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직지소설' 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작!

그림 출처-이경(비단에 그린 연꽃)

3

경주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단청을 그릴 때였다. 우석이가 나를 찾아왔다. 그와 불국사를 함께 둘러보고 보문단지에서 식사한 후, 강미의 노래방에서 불콰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노래를 불렀다. 함께 일하던 단청쟁이들과 몇 번 놀았던 적이 있어 그녀와는 이미 안면을 튼 사이였다. 우석이와 두 시간이나 노래를 불렀는데도 그녀가 서비스를 계속 넣는 바람에 세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러는 동안, 어쩌고저쩌고한 추억이 담긴 노래를 부르며, 객기가 가득 찬 목소리로 심장이 터질 듯 소리를 내질렀다. 한참을 신나게 노래를 부르자 힘이 빠진 우석이와 나는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다 전재미 마을에서 살았던 옛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수연이가 왜 전재미 마을을 떠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이젠 그녀의 얼굴이 흐릿하고 가물가물하다. 언젠가 그녀를 꼭 만나 그 이유를 들어는 봐야겠다.’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하소연하듯 우석이에게 쏟아냈다.

노래방 기계의 화면에는 장미꽃이 가득 피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우석이가 침통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뭣 하는 짓이야?’

깜짝 놀란 나는 우석이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네가 군대 가고, 눈에 뭐가 씌웠던지 수연이랑 딱 한 번 잤다. 두고두고 너한테 미안했고, 더는 숨길 수가 없어서 고백하는 거야.’

‘뭐라고? 다시 말해봐!’

내가 군대 입대를 하고 며칠 후 수연이와 밤새워 술을 먹었고, 우는 수연이를 달래다가 그만 몸을 섞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수연이가 말없이 전재미 마을을 떠났다는 것이다. 우석이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수연이가 도망치듯 전재미 마을을 떠난 것은 모두 우석이 그놈 때문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나와 미래를 약속했던 그녀였다. 결코 나를 배신할 그럴 애가 아니었다. 우석이를 죽어라 두들겨 팼다. 노래방 마이크로, 술잔으로, 노래모음곡 책으로,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 된 우석이가 노래방 문을 열고 엉금엉금 기어나가자, 분을 삭이지 못한 나는 펑펑 울었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노래방은 너무도 조용했다. 노래방 주인이었던 강미가 음료수를 들고 룸으로 들어왔다. 내 몰골이 안쓰러웠는지 맥주 한 잔 더하자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강미는 내 인생의 치부를 순식간에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겁도 없이 그곳에 똬리를 틀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천년의 미소가 가득 퍼졌다. 술기운 때문이었다. 아니 우석이 그 녀석 때문이었다. 경주의 최고 미인이라고 농담까지 쳤다. 그 어떤 여자가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어도, 모두가 아름답고 모두가 가엾고 그리고 미안하고, 결국에는 온몸 바쳐 당신을 책임지겠노라 말했을 것이다. 수연에게 하지 못했던 그 말을 강미에게 들려주고 말았다.

강미는 수연이의 이야기를 듣자, 첫사랑은 맺어지기 힘들다며 그냥 잊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노래방 문을 처닫고, 강미와 관계를 맺었다. 그녀의 몸은 몹시 풍만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보드라운 살결에서 오방색 분채가 피어올랐다. 호분을 곱게 갈아 바른 듯 희고 고운 목덜미에 입술이 닿자 모든 고통이 멈추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와 몸을 섞는 동안 꽃들이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그녀의 몸은 버터가 듬뿍 녹아든 흰 팝콘처럼 달콤했다.

결국, 단청 칠 작업에 일정을 맞추지 못하자, 우두머리였던 박 씨 아저씨가 들쭉날쭉 일하려면 집어치우라고 화를 냈다. 강미와 뒤엉켜 지내는 날이 많아진 탓이었다. 아저씨는 우석이의 아버지였다.

보수가 신통치 않은 단청 일이 점점 시큰둥해졌다. 강미가 내 귓등에 입술을 들이대며 말했다.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라고, 그래야만 같이 살겠다며 엄포를 놨다. 나는 곧장 단청 일을 집어치우고 아저씨의 돈을 훔쳐 몰래 산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강미와 동거에 들어갔다.

