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찬 시인의 수필집『아버지의 봄』도서출판 ‘이든북’에서 출간됐다.

장마가 끝나갈 무렵, 7년 동안 긴 울음을 참고 있던 매미가 단번에 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기운으로 안시찬 수필가의 수필집『아버지의 봄』이 세상 밖으로 나와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이미 시인으로 등단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시집으로『칼의 뼈』『달빛 사랑』『글씨를 받고』를 출간해 많은 사랑을 받는 중견 시인이기도 하다.

안시찬 수필가는 논산의 벌곡면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여 쓴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인은 『대전문학』에는 시로,『 수필과비평』에는 수필로 신인문학상을 받고 문단에서 많은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동안 시집으로『칼의 뼈』『달빛 사랑』『 글씨를 받고』출간했으며, 수필집으로 『아버지의 봄』을 출간해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안시찬의 수필은 꽤 이색적이다. 수필이란 사전적 의미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듣고 본 것, 체험한 것, 느낀 것 따위를 생각나는 대로 쓰는 산문 형식의 짤막한 글 또는 그러한 글투의 작품’을 수필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은 ‘보고 체험한 것’에 크게 치중돼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듣고 느낀 것’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 더 눈여겨 볼 것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쓰질 않는다는 점이다.

‘붓 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는커녕 되레 그는 각각의 작품마다 나름의 형식과 구성의 임의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탓에 안시찬 수필가의 글은 촘촘하게 얽혀 있으며 구성이 단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필집『아버지의 봄』 전편에 흐르는 심리적 기조가 바로 이런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관용과 배려,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 자기반성에서 오는 겸손과 양보 등. 현실에서 좀체 마주하기 어려운 이러한 미덕이 기본 토양으로 깔려 있기에 그의 글에서는 봄바람 같은 온기가 느껴지고 있다. 그래서 작가의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안시찬 시인은 수필에서는 제목이 의미하듯이 아버지의 봄바람을 느낄 수 있는데, 작품 곳곳에서 작가의 체취가 묻어있어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 저자 및 역자 소개

지은이_ 東岩 안시찬 시인·수필가

·충남 논산시 벌곡면 신양리에서 부 안상만安相萬(호 大谷), 모 이아기李阿基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대전문학』,『 수필과비평』 신인상으로 시와 수필에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전자문학 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대전광역시지회 이사(운영자문위윈, 감사 역임), 국제PEN한국본부 대전광역시위원회 부회장(운영위원 역임), 문학동인 대전문학회 고문(초대 회장 역임), 국제계관시인연합한국본부 회원, 수필과비평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칼의 뼈』『달빛 사랑』『글 씨를 받고』가 있고 수필집『아버지의 봄』이 있다.

·2020 올해의 작가상, 제14회 청동빛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9, 2023대전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공모에 선정되었다.

*문의- 이든북 출판사: 전화 042-222-2536

[수필] 간이역

안시찬

토요일 오후 운동을 하기에는 이른 시간. 텅 빈 도장 안에는 샌드백 하나만 덩그렇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도복으로 갈아입고 미친 듯이 샌드백을 두들겼다. 나도 울고 샌드백도 울고 도장이 울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만.”하는 사범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따라 들어와라.”

둘은 사무실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나는 훌쩍이며 하소연했다. 단 한마디의 대꾸도 없던 사범이 내가 말을 마치자 수련장으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사범이 나와 대련 자세로 마주 섰다. 경직되어 있는 사범의 얼굴, 어리둥절한 나.

“지금부터 자유대련을 한다. 차렷. 경례. 시작.”

사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차기, 돌려차기, 옆차기가 사정없이 들어온다. 단 한 번 방어도 공격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나. 일어나면 공격이 들어오고 일어나면 또 공격이다. 일어설 기력도 없다. 나는 도장 바닥에 누워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다랑논이 새우등같이 이어지고 높고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오지마을 내 고향. 나는 마을 사람들의 축복 속에, 이곳에서 오 십여 리나 떨어진 대전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대전엘 가려면 7㎞나 되는 먼 길을 산 고개를 넘어서야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역장 혼자 근무하는 시골 간이역. 동화책에나 나올만한 작은 역이다.

역이 있는 이 마을에는 대전으로 기차 통학을 하는 내 또래의 고등학생이 세 명 있었다. 이 아이들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를 괴롭혔다. 기차에서 내리면 내 머리를 툭툭 치고 지나가기가 일쑤였다. 같은 고등학생으로서 정말 참기 힘든 치욕이었다.

