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_ 나 다시 돌아가고 싶어

박토는 곧바로 탄피를 주우며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옥상 위를 말끔히 정리한 그는 건물에서 내려와 총격전이 있었던 장소를 되돌아가며 나머지 탄피를 챙겼고 로프총도 수거했다.

그러는 와중에 더 이상의 위험은 없었지만 그래도 안심을 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바룬족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

바로 바탈을 지키는 일.

그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처음 김탄을 대피시킨 장소로 서둘러 되돌아왔다.

김탄은 여전히 무섭다는 듯 움푹 파인 건물 화단에 엉덩이를 든 체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완전 겁쟁이.

그 모습에 한심했던 박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일어나. 다 끝났으니까.”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 김탄.

그런 그의 우주 최강 겁쟁이 모습에 박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은 척 안 해도 돼. 빨리 일어나. 여길 빠져나가야 하니까.”

그래도 일어나지 않는 김탄.

그는 처음 그 자세 그대로였다.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박토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김탄 앞에 다다른 박토는 그가 무서워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상태로 기절한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 사실에 당황한 박토가 김탄의 고개를 돌려 상태를 살폈다.

의식이 없었다.

그리고 머리에서 이마로 흘러내린 피가 보이자 바탈을 지켜야 하는 사명을 가진 박토의 심장이 덜컹 내려 앉았다.

순간 그가 그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이런. 살짝 밀었는데 이러면 곤란한데.. 무슨 바탈이 이렇게 허약해.”

지금 박토는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며 합리화 하는 중.

솔직히 그는 김탄을 살짝 민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누가 듣지도 않는데 살짝 밀었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그는 지금 무척 불안하다.

바로 바탈을 수호하는 사명을 어긴 죄책감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김탄을 데려가면 큰일이다.

박토의 심장이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바룬의 첫 번째 사명인 목숨을 걸고 바탈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을 그르친 것을 가문에서 알게 된다면, 그때 받을 후환이 무척 두려운 박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야 해.-

박토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일단 김탄의 머리에 흐르고 있는 피를 막기 위해 지혈을 했다.

그리고는 티를 벗고 안에 입은 런닝셔츠를 벗어 생수를 적셨다.

그 런닝셔츠로 김탄의 머리카락에 떡이 져버린 피를 닦아냈다.

그렇게 한참을 정성스레 공을 들인 김탄의 머리는 처음 그 상태로 말끔해졌다.

그 결과에 흡족한 박토가 다른 곳에 이상은 없는지 김탄의 몸을 살폈다.

옷에 흙이 묻어 있어 털어 내고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매만졌다.

이정도면 완벽하다.

처음 그대로 완벽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상태로 되돌아 온 김탄.

이제 그를 데리고 집으로 가야한다.

박토는 잔뜩 긴장한 체 허겁지겁 뒷수습을 한 탓에 목이 말랐다.

가방을 뒤져 봤지만 생수는 없었다.

-한 개 더 챙겨 올 걸.-

주변을 둘러보자 김탄의 머리를 닦기 위해 급하게 쓰다 버린 생수 병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지만 물이 없었다.

아마 급하게 떨어뜨리는 바람에 바닥에 쏟아진 것 같다.

바싹 마른 입안을 달래고 싶은 욕망이 가득 찬 박토는 그래도 몇 방울 있는 물방울을 먹기 위해 빈 생수병을 입에 가져다 대고 물방울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똑. 똑. 똑.

정확히 세 방울.

바싹 마른 혓바닥을 적실만큼의 물이 떨어졌다.

그것으로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짜증이 잔뜩 난 박토가 성질이 났다는 듯 빈 생수 병을 집어 던지고는 김탄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맘에 안 들어. 제기랄.”

만 년의 기다림 끝에 나타난 바탈이 저렇게 허약한 사람이라니..

박토는 지금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가 가문의 비사(秘史)로만 전해 들은 첫 번째 바탈.

마지막 예언이 일어나면 멸망에서 세상을 구할 가장 용맹한 자.

그 첫 번째 바탈이 여기 그의 한 번 내지른 발길질에 쓰러져 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박토는 김탄이 바탈이 아닐거라는 의심만 더 증폭됐다.

그러나 그가 아닌 것 같아도 김탄은 바탈이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바룬족의 절대 권력.

바로 무단인 8살짜리 조카인 박월이 지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단은 절대 틀리는 법이 없는 자.

이 문장이 무단을 전부 다 말해 준다.

그럼 여기 이렇게 파김치 처럼 쓰러져 있는 자가 바탈이 맞는 것이다.

그 사실에 박토의 마음은 폭풍이 이는 듯 복잡해졌다.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며 파눔의 만 년 전 예언이 일어난 이 시점.

그 오랜 세월을 숨 죽이며 기다려온 대가가 지금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김탄이라니..

박토는 믿을 수도 없었고 믿기지도 않았다.

-그냥 잃어버렸다고 하고 버리고 갈까?-

순간 마음에 갈등이 생긴 박토.

그가 지금 그의 역할인 바탙 파인더로서의 임무를 저버리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무단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자.

하지만 그 복종을 거부하려 마음 먹자 순간, 울리는 진동 벨.

귀신 같은 박월의 문자였다.