강미는 남자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아 노래방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경주 최고의 미인과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날마다 가슴이 벅찼다. 우두머리 박 씨 아저씨의 돈을 훔친 게 찜찜했지만, 돈은 금방 벌어 갚으면 그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강미와 함께 칠통 가방을 보문호 풀숲에서 태워버렸다. 손톱 사이에 낀 물감 찌꺼기가 모두 사라졌을 무렵엔 강미의 오빠가 운영하는 인테리어 사업장에서 일을 도맡아 했다.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내 몸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고대인들은, 점괘를 보기 위해 거북이 배때기에 불 꼬챙이로 글씨를 썼다는 소리를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다. 바닷가에 살던 고대인들이 점을 치던 방법의 하나였다. 그 방법을 내가 따라 하고 있었다.

수연이를 순천만갈대축제장에서 봤다는 순천이의 연락을 받은 무렵부터 그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쏜살같이 달려갔지만 허탕을 쳤다. 강미가 그 일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그녀의 집착은 도를 넘었다. 핸드폰에 추적장치 앱을 깔아놓고 내가 움직이는 행보를 일일이 점검했다. 숨이 점점 막혀 왔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나는 주먹으로 벽치기를 하거나 몸에 생채기를 깊게 냈다.

글씨가 써질 때까지 통증을 참아내는 행위가 참으로 짜릿했다. 배때기는 물결 모양의 화상 자국이 켜켜이 쌓여 갔다. 몸에 생채기를 내는 것은 자학 행위였다. 며칠 지나면 상처가 난 곳이 아물어 검은 딱지가 덮였고 새살이 돋았다. 나는 그 살갗 위에 담배 불똥으로 글씨를 다시 새겨 넣었다. 통증의 강도가 최고조에 도달하면 나는 이를 악물고 초집중해서 글씨를 새겨넣었다.

‘정말 미쳤어. 그렇게 해서 첫사랑을 잊겠어? 내가 대신 해줄까?’

강미가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내 몸에 갑골문자를 새기기 시작한 주범은 바로 강미가 됐다. 순천이가 나에게 연락을 한다거나, 옛 추억들이 부표처럼 떠올라 어쩌지 못하고 발광을 하는 날이면, 여지없이 담배 불똥이 날아들었다. 문자가 아닌 제멋대로 부적을 내 몸에다 새겨 넣었다.

‘너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놈이야. 이 방법밖에 없어. 이렇게 부적을 새겨 넣는 건, 널 붙잡고 심은 마음이 남아 있어서야.’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노려보며 강미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벌칙이 끝나면, 나는 죄인처럼 쭈그리고 앉아 강미가 원하는 대로 반성문을 빽빽하게 써 내려갔다.

그 반성문은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계약서였다. 반항이라도 할라치면, 강미는 밥만 축내는 기생충이라고 밤새 욕설을 퍼부었다. 어쩌다 허세 떠는 노래방 손님이 강미의 젖가슴에 팁이라도 푹 찔러넣는 날은 싸움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러다가도 변이나 변종은 거의 같은 맥락이 내 몸 안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그 반응은 모양이나 성질이 다른 개체로 변화하는 현상이었다. 나는 카멜레온처럼 모든 습관을 버리려고 몸부림을 쳤다. 어떤 날은 의학의 힘을 빌려서라도 바닥까지 떨어진 남성호르몬을 끌어 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것은 파란 알약, 비아그라였다. 급기야 그것들이 몸속을 타고 흘러 다녀야만 그녀를 만족시켰다.

강미는 복잡한 삶을 극도로 싫어했다. 잘 먹고 잘 자고, 돈 많이 벌고 돈 많이 쓰고, 그리고 일수를 찍듯 강도 높은 잠자리를 원했다. 그것이 그녀의 인생 목표였다. 그 외의 일들은 대꾸할 가치도 없는, 가난을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자라고 몰아세웠다. 배고픈데 예술 따위가 무슨 소용이며, 더구나 첫사랑이 왜 필요한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날이면, 담뱃불 똥이 아닌 타투 바늘이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살갗에 점묘법으로 상처를 낸 후, 안료를 주입했다.

