으로 슬픔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사실은 이렇게 누군가와 고향 이야기를 나눈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어요.”

고향은 쉽게 넘겨다 볼 수 없는 먼 곳이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연배로 봐서는 결혼도 했을 법한데, 어쩌다 고향을 멀리하고 사셨어요.”

“결혼은 하지 못했어요. 어쩌다가 그랬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미간이 파르르 떨었다.

“우리 소주나 한 잔씩 합시다. 산에선 혼자 술을 병 채로 들고 마시던데….”

“제 모습을 어디까지 훔쳐보셨어요?”

“죄송하게 되었어요. 노모가 귤 농사로 번 돈까지 고스란히 가져가 서울에서 사업을 했는데, 결국 모두 말아먹었죠. 아직 제가 목숨을 끊지 못하는 건, 제주에 계신 어머니 때문입니다.”

“죽음만이 해결책은 아니잖아요.”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건, 진실한 삶에 대한 모독이죠. 자, 술이나 더 비웁시다. 지언씨 부탁을 들어줄 테니까, 제주도에 가면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드리지요.”

택시 기사가 투덜거리며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왔을 땐, 그와 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택시를 고치지 못해 결국 견인차가 불러 공업사로 끌고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 저 택시처럼 될 게 뻔할 겁니다.”

견인차에 매달려 가는 택시를 바라보며 한정수가 중얼거렸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식당 주인 여자가 다가왔다. 이층에 방이 있으니 민박을 할 테면 하라고 했다. 빈속에 먹은 소주 때문인지 가슴이 뛰더니 몹시 답답했다. 한정수는 2층 빈방에서 쉬었다 가자고 했다. 2층으로 올라온 나는 외투를 벗고 눅눅한 이불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이불을 불끈 쥐어틀었다.

“신은 한 번도 내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왜 행복은 늘 내 곁을 빗겨만 가는지 모르겠어요. 어린 꽃잎이 피기도 전에 짓밟은 그자를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두서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술을 마신 탓도 있지만, 고향을 가까이 두고 있어서인지,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목까지 차 있던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가 다가와 앉더니 등을 토닥거렸다. 요셉 신부의 손길처럼 따뜻했다. 나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잠이 들었다.

바짝 타는 목마름에 눈을 떴다. 낯선 방이었다. 창문에 걸린 하얀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았다. 소파 위에 누군가 누워있었다. 순간 나는 내 몸을 만져보았다. 겉옷까지 입은 그대로였다. 우선 물을 마시고 싶었다. 방문 앞에 놓여 있는 물병이 희미하게 보였다.

물 한 병을 모두 마시자,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어쩌자고 낯선 남자와 한방에서 잤는지 모를 일이었다.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달빛이 강물에 잔잔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창을 열자 차고 습한 밤기운이 한꺼번에 몰아쳐 들어왔다.

“지언씨, 깼어요?”

한정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때문에 깨셨나요? 가슴이 답답해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어요. 달빛이 너무 좋네요. 온통 하얀빛이에요.”

“속은 괜찮아요?”

“미안해요. 제가 너무 실수를 많이 한 것 같네요.”

“술을 아주 잘하던데요? 제가 꼼짝없이 한방에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새벽이 오려나 봐요.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어요.”

창문을 연 채로 한동안 찬 공기를 마셨다. 한정수는 다시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냈다. 욕실 문을 밀고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타일 바닥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예민하게 들려왔다. 한정수를 의식해서였다.

나는 욕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옷을 모두 껴입었다. 욕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내가 있던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뒤돌아선 한정수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축축한 머리를 흔들어 뒤로 넘겼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런 걸 두고 운명이라고 해요. 지언 씨와 함께 택시를 타고 오면서도 내내 가슴이 아렸어요.”

“삼류 영화의 대사 같네요.”

“그러지 말아요. 용기를 내서 말하는 것이니까.”

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치 많은 것을 서로 알고 있는 것처럼 다정했다. 그가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저도 같은 느낌이었어요.”

한정수의 콧날과 입술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마치 조각품을 감상하듯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그의 가슴이 몹시 뛰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왔다. 아득하게 말려드는 느낌이 혀끝에서 전해졌다. 격렬한 전율이 온몸으로 퍼졌다.

천천히 몸을 밀착시켰다. 신음이 섞이며 굳어 있던 몸의 감각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살갗이 부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가 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성애가 아니었다.

“당신의 몸속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네요. 사랑하기 전보다 더 크게 들려요.”

내 말을 듣고 있던 그가 피식 웃었다. 그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미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시 구겨진 얼굴로 돌아오기까지는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는개가 하얗게 내리는 새벽이 오고 있었다. 그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버렸다.

조용히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온통 는개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도로를 가로질러 오솔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는개가 풀 끝에 내려앉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발을 적셨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땐 옷이 온통 젖어버렸다.

엄마의 묘는 어제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얀 는개가 소복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손으로 는개를 쓸어내렸다. 그때 새 한 마리가 다가와 울었다. 환생한 엄마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민박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깨어 있었다.

“지언 씨, 내 얘기를 들어 줄래요. ”

“어제는 제 넋두리를 받아줬으니 당연히 들어줘야지요.”

그때였다.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경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22년 직지소설문학상 중편소설 최우수상 수상 ‘달루에 걸린 직지’

*저서: 장편소설 『는개』, 『탈의 꽃』,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아름다운 독』 에세이집『아난다가보내온 꽃씨』 출간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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