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_ 잊혀지는 자의 발버둥.

왕종철이 다그치자 책임 연구원이 슬쩍 수석연구원의 눈치부터 봤다.

수석연구원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난처한 듯 불편한 표정이었다.

“계속 해 보라고!”

왕종철의 역정에 책임연구원이 화들짝 놀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기.. 그러니까.. 배달석의 주파수에 상응하는 어떤 주파수를 보낸다면 열리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열쇠인 거죠.”

왕종철은 책임연구원에 말에 생각을 하는 듯 눈알을 굴리다가 입을 쭉 한번 내밀고는 뭔가 깨달은 듯 이내 표정이 편안해졌다.

“흠. 그래. 그래. 알아 들었네. 세상에 풀리지 않는 건 없지. 그럼. 자네들만 믿겠네.”

왕종철은 지금 완전히 노기가 풀려 있었다.

게다가 그의 말투에는 자상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이제서야 이 공간을 가득 메운 불편함이 사라졌다.

모두 해결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분위기가 다시 좋아진 걸 눈치 챈 수석연구원이 왕종철에게 말을 건넸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듯 충성적인 태도였다.

그런데 왕종철은 무언가 불편한 듯 눈을 치켜 떴다.

“뭐라고?”

수석연구원은 실수했다는 생각에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체 왕종철을 쳐다보기만 하자 갑자기 왕종철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뭘 그리 쳐다 봐. 그럴 땐 반드시 풀겠습니다라고 하는 거라네.”

이 모두 성과가 없어 풀이 죽어 경직된 수석연구원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한 왕종철의 장난.

그걸 알아 챈 연구원들이 그와 같이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웃음은 연구실을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만들었고 편안함을 불러왔다.

왕종철의 노기는 정말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또 그걸 뒷받침하듯 그의 안색도 편안해 보였고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입에는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왕종철은 그 어떤 일에도 심각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맺고 끊는 게 확실하다는 그는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심리적으로 자신을 옥좨지는 않았다.

어떤 고통도 흘려 보내는 평정심의 소유자.

그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 중 하나였다.

어쩌면 초탈해 보이기까지도 하는 왕종철.

다시 원래대로 인자한 사람으로 돌아온 그에게 책임연구원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반드시 풀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그래야지.”

왕종철은 갑자기 책임연구원의 한쪽 어깨를 움켜 쥐었다.

깜짝 노란 그가 왕종철을 쳐다보자 그가 지그시 쳐다보았다.

신뢰가 가득한 눈빛이었고 인정해 주는 태도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이 연구실의 총 책임자 수석연구원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성과를 낸 책임연구원을 향한 왕종철의 애정에 다시 한 번 질투를 느낀 이유이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성과는 바로 인정이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 이유.

왕종철에게 인정 받고 있는 책임연구원에게 패배감을 느낀 수석연구원의 마음은 상실로 가득 찼다.

풀이 죽은 얼굴로 바닥만 쳐다보던 수석연구원의 어깨로 손 하나가 갑자기 들어와 움켜쥐었다.

연구원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어느새 자신의 앞에 와 있는 왕종철.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라네. 의기소침해하지 말게나. 자네의 실력은 최고일세. 그러니 수석 연구원이지. 한 번의 실수로 무너지지 말게나. 그걸 딛고 다시 일어서 더 높이 뛰어야 하는 거라네.”

왕종철의 말에 수석연구원의 얼굴이 밝아졌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회장님. 믿어주십시오.”

“그래. 그래야지.”

왕 종철은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수행원을 거느리고 실험실을 나갔다.

힘이 있는 자.

왕종철의 말과 행동은 사소한 것이라도 많은 걸 변화시켰다.

그가 사라진 연구실은 다시 연구원들로 들어 찼다.

하지만 그곳은 이전의 그곳과는 달랐다.

그들이 연구하는 모습은 예전의 풍경과 같았지만 해결책이 제시 되었기에 목적과 방향이 명확해졌다.

답을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직진할 수 있는 것.

또한 힘이 있는 자의 격려와 믿음으로 수석연구원에게는 투지와 끈기가 솟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연구실의 리더로서의 거침없는 질주를 뜻했고 이 연구실에 새로운 진취를 불러 온 것.

이걸 보듯 왕종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도 있었다.

예전보다 활기차고 열정적인 운석 연구실.

왕종철이 만든 세상.

알앤디 센터를 나서는 왕 종철의 행색은 초라했다.

하지만 그 초라한 행색은 껍데기일 뿐.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는 왕종철임을 부정할 순 없다.

또한 그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힘이 센 자라는 사실도 변함이 없다.

아무리 그가 낡은 양복을 입고 다 헤진 구두를 신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키가 작고 빼빼 마른 초라해 보이는 백발의 80대 노인인 왕종철은 오성 알앤디 센터에서의 모든 일을 마치고 고급 대형 세단에 몸을 맡긴 체 홀연히 떠났다.