세 명이나 되는 수적 우위와 텃세를 부리는 아이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어금니를 악물고 한 발짝이라도 더 빨리 집 방향으로 옮겨 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기차에서 내려 앞을 바라보니 저승사자 같은 아이들이, 개구리를 발견한 구렁이처럼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따라오라며 냇가 둑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잠시 내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따라갈 것인가, 그냥 튈 것인가, 맞설 것인가. 그러나 약자에게는 그런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선택이란 오직, 강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둑에 올라 냇가 쪽을 바라보니 따라오라며 앞서가던 아이들은 벌써 담배에 불을 붙여 새털 같은 연기를 훌훌 날리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피우던 담배를 건네주며 맛이 기가 막히니 한 모금 빨아보라고 했다. 싫다고 하자 말이 많다며 주먹으로 배를 질렀다. 자갈밭에 쓰러지는 나. 번쩍 머릿속을 번개같이 지나가는 생각, 살아야 해. 벌떡 일어나 허리를 껴안았다. 다시 자갈밭에 내동댕이쳐졌다.

셋이서 발길로 타작을 했다. 나는 이 일이 있고 난 후, 30분이나 더 걸어야 하는, 다른 기차역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에는 중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배워 2단이라는 막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대회만 나가면 예약이나 해놓은 듯 목에 메달을 걸고 왔다.

친구가 걸어가다 늘어진 나뭇가지에 돌려차기를 날렸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래 저거야. 나도 태권도를 배워 그 녀석들을 낙엽처럼 날리고 말 거야.

다음 날 나는 태권도 도장에 등록했다. 정말 열심히 수련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도장으로 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샌드백을 두들기고 정권을 단련시켰다. 연습시간이든 수련시간이든 나의 생각 속 공격 대상은 오로지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이었다.

돌덩이 같은 정권이 격파를 하면 기왓장 열 장이 우수수 가라앉는다. 옆차기를 날리면 샌드백이 수평을 지나 수직으로 떠올랐다 떨어진다.

태권도의 기본정신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오르지 복수를 위한 무술을 연마했다. 그런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청띠, 빨간 띠에 올라 일 년이 조금 지나 유단자가 되어 검정 띠를 둘렀다.

오늘은 일 년여 만에,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이 사는 도살장 같던 ○○역을 이용하여 고향집에 가기로 했다. 가방 위에 검정 띠를 두른 도복을 포개 얹고 기차를 타기 위해 서대전역에 도착했다.

매표원에게 “○○역 한 장 주세요.”하고 돈을 디밀었다.

“○○역은 한 달 전에 폐역이 됐는데요.”

“폐역이 되었다고요”

순간 내 머릿속이 꽝하고 울리며 하얗게 타버렸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일 년 전의 치욕들이 낡은, 영사기 필름처럼 덜덜거리며 지나갔다. 끌어올리던 월척을 뜰채 앞에서 놓쳐버린 듯한 허망함. 역사 창밖을 바라보니 먹구름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천둥 번개를 날리더니 이내 장대 같은 소나기를 내리부었다. 나는 시골집 가는 것을 포기하고 빗속을 걸어 도장으로 향했다.

쓰러져 있는 내 귓전에 꿈속인 듯 사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똑바로 서라, 태권도는 누구를 먼저 공격하거나 한풀이를 위한 무술이 아니다. 동전만 한 원한으로 태권도를 시작하고 복수를 위해 검은 띠를 둘렀다면 지금 당장 도복을 벗고 도장을 떠나라.

복수는 복수를 낳고 서로의 가슴에 영원히 버릴 수 없는 비수匕首를 간직할 뿐이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사범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잠시 후 사무실을 나오는 사범의 손에 약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뚜껑을 열고 찢어진 내 얼굴에 발라주었다.

“태권도는 이 약과 같은 것이다. 힘없고 상처 난 사람을 보듬어 주는 무술이다. 가장 아름다운 복수는 강한 자의 용서야.”

한없이 작아지는 내 몸. 활활 타오르던 복수의 불꽃이 불 꺼진 용광로 쇳물처럼 사르르 가라앉았다.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의 얼굴이 봄볕처럼 다가왔다 사라졌다.

환상의 완행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간이역을 향해 달려갔다. 지금 그곳에 가면 간이역사는 없다. 가슴에 끓고 있던 복수심도 이젠 폐역처럼 사라졌다.

환상의 열차가 간이역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획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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