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_관리자와 부하직원의 게임

지금 은비칼은 오강심과 나채국의 얼굴을 보고 대경실색(大驚失色)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하얗게 질린 얼굴이 마치 판다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항상 그들을 얼굴에 박제되었던 다크서클이 더욱 더 커지고 선명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눈 아래를 넘어 광대까지 흘러내렸다.

마치 죽기 직전의 모습을 본다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

스펙터클 하게 변해버린 나채국과 오강심의 얼굴을 본 은비칼은 공포심마저 느꼈다.

은비칼이 덜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뭐… 뭡니까? 왜 갑자기 다크서클이 짙어지는 거죠?”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채국의 포동포동, 통통해서 팽팽했던 얼굴이 갑자기 확 찌끄러졌다.

아주 무섭고 섬뜩했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은비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나채국이 갑자기 그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은비칼에게 강변했다.

“실장님. 지금 새벽 세시가 넘었거든요? 조선시대 노비도 잠은 자면서 일했다고요. 현대판 노비가 있다면 저희 같을 거예요.

씹 팔 세기보다 못한 삶을 사는 이 씹 일세기 노비가 있다면 저희 같을 거라고요.”

나채국의 된소리가 은비칼의 귀를 사정없이 후벼 팠다.

은비칼에게는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그만둔다고 하면 안 되는데?

아이고, 지금 이러면 곤란한데?

김탄과 늑대를 찾아야 지구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이 중대한 시점이 모두 나가리가 될 것 같은 은비칼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나채국과 오강심을 꼬셔야 했던 은비칼이 그의 비장의 무기, 보기만 하면 녹아버리고 마는 미소 필살기 마법을 부렸다.

그가 아마 악마도 천사가 될 듯 한 미소일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소연을 했다.

“어쩔 수 없는 비상사태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데 대의를 위해 움직입시다. 세상을 구합시다. 여러분.”

그러나 은비칼의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잔인한 일을 시켰다는 뜻.

어쩌면 나채국과 오강심은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분노를 한 번에 방출하는지도 몰랐다.

그게 맞는 듯 나채국이 결국 폭발했다.

“대의? 그딴 거 다 필요 없어요. 지구 멸망이고 나발이고 지금 우리가 먼저 죽겠다고요.

운석이 떨어지기 며칠 전부터. 맞아. 그날부터 계속 밤샘 작업이잖아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건 세상을 구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잠과 고기라고요!!”

“거기서 고기가 왜 나옵니까?”

“제가 고기라고 했다고요? 잠과 보상이라고 했거든요?”

“아닙니다. 고기라고 하셨습니다.”

은비칼의 말에 순간 당황한 나채국이 누가 맞냐는 듯 오강심을 쳐다보자 그녀가 대답했다.

“고기라고 하셨습니다.”

은비칼이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채국이 머리를 쥐어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으아아아아! 이것 보세요. 제가 보상을 고기라고 말한 이 현상을요!

생존의 위협에 대한 공포가 무의식을 의식화한 거라고요!! 바로 살고 싶은 욕망이 보낸 방어 기제라고요!!!”

난리도 아니었다.

지랄발광.

나채국이 지금 하고 있는 걸 보고 은비칼의 머릿속으로 떠오른 말이었다.

은비칼이 난처한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은비칼의 깊은 한숨은 절박한 마음을 뜻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채국 옆에서 얌전히 서 있던 오강심이 그런 은비칼을 보고 갑자기 배를 움켜잡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으아아아아아아! 속이 쓰립니다. 급성 궤양인 것 같습니다. 으아아아아! 구급차를 불러주십시오. 아이고! 배야!!”

은비칼은 알고 있었다.

나채국의 지랄발광에 이은 오강심의 꾀병이라는 걸.

이들이 일부러 이런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은비칼이었지만,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단지 지금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혹사를 시킨 건가?

그럴 만도 하지.

지금 이틀 아니 삼일 째 밤을 새웠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해.

어쩔 수 없이 내가 양보하는 수밖에..'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은비칼은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서 연민을 느껴 마음이 아팠다.

사람은 누구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면, 없던 병도 생기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은비칼은 나채국과 오강심이 그런 생각이 아닌, 이득을 얻는 생각으로 바꾸어야 계속 일을 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 보상을 주어야겠다.

그럼 신이 나서 미친 듯이 일할 테니까..

솔직히 은비칼은 나채국과 오강심에게 그동안 보상으로 미소와 칭찬 그리고 격려만 주었다.

처음에야 그런 보상을 받으면 기분은 좋다.

그렇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이 세계, 바로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물질이 보상의 끝판왕이다.

은비칼은 그 이전의 보상과는 다른, 어떤 실질적이면서 직접 눈에 보이는 어떤 물질적인 보상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은비칼이 지랄발광을 하는 그들에게 비장하게 소리쳤다.