***

양평 경찰서 정보과 사무실.

이곳은 낮에는 항상 텅 비어 있는 곳이다.

정보과 업무 특성상 거의 모두 외근을 나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특성을 깨며 정보과 안에선 의외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때마침 그 곳을 지나치고 있던 건설 교통과 한대수 경사가 의외의 상황에 걸음을 멈추었다.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인 그는 정보과 안에서 사람이 있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다.

보기 드문 의외의 상황에 호기심이 발동한 그가 슬며시 정보과 문을 열었다.

저 멀리 한 쪽 구석에서 열심히 모니터를 보며 느릿한 독수리 타법을 구사하는 김정구 경장이 보이자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어이. 김 경장. 오늘은 외근 안 나가고 웬일로 여기 있나?”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탓인지 한대수 경사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김정구.

그대로 그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문 앞에 서 있는 한대수를 알아보고 곧바로 인상부터 썼다.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뜻.

“아, 이 사람아. 노크 몰라? 노크.”

김정구의 말에 대화의 물꼬를 튼다는 듯 한대수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아니. 난 아무도 없는 줄 알았지.”

“아무도 없으면 그냥 막 그렇게 들어와도 돼?”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들어오지 그럼. 이리 오너라 라고 외쳐야 되나?”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에 김정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가 그런 이유.

둘은 친구 사이였다.

같은 근속 기간을 가졌고 나이도 같은 직장 동료.

하지만 한대수는 김정구보다 직급이 높았다.

한 대수가 김 정구를 앞지른 건 3년 전부터였다.

15년차 같은 양평경찰서 같은 동기인 그들은 작은 소도시 인맥이 그러하듯 처음부터 쉽게 친해진 사이였다.

하지만 직급에 차이가 난 후 조금씩 서먹해진 사이.

현재는 마주치면 그저 농이나 주고받는 사이로 변해버렸다.

김정구 앞에 다다른 한대수가 오지랖을 부리며 모니터를 슬쩍 쳐다보았다.

“보고서 쓰는가 보네?”

그런데 김정구가 보여주기 싫다는 듯 급하게 책상에 놓인 서류철로 모니터를 가리자 그것이 기분이 나빴던지 한대수가 비꼬기 시작했다.

“인터넷 뒤지면 다 있는 정보를 뭐 하러 매번 그렇게 열심히 하나? 흐흐흐”

한대수의 말에 심사가 뒤틀린 김정구.

“뭐하긴. 승진하려고 앉아 있지!”

이렇게 말하자 깜짝 놀란 듯 한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진?”

“그래.”

“정보과 승진은 힘들지 않나?”

“그거야 사람 나름이지. 보고서 잘 쓰면 2계급도 올라갈 수 있어.”

“뭐? 하이고. 엄청 대~단한 정보 하나 물었나 봐? 요즘 경기가 너무 안 좋아 어디 술집 주인끼리 싸움이라도 붙었나? 흐흐흐흐”

누가 들어도 조롱성 짙은 말.

계속되는 한대수의 놀림에 진짜 김정구는 마음이 상했다.

경찰서 정보과는 예전엔 승승장구 특진의 길이 있는 무소불위의 분과였다.

경찰서 정보과의 상급기관은 경찰청이 아닌 국정원.

정보업무에 관한 한 예산 및 지휘 통제권이 국정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때 국정원의 비위와 위상의 추락으로 그 불똥이 경찰 정보과 형사에게까지 떨어졌다.

그 후로 정보과 형사들은 경찰서 내에서 찬밥 신세이자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없애 버리지 못하는 분과.

그래서 한대수가 계속 조롱했던 것.

그러나 정보과 경장 김정구는 한대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래 봬도 우리 아이오(IO•Intelligence Officer)야. 아이오들이 밑바닥에서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예전에 그거. 그 사건 몰라? 재벌 회장이 조직 폭력배 동원해서 사람 하나 반 죽여 놓은 거. 그거 우리 아니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은폐됐을 사건이야.

그뿐이야?

부동산 이상 폭등, 재래시장 민심까지 다 파악하고 다니는데 그런 것들은 FBI, 국정원 할아비도 못하는 일들이라고. 하이고 우리가 손을 놓으면 나라가 돌아가질 않아. 그만 무시해.”

한 대수는 김 정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찬란했던 지나간 과거의 흔적일 뿐.

현재는 무쓸모 분과가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는 그다지 정보과의 필요성에 대한 명분은 없다.

왜냐하면 그걸 대체할 방편이 있기 때문이다.

한 대수가 그 방편에 대해 침을 튀기며 설파했다.

“이봐. 그것도 다 한 때였지. 시대가 변했어. 김 경장. 좋은 시절 다 갔다고. 인터넷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잖아.

기자들도 인터넷 보고 기사 쓰는 시대야. 요즘 정보부서는 TO도 안 찬다며? 비 인기직이라.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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