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_ 믿고 싶지 않아. 김탄이 히어로라는 걸..

네모의 꿈. 작사 작곡: 유영석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중략.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유명하고 잘 생긴 유영석 씨가 작곡한 노래 가사이다.

가사의 원 뜻과는 무관하지만 완전 그 네모의 꿈일 것 같은 그 세상이 바로 박토의 눈앞에 펼쳐졌다.

모든 게 네모였다.

나무, 집, 사람, 심지어 개까지..

사람의 눈, 코, 입 또한 네모였다.

박토는 이 세계가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모니터에 펼쳐진 것은 화려한 그래픽도 아닌 멋있는 캐릭터도 아니었다.

그저 네모난 것들로만 가득한 이 세계를 왜 박월이 미쳤는지 말이다.

-초딩들은 알 수 없는 세계를 가진 것 같아. 조악하고 조잡한 저 캐릭터들이 뭐가 좋다는 거지? 정말 이해가 가질 않아. 하지만 멋있으니까 좋아하는 거겠지?그저 내가 이해해야 되는 부분인가?-

MZ세대.

월도 3년만 지나면 박토와 같은 MZ 세대로 구분된다.

박토는 M세대와 Z세대의 간극이 이렇게나 큰데 왜 한 세대로 묶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구수가 적어서 그런 건가? 절대 섞일 수 없는 세대가 어떻게 하나로 묶일 수 있지?-

박토는 이렇게 쓸데없는 잡념에 머리가 아팠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김탄을 쳐다보았다.

김탄의 책상 주변으로 다 먹은 컵라면 그릇과 음료수 캔, 과자 봉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박토가 한심하게 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김탄이 마영식에게 소리쳤다.

“어어어? 이런, C. 원숭이 좀 조져 봐. 깐족 대서 미치겠네. 아우 C 저 짐승 새X 성가셔.”

“알았어. 형이 잡는다. 원생이 새X. 죽어라!!”

“메르치 견제할 게.”

순간 박 토의 한쪽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예상 밖의 모습을 봤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먹는다.

가령, 도덕 군자 선비 같은 사람의 다른 이면을 마주했을 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알고 봤더니 도둑질에 교활한 협잡꾼에 사기질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충격을 먹을 수밖에 없다.

지금 박토가 딱 그 심정이었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히어로 바탈이 지금 게임을 하며 욕을 한다는 건, 그건 박토가 오래 전부터 상상해오고 예상해왔던 바탈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박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컴퓨터 화면을 쳐다봤다.

네모난 몸에 네모난 얼굴을 가진 캐릭터가 웃고 있었지만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낀 박토가 기분이 나빠진 듯 조용히 읊조렸다.

“월 이 자식이.. 설마.. 비전을 잘 못 본 게 아닐까?”

조악한 캐릭터에 환장하는 박월.

그의 안목에 실망한 박토는 김탄이 바탈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건 네모난 게임 캐릭터와 바탈을 매치시켜야 하는 극악의 정신 노동과도 같은 것과도 비슷했다.

김탄이 바탈이 아닐수도 있다는 의심이 다시금 싹튼 박토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오후 7시.

-6시부터 시작했으니까 1시간을 게임을 한 거군. 이건 거의 중독 수준이야. 하지만 월이 바탈이 맞다니 믿을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내 느낌에는 아닌 것 같아.-

지금 의심 대마왕이 된 박토가 다시 김탄을 슬쩍 돌아봤다.

쳐다보자마자 그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여전히 그들은 방만한 모습의 게임 삼매경 속.

박토가 소리 나지 않게 입 속으로 혀를 끌끌 차는 동시에 갑자기 전화 진동이 울렸다.

이어폰을 누르자 기막힌 우연 같은 박월이었다.

“삼촌. 늑대 찾았어?”

“아니.”

“아니! 왜?!!”

“아우. C.”

월이 다짜고짜 소리를 버럭 지르는 통에 박토는 순간 고막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리고 아까 신우 프로텍에서 월의 소리를 듣기 위해 볼륨을 높였던 걸 줄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고막이 아프니 짜증과 함께 화가 난 박토.

그도 화풀이로 월에게 소리를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바로 옆에 김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토는 김 탄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그저 억지로 화를 삭여야만 한다.

하지만 암에 걸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런 건지 가슴이 답답했고 뒷골은 뻐근해져 왔다.

박토가 이어폰 볼륨을 낮추며 김탄을 곁눈질로 의식한 체 조용히 속삭였다.

“작게 얘기해도 다 들려. 그리고 성가신 진드기가 붙어서 떨어지길 기다리는 중이야.”

솔직히 박 토는 김 탄이 퇴근하자마자 납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수 천 번 시뮬레이션을 해가며 생각해뒀던 납치 계획이 마영식이의 등장으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어쩔 수없이 그림자처럼 마영식과 김탄의 뒤를 밟다 여기 피씨방에 자리 잡게 된 것.

그 상황을 모르는 월은 박토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지금 어딘데? 삼촌.”

말할 수 없었다.

피씨방에 있다는 걸..

그는 학부모다.

그는 일반적으로 평상시 게임을 하는 박월을 혼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있는 곳은 학부모에게는 범죄의 소굴 같은 피씨방.

자신이 있는 곳을 도저히 말할 수 없었던 박토가 머뭇거리자 다시 월의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지금 어디냐고? 대체 어디 있는데 수원역에 못 간 거지?”

또다시 박월의 추궁에 박토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아~”

“한숨은 왜 쉬는 건데? 나쁜짓 해? 삼촌. 설마 삼촌..”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상상을 하기 전에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는 박토.

