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직지소설' 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작!

그림 출처-이경(호일에 그린 은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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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고세형이다. 한학에 밝았다던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생전에 할아버지는 이름 짓고, 이삿날을 잡고, 한문으로 된 공문서 읽는데 막힘이 없던 탓에 선비 소리를 들었다.

내가 열 살 무렵, 할아버지는 청주 흥덕사에서 직지심체요절이란 책을 해석하고 자료 수집을 하는 일에 동참했다. 그만큼 할아버지는 직지와 밀접했다. 흥덕사지 발굴에 참여한 덕분에 공로자 명단 속에 이름 석 자가 들어갔다. 그런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가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은 분명했다.

훗날에서야 고세형의 뜻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세형이란 한자의 뜻이 어떤 의미였는지 말이다. 풍수지리와 토정비결을 훤히 꿰고 있던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의 이삿날을 잡아주다가 우연히 세형을 발견했고, 손자의 이름으로 올렸다.

‘세형신 방향이 들면 농사를 짓지 않고, 사업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신이 편안하고 평생 놀고먹는다.’

참 그럴듯한 해석이다.

할아버지는 그 뜻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손자만큼은 전쟁과 배고픔을 겪지 않고, 빈둥대며 한평생 편히 살기를 바란 마음에서 팔장신 여덟 방위 세형신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대장군 방은 팔장신이 관장하는 여덟 방위에 속한다. 팔장신을 모시는 사람을 음양가라 불렀다. 음양가는 천문, 역수, 풍수지리에 능했던 예언자로 알려졌다. 그들은 태세, 대장군, 태음, 세형, 세파, 세살, 황번, 표미를 신들의 방향으로 여겼다. 신들이 각각 차지하고 있는 방향에 따라 금기 사항이 뒤따라 다녔기에 방위표 패철의 위력은 사람의 목숨을 쥐락펴락했다. 당시 할아버지의 위치는 마을의 촌장급은 되었다.

도교에 심취했던 할아버지는 전재미 마을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패철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패철은 일종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도구였다. 밤늦게 찾아오는 이웃이 있으면 언제든 팔장신이 관장하는 여덟 방위를 통해 집안 대소사를 살폈다.

쾌가 잘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밤새도록 패철을 들여다봤다. 동그란 모양의 중심부에는 나침반이 있었고, 주변부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의 육십갑자, 십이지신 한자들이 보석처럼 총총히 박혀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접어, 육십갑자와 십이지신 그리고 여덟 방위를 통해 사람들의 일신과 전화위복을 가려내는 모습에서 철학자 혹은 선지자 같은 위엄이 느껴졌다. 그 모습이 너무도 멋져 할아버지의 행동을 따라 했으며, 보던 책을 모두 물려받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런 내가 기특했던지, 할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천자문을 먼저 가르쳤다. 나는 금세 천자문을 깨우쳤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소학과 대학과 중용을 가르칠 생각에 몹시 들떠 있었다. 하지만 딱 천자문까지만 배웠다. 더는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틈만 나면 수연이와 붙어 다녔고, 그림을 그린다며 미술전람회를 싸돌아다녔다. 안타깝게도 내가 군대 가던 해에 할아버지는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나는 할아버지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걸어왔다. 할아버지의 뜻이 빗나갔던 것이다. 어쩌면 이름값을 하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형신이 있는 방향에서는 농사도, 사업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하지 않던가. 애당초 나에게 사업은 맞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큰돈을 벌겠다며 눈을 시뻘겋게 뜨고 돈을 쫓아다녔으니 모두 헛짓거리였다.

검은 양복과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 두 병을 비웠다. 사실 거의 내가 다 마셨다. 검은 양복은 두 잔 정도 마시고는 더는 입에 대지 않았다. 나는 술이 얼큰하게 퍼지자, 사주를 봐주겠다며 농담을 쳤다. 할아버지의 행동을 슬쩍 따라 해 보았다. 어려서 보고 배운 것들이 몸에 배어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접었다. 육십갑자와 십이지신을 접고 그의 일신과 전화위복을 가려내는 시늉도 해 보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생이별을 했군. 이 집 저 집을 거친 후, 겨우 마음 따뜻한 양부모를 만나서 학교 선생까지 될 수 있었지. 얼마나 외롭고 아팠는지 가슴이 다 뭉그러졌네.”