“여러분들!”

순간 나채국과 오강심이 지르던 비명과 몸부림을 멈추고 은비칼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지금 은비칼에게서 어떤 긍정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나채국과 오강심의 얼굴에 있던 다크서클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다시 얌전해진 나채국과 오강심에게 은비칼이 말을 꺼냈다.

“나채국, 오강심 씨. 잘 들으십시오. 오늘 오전 9시까지 끝내는 조건으로 1개월 유급휴가를 제시합니다.”

와우! 1개월 유급 휴가라니..

임원급이나 받는 보상이었다.

말 그대로 엄청난 보상.

하지만 나채국은 그 보상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어이가 없다는 듯 픽픽 웃어댔다.

마치 겨우 그 정도로 되겠어요? 라는 듯..

은비칼은 나채국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오강심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 또한 그 제안에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듯 스마트 폰을 보고 있었다.

뭐지? 이 사람들?

더 바라는 게 있는 건가?

비칼의 회유책에도 전세가 넘어오지 않자 은비칼은 조급해졌다.

어쨌든 지금 급한 건 은비칼.

그는 대의와 소명 없이 돈과 재미에 움직이는 나채국과 오강심을 데리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입장이다.

'정녕 여러분에게는 세상을 구한다는 선의는 없는 겁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나채국과 오강심의 표리 부동한 모습에 은비칼은 살며시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생각을 하며 지략을 짜내는 듯 보였다.

감은 눈 속으로 눈알이 사정없이 굴리는 게 보였다.

순간 은비칼이 해답을 찾은 듯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추가로.. 보너스 200% 인상 건의!! 딜!”

순간 나채국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는 은비칼을 노려보았다.

마치 타짜의 눈빛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채국에게는 은비칼의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랬기에 나채국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바로 걸려들지는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또 다른 진리 중 하나.

크게 걸어야 크게 먹는다.

그리고 인내심.

바로 괴로움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자에게 왕관의 무게가 달라진다.

그러니 목표 달성을 위해선 인내하라.

나채국은 지금 당장 은비칼의 제안을 덥석 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위에서 말한 진리대로 참았다.

급한 건 은비칼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심스럽기도 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는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실패.

뜻대로 되지 않아 그르치다.

게다가 오랜 시간을 들여 인내하고 인고한 노력들이 한순간 물거품이 된다면?

아. 그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수능 시험, 오디션, 구직, 공모전 응모, 기획 등등..

오랜 인내를 바탕으로 쌓은 희망들이 한순간 절망으로 바뀔 때..

그때 느끼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을 것이다.

그 누구이든지..

물론 이런 고통과 비견되지는 않지만 나채국 또한 고통스러웠다.

1개월 유급 휴가와 상여금 200% 인상이란 조건이 자칫 잘못했다간 한 순간 물거품이 될 거라는 고통..

만약 나채국이 더 유리한 협상을 하기 위해 시간을 끌다가 은비칼이 빈정이 상해 조건을 철회한다면 나채국은 새가 된다.

날아간다는 뜻이다.

급한 건 은비칼이었지만 나채국도 절박했다.

나채국이 재빠르게 은비칼을 표정을 염탐했다.

은비칼의 표정은 의중을 알기 힘든 포커페이스였다.

두 사람 사이로 상당한 시간 동안 팽팽한 긴장감이 침묵 속에서 흘렀다.

그 긴장 탓에 나채국의 손에서 식은땀이 베어 나왔다.

순간 은비칼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급한 자였던 은비칼의 마음이 살짝 드러난 순간이었다.

나채국이 그 미묘한 순간을 포착한 듯 소리쳤다.

“두 개 다 받고!! 작은 드론 하나 추가요! DSI 팬다 & 프로페셔널. 반드시 패키지여야만 해요!”

드론?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은비칼의 생각이 틀렸다는 듯 나채국이 다시 말했다.

“제가 말한 드론만 추가해 주시면 실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약속해요. 온몸을 불살라 시키는 걸 해낼 테니까요.”

비칼은 나채국에게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단지 나채국의 베팅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생각을 했다.

드론 하나라니.

이 얼마나 소박한 것인가?

나라면 더 큰 걸 걸었을 텐데 말이야.

고작 몇 십만 원짜리 드론을 원하다니.

알 수가 없네..

이해할 수 없는 나채국의 요구사항에 은비칼은 의아했지만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나채국의 베팅을 받아들이기로 한 긍정의 미소였다.

그 순간 그 미소를 눈치챈 듯 오강심이 소리쳤다.

“실장님? 저는 다음 달 뒤에 열리는 대박 소년단의 콘서트 티켓을 원합니다. 흐흐흐. 이왕이면 R석 이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