<도무지 느껴지지 않아. 삼촌. 늑대에게 아무래도 일이 생긴 것 같아. 첫 번째 바탈 만이라도 무사히 데려와야 해. 꼭.>

언제나 박토가 흔들릴 때마다 기가 막히게 연락하는 박월.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박월이 지켜보는 건 아닌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역시 그럴 리는 없다.

지금 박월은 집에 있다.

자신의 허무맹랑함에 그도 웃겼는지 피식 한 번 웃고는 김탄을 일으켜 세워 어깨에 들쳐 맸다.

무단인 박월이 문자로 명령을 내린 이 시점.

박토는 김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를 데려가야만 한다.

그 모든 것이 그가 짊어진 바룬족의 바탈 수호자로서의 사명 때문이다.

그 사명은 거스를 수 없는 숙명 같은 것.

박토는 김탄의 몸이 상당히 무겁게 느껴졌다.

기본 체력과 근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 장정 한 명은 우습게 드는 박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키 작고 볼품없는 김탄의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게 아마도 데려가기 싫은 마음 때문이겠지?

그가 정말 그렇다는 듯 맥 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 꺼진 텅 빈 골목.

적막하고 쓸쓸했다.

그가 한 숨을 훅 내쉬자 화답을 하듯 5월의 쌀쌀한 밤공기가 그의 얼굴을 스쳤다.

-휴~. 왠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

그나저나 바탈이 둘이나 나타나다니..-

박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득 찬 보름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을 보니 그것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바탈 늑대 생각에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큰일이네. 이거.. -

사라져 버린 두 번째 바탈 후보인 수원역 늑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진 박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건 차후에 미룰 일이다.

우선 첫 번째 바탈만이라도 데려 가자.-

헛헛해진 마음 때문에 침울한 그가 또 한 번 깊은 한 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오성 알앤디 센터 뒤 쪽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늑대였던 미캐를 수송하는 탑 트럭이 멈추어 섰던 것.

뒷 문이 열리고 추적자들이 튀어 나와 미캐가 들어 있는 네모난 상자를 트럭에서 꺼냈다.

그 옆으로 은비사가 바짝 붙어 선 후 우리를 열어 보았다.

여전히 기절해 있는 이미캐가 보였다.

은비사가 추적자들에게 조용히 수신호를 했다.

그러자 추적자들이 상자를 들고 화단 경계석을 넘어 알앤디 센터 뒤편에 난 길로 이동을 했다.

그들이 길에 들어서자 갑자기 캄캄한 어둠을 가르는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의 근원으로 모두가 시선을 모으자 신기하게도 벽만 있던 건물 외벽의 한 부분이 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빛은 거기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

이 문은 탑 씨크릿 도어.

그러니까 비밀의 문.

오직 알앤디 센터 최고 상부만 알고 있는 극비였다.

어둠은 절대 밝음을 이길 수 없다는 듯 알앤디 센터 내부에서 나온 빛은 어두운 건물 뒤편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밝은 빛의 근원 속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걸어 나오는 데..

역광 때문에 그 남자의 모습은 정확히 식별할 수 없었지만 남다른 자세와 기운이 유별났다.

그 남다름의 기운과 실루엣만 봐도 그는 왕종철.

빛 속에서 나타난 그는 바로 오성 그룹 최고 권력 총수였다.

환한 빛 때문에 추적자들이 눈이 부셔 팔로 눈을 가렸다.

우연이 만들어냈지만 은비사의 눈에 이 장면은 어떤 신성한 의식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왕종철을 따라 길게 드리운 그의 그림자 모습은 그가 키 작고 깡마른 체구였지만 이곳에서 가장 크고 위압적이었다.

그렇게 도로와 건물 중간 부분에서 서로 마주보게 된 은비사와 왕종철.

은비사가 그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한 후 손으로 그를 위한 전리품이 들어 있는 우리를 가리켰다.

“잡았습니다. 회장님.”

왕종철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부터 지었다.

그러자 은비사가 손짓으로 추적자들에게 명령을 했다.

추적자들이 우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혹시 모르니 회장님께선 거기 서 계십시오. 안전을 확인 한 후 보여드리겠습니다.”

은비사의 말에 왕종철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은비사가 우리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죽은 듯한 미캐, 전혀 위협을 느낄 수 없었다. 

“뮤턴트를 꺼내.”

은비사의 명령에 추적자들이 미캐를 상자에서 꺼내 양 옆으로 붙어 그녀를 부축했다.

아마도 미캐를 왕종철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런 듯 보였다.

하지만 모든 게 마비된 미캐는 온몸에 힘이 빠져 늘어져 있었고 고개도 떨구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왕종철은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은비사가 제지했다.

“저희가 그 쪽으로 가겠습니다.”

은비사는 추적자들과 함께 미캐를 끌고 왕종철에게 향했다.

그러자 왕종철의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런. 이렇게 홀대해서야 쓰누? 정중하게 모셔야지.. 쯧쯧”

“죄송합니다. 회장님.”

“됐다. 또 다른 바탈은?”

“이 바탈을 연구실로 이동시키고 바로 잡으러 갈 계획입니다.”

“한 놈만 잡은 겐가?”

“아닙니다. 이 바탈이 거취도 신원도 파악되지 않은 상태라 먼저 잡았습니다. 김탄은 이미 모든 정보를 확보해 놨기에 조금 미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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