“맞아요, 어떻게 족집게처럼 잘 맞춰요? 몸에 신기라도 있어요? 대단해요.”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쩌다 그의 삶을 알아맞힌 것도 아니었다. 검은 양복이 순천이 막둥이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싶어, 추측해본 것뿐이었다.

“그럼 우리 가족들 소식은 언제쯤 듣나요?”

“그것은 나도 몰라.”

검은 양복의 눈빛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눈동자가 사라지고 흰자위만 남았다.

“이봐, 왜 이래? 어디가 아픈 거야?”

검은 양복의 등을 두드리고 몸을 주물렀다. 그러자 그가 눈을 껌벅대며 몸을 곧추세워 바로 앉았다.

시간이 지나자, 검은 양복은 정신이 말짱해졌다.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검은 양복이 걱정스러워 안색을 살폈다.

“잠시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이제 괜찮아요.”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잔치국수와 막걸리를 얻어먹은 보답으로, 순천네 소식을 수소문해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아무리 얼굴이 유순해 보이고 아이들을 가르쳤던 선생이었다 해도, 일단 여지를 뒀다.

그리고 그의 이름과 연락처를 핸드폰에 입력했다.

“오늘은 신세를 많이 졌어.”

“꼭 연락을 주셔야 해요? 꼭이요?”

검은 양복의 다급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한참을 서서 그가 골목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마신 소주와 대폿집 막걸리가 뒤섞여 화학반응을 일으켜 머리끝까지 취기가 올라왔다. 이제 정말 집으로 가야만 했다.

다시 골목길 안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돌부리에 신발 뒤축이 걸려 오른쪽 발목이 삐끗했다. 발목이 몹시 시큰거리고 아팠다. 통증이 종아리를 타고 엉덩이까지 치고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려 잠시 전봇대에 몸을 기대고 섰다. 전재미 마을은 곳곳에 아픈 흔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재미 마을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생긴 마을이었다. 전쟁통에 만난 사람들이 뜻을 모아 수암골에 둥지를 틀고, 동네 이름을 전재미 마을로 부르자고 결의를 한 모양이다. 맨 처음에는 전재민 동네로 불렀다. 그러다가 부르기 편한 대로 전재미 마을로 불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도로명 주소 수암로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집집이 번호가 달렸다. 전재미 마을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원주민뿐이었다.

쥐구멍처럼 복잡하게 여러 갈래로 난 골목길에 겨우 도착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종종 길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손금보듯 골목길을 훤히 꿰고 있었다. 지붕들이 어깨동무라도 하듯 서로 엉겨붙어 있었다. 예전 그대로의 모형들이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내부를 엿볼 수 없게 높은 대문과 가림막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또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 설치된 하수구 위에 덮개를 씌워 골목길을 넓혔다. 자칫 헛발을 내디뎌 하수 구멍으로 빠질 염려가 전혀 없었다.

전재미 마을,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겠다고 아버지와 두 해를 으르렁대며 싸웠다. 결국, 아버지를 이기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두 해를 더 허송세월하다가 불교대학에 들어가 단청 그리기는 기술을 배워 전국 사찰을 떠돌아다녔다.

막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오십 미터를 더 걸어 올라가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온다. 드디어 우리 집이 나타났다.

이게 얼마 만인가, 대문에 비친 내 그림자가 검푸른 먹물처럼 번졌다. 몸을 낮게 구부리고 집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사방이 너무도 조용했다.

흐릿한 불빛이 현관문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나는 어머니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짐을 꾸렸다. 다시는 단청 따위는 그리지 않을 것이며 꼭 사업에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아버지 앞에서 큰소리치며 집을 떠났다. 아, 그런데 성공은커녕 거지꼴로 돌아오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집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또다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다.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일회용 라이터의 부싯돌을 힘껏 눌렀다. 훅하고 불꽃이 튀자, 담벼락 주변의 낙서들이 보였다가 어둠 속으로 사그라졌다. 담배 끝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계속>

[약력]이경 소설가

충북 영동 출생

대전대 대학원문예창작학과 석사졸업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22년 직지소설문학상 중편소설 최우수상 수상 ‘달루에 걸린 직지’

*저서: 장편소설 『는개』, 『탈의 꽃』,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아름다운 독』 에세이집『아난다가보내온 꽃씨』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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