‘너를 사랑한다는 증표야. 마취 연고를 발랐으니 엄살떨지 마.’

그녀는 제멋대로 영어, 한자, 한글이 뒤섞인 글자를 새겨 넣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미가 아이를 갖자고 먼저 제안을 했다. 아이가 생기면 서로 싸우지 않고 마음잡고 살아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강미는 임신이 되지 않았다.

‘나 같은 종자는 굳이 번식하지 않아도 돼. 나는 괜찮아.’

나는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실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뿌린 씨앗이 발화하지 못하고 쭉정이가 되어버린 내가 정말로 가여웠다.

‘정자의 개체 수가 적다. 더구나 꼬리가 약한 정자들이다.’

검사결과의 내용이었다. 어이없게도 불임의 원인이 나였다. 강미와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아이가 없자, 부모들은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가 십 년 넘게 불공을 드렸다. 남자의 불임이 집안 대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게다. 번식이 그만큼 어려웠던 집안이었다. 그런데도 자식을 쉽게 얻으려고 했으니 욕심이 너무 과했다.

경주의 최고 미인이었던 강미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엎친 데 덮친다고 코로나 확산이 끝 간 데 없이 계속되었다. 네온사인 반짝이던 강미의 노래방에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밤새 고함을 지르고 돈 잘 벌고 밥 잘 먹고 술 잘 먹자고 그리고 끝내주는 밤을 보내자며 구호를 외치던 노래방은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여러 날 문을 닫고 자가격리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 강미와 내 콧구멍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코로나 키트 면봉을 무자비하게 쑤셔넣어 검체를 찍어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죽치고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하루하루가 몹시 지루했다.

코로나 19는 알파, 베타, 델타, 람다, 뮤, 감마, 오미크론으로 새롭게 갈아탔다. 그러는 동안 인테리어 사업장 일감이 점점 줄어가고 공사대금을 받지 못해 문 닫을 처지에 놓였다.

왕관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코로나라고 불린다는 바이러스 덕분에 변이와 변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갑골문자는 점점 흐릿해졌고, 딱지가 떨어지고 새 살이 돋았는데도 강미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더는 푸른 알약을 먹지 않아도 밤은 안전했다.

노래방 임대료가 6개월이나 연체되자, 건물주 여자가 찾아와 쌍소리를 퍼부어댔다. 코로나 핑계 대지 말고 계약만료가 되었으니 당장 짐을 빼라고 했다. 강미도 만만치 않게 펀치를 날렸다. 꼴랑 건물 하나 가지고 유세를 떤다며 악담을 퍼부었다. 시설비를 건지기 전엔 절대 못 나가겠다고 강미는 으름장을 놨다. 급기야 몸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두 사람을 뜯어말리려다 테이블 아래로 나뒹굴었다. 그들의 몸싸움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구석에 박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경찰을 부를까 말까, 몇 번 휴대전화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래 봤자 서로 벌금을 두들겨 맞을 게 뻔했다.

만신창이가 된 건물주인 여자가 돌아가자 강미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댔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와 강미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강미는 집주인 여자한테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아무 말도 못 하는 머저리라며 악을 바락바락 썼다. 당장 집에서 나가라는 퇴거 명령까지 떨어졌다. 불똥이 내게 던져진 꼴이었다. 나는 곧 짐을 꾸렸다.

쭉정이 종자 값을 대신해 집 보증금 전부를 강미에게 넘기고 그곳을 떠났다. 사실 속이 후련했다. 강미가 경주의 최고 미인도, 천년의 미소를 띤 여인도 더는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서 버터가 잔뜩 녹아든 달콤한 팝콘 냄새가 더는 나질 않았다.<계속>

[약력]이경 소설가

충북 영동 출생

대전대 대학원문예창작학과 석사졸업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22년 직지소설문학상 중편소설 최우수상 수상 ‘달루에 걸린 직지’

*저서: 장편소설 『는개』, 『탈의 꽃』,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아름다운 독』 에세이집『아난다가보내온 꽃씨』 출간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