물론 월이 오해할 게 뻔했지만..

박토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웅얼거렸다.

“피씨방이야.”

“뭐? 어디라고?”

“피씨방이라고..”

“뭐? 삼촌 미쳤어! 삼촌 게임도 안 하면서 거긴 왜 갔어? 지금까지 날 속였던 거야? 나보고는 게임하면 뭐라고 했으면서 삼촌은 피씨방에 있다고? 진짜. 이중적이네.. 그리고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박월의 카랑카랑한 소리가 박토의 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박토의 예상대로 월은 지금 박토를 오해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월의 양육자로서의 권위가 사라지는 순간.

박토는 오해를 풀기 위해 절박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진드기가 붙었다고 했잖아.”

“진드기?”

“그래. 네가 말한 바탈 옆에 진드기 같은 인물이 붙어있어. 양아치 같이 생겼다고. 정말 네가 말한 사람이 바탈이 맞는 거야?”

“설마 아직도 의심하는 거야? 내가 무단인데?”

“아니. 널 믿어. 하지만 네가 맞다고 하는 저 바탈이 1시간이나 게임에 미쳐있어. 내가 볼 땐 그냥 게임 중독자 같은데?”

박토의 말에 월이 성질이 났는지 발끈하며 또 소리쳤다.

“삼촌! 내가 누군지 알아?”

“알아. 무단.”

“그럼 시키는 대로 해. 그 아저씨 진짜 바탈이야!”

“알았어. 그런데..”

“아, 왜 또?”

-짜증 잔뜩 섞인 월의 목소리. 더 이상 통화하기 싫다는 뜻인가?-

이렇게 생각한 박토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

어릴 때는 삼촌 없으면 울고 불고 하던 녀석이 머리가 조금 컸다고 저런다.

그래도 궁금한 건 물어봐야지.

“아니, 그게 아니라.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뭔데?”

“저기.. 네가 좋아하는 나의 크래프트 게임 캐릭터를 봤는데..”

“정말? 진짜? 와!”

시큰둥했던 월의 목소리 톤과 말투가 완전히 달라졌다.

박토는 8살짜리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고 또 마음이 더욱더 아팠다.

-좋아하는 대상을 옮기면 과거의 대상에겐 왜이리 차갑고 함부로 대하는 걸까? 편해서 그런 것일까? 아님 사랑이 식어서 그런 것일까? 뭐, 영원한 건 없으니까. -

박토는 이렇게 머리가 복잡했고 질투도 났다. 나의 크래프트한테..

아무튼 분명 박월은 지금 반짝이며 동그랗게 뜬 눈을 한 체, 입은 찢어져 귀에 걸쳐 있는 모습으로 나의 크래프트에 대한 박토의 소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박토가 다시 모니터 속 네모난 캐릭터를 쳐다보았다.

거칠고 조악했고 후졌다.

“그런데 월아. 그 캐릭터를 왜 좋아하는 거지? 혹시 멋있어서 좋아하는 거야?”

“응. 대박이야. 짱 멋있어.”

“헉.”

박토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짧고 강렬하면서 통한의 아픔까지 살짝 느껴지는 한숨.

그리고 나서 그가 김탄을 다시 바라보며 그의 행색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볼품없는 얇은 팔이 옷을 입고 있어도 느껴졌다.

몸에 근육이라고는 존재하지도 또 존재해 본 적도 없어 보였다.

박토는 순간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박토는 히어로로서의 김탄을 멋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박토의 기준에서는 불변의 진리.

하지만 월은 김탄을 히어로로서 멋있다고 생각했다.

박토는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듯 모든 게 이해가 갔다.

네모난 얼굴에 네모난 몸에 네모난 손 그리고 네모난 발을 가진 게임 캐릭터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월에게는 김탄이 멋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차이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걸 박토는 여기 피씨방에 와서 깨달았다.

-그래 맞아. 생각의 차이였던 거야. 내 기준에서 멋있다는 것과 월의 기준에서 멋있다는 게 달랐을 뿐이야. 난 틀린 게 아니야. 단지 차이만 있었을 뿐. 하지만 내게는 하나도 멋있지 않아. 저 사람은....그래도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야지. 나는 리버럴리스트니까..-

뭐 이런 생각을 담고 김탄을 바라보며 월에게 속삭였다.

“네가 멋있다고 하는 바탈을 데리고 수원역으로 갈 거니까 집에서 얌전히 숙제하고 기다려. 월.”

“빨리 와. 삼촌. 보고 싶어.”

-뭐? 보고 싶다고? 이 대체 몇 년 만에 들어 보는 소리인가? 나의 크래프트 얘기를 해서 달라진 건가?-

박토는 월의 다정한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시 사랑이 돌아온것만 같아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항상 툴툴거리고 불만스럽게 박토를 대했던 월의 달콤한 말은 상당히 어색하기까지 했으나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고 마음이 젤리처럼 흐물거리기까지 했다.

-이것 또한 아빠의 마음이겠지?-

총각 박토는 아빠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징그럽게 말 안 들을 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가도 아이가 부리는 애교와 말 한마디에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쾌감.

오직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쾌감이었다.

그 쾌감을 지금 박토도 느끼고 있었다.

기분이 좋으면 말투가 달라진다.

박토 또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월에게 속삭였다.

“삼촌 보고 싶다고 울면 안 돼. 월아.”

“우웩! 미쳤어! 착각도 오지네. 바탈 아저씨랑 늑대가 보고 싶어서 빨리 데리고 오라고 한 거야. 바보.”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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