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옥

춘분이 지나고 꽃샘추위가 아직은 늦장을 부리는 3월 말, 개울물 소리가 한결 가까이 들리는 듯하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얼음장이 풀리고 계곡마다 남아 있던 잔설이 풀린 탓도 있으리라.

아침부터 창밖을 기웃거리던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을 두드렸다. 문득, 나는 사무실 앞 몇 발자국만 가면 보이는 연못이 궁금해졌다. 보던 책을 덮고 햇살의 손짓에 이끌려 연못으로 나갔다. 연못가에는 어느새 명자꽃이 맑아간 눈망울을 붉히고 있었다. 연못을 가로지른 청석교 위로 살금살금 올라서서 물속을 조심스레 들려다 보았다.

어느 해인가 주변 마을의 어부가 대청호에서 잡아다 넣어준 붕어들이, 손가락만 한 크기와 손바닥 반만 한 것들이 꼬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아주 작은 치어들이 떼를 지어 기다랗게 한쪽으로만 가고 있다. 이때 조금 더 큰 녀석이 날쌔게 가로지르며 다니는데, “우”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렀더니 삽시간에 흙탕물을 일으키며 흩어졌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청석교 끝으로 발을 옮겼다. 해마다 하얗게 피어서 찾는 관광객들의 포토존이 되어주는 능수 벚꽃이 만삭의 꽃망울로 휘어진 가지마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내일쯤 참 빛 동살이 잡히면 눈꽃처럼 피어나리라.

이처럼 봄은 경이롭고 아름답다. 죽은 듯 메말라 있던 나뭇가지에서 싹이 돋고 언 땅을 헤집고 뾰족한 새싹이 고개를 든다. 어느새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고 큰봄까치꽃이 연보랏빛으로 피었다. 한낮의 햇살이 연못물에 빛을 튕기자, 앙증맞게 앉아있는 민들레꽃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작은 벌 한 마리가 부산한 날갯짓을 하며 날다 앉다 하고 있었다.

향토전시관 안에는 오래전 한 생들이 제대로 익어 돌아갔던 옛 성인들이 되살아있고, 선조들의 얼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옛 물건들이 내방객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었다. 그 전시관 앞 광장으로 이어 휘어진 데크 길옆에는 관광객이 버리고 간 고양이가 언제 새끼를 가졌는지 불뚝한 배를 힘겹게 틀고 앉아있다. 감았다 떠다 하는 고양이 눈에서 봄이 졸고 있다.

장계관광지는 구읍 정지용 생가가 있는 옥천읍 하계리에서 시작하여, 장계관광지까지 이어지는 아트벨트 12km 향수 30리 길이다. 봄이면 흐드러지는 벚꽃 축제가 열리고, 그 길 가로수의 늘어선 벚꽃이 터널을 이루어 안내를 해준다.

온화해진 바람을 따라 대청호 호반가로 산책을 나섰다. 대청호의 옛 이름 금강의 자연경관과 산, 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산책로를 따라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또한 도도하고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금강의 모퉁이를 돌다보니 어느새 봄바람과 왈츠를 추는 듯 몸도 마음도 바람처럼 가벼워진 기분이다.

군데군데 수변 벽화가 시향처럼 향기롭다. 귀에 익은 듯 노랫말 같은 시구들을 따라 천천히 읊으며 걸었다. 곳곳에 정지용 문학상 시비들이 서서 앉아서 맞이해주었다. 몇 해 전에 <대한민국 공간 문화대상>을 받았던 이곳, 잠시 나는 벤치에 앉아 시의 일부가 되어 보기도 하고 시에 취해, 아니, 자연에 취해 상상의 나래도 펴 보았다.

1988년 탈이념<脫理念>의 굴레에 갇혀 납 월북으로 나누어져 세월의 시간 속에 묻혀있던, 많은 문인 중 정지용 선생을 비롯하여 120여명이 해금 조치되었다. 부활 된 시인 정지용의 문학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는 지용제가 그의 고향 옥천에서 열리고 있다. 다음 해 1989년부터 문학상을 받았던 21편의 시가 수록된 시비들을 이곳 장계관광지에서 볼 수 있다. 그중에서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시가 있었다. 제13회 정지용 문학상 2001년도 작품으로 김종철 시인의 “등신불”이었다. 등신불을 보았다/ 살아서도 산 적 없고/ 죽어서도 죽은 적 없는/ 그를 만났다/ 그가 없는 빈 몸에/ 오늘은 떠돌이가 들어와/ 평생을 살아간다. 는 이 시는 인간 존재를 ‘빈 몸’ 혹은 ‘떠돌이’ 의 모습으로 표상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허무한 것 또는 무소유로 게시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 즉 육신과 정신의 양면성에 대한 질문을 근본 문제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즘의 현시대를 살는 우리들의 허상이 아닐지.

시에 취해 자연경관에 취해 강변의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언덕 위 광장까지 왔다. <카페프란스> 의 간판을 한 카페 건물이 이국적인 멋을 풍기며 서 있다, <카페프란스> 는 시 제목으로 정지용의 등단작이다. 일본 유학중, 1926년 6월에 《학조》에 실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페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대청호의 윤슬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작년에 심은 핑크뮬리 갈대밭의 갈대들은 아직은 감감무소식 이지만, 변덕스런 꽃샘바람의 봄을 보내고 우기의 계절을 지나 불꽃같은 폭염을 견뎌낸 핑크뮬리 갈대는, 자애로운 가을이오면 고고한 공작새처럼 꼬리를 활짝 펴고, 군락을 이루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핑크빛 물결로 온 강변을 덮으리라.

퇴근 길, 37번 국도를 따라 아침에 갔던 그 길을 따라 되짚어 돌아오며, 완성된 잘 그려진 화사한 수채화를 상상해 보았다. 머지않아 벚꽃, 살구꽃, 배꽃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온 세상에 하얀 꽃눈이 내리리라. 복사꽃, 진달래가 빨갛게 그리움으로 피어나면, 꽃 같은 손녀와 같이 지용선생의 시 한 수 <발 벗고 간 누이 보고지고/ 따순 봄날....>을 읊으며 손을 잡고 꽃 마중을 하리라.

배정옥

충북 옥천 출생

2011년 월간 문학저널 시 신인문학상

2014년 한국 영농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작품상

2014년 시집: 시간의 그늘,

2019년 수필집: 바람은 왜 한쪽으로만 부는가,

한국 문인협회 옥천지부 이사, (현)

옥천군 문화해설사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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