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나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바람도 포근하고 따뜻해서인지 비가 내린다. 봄비 같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한바탕 꽃들이 피어날듯하다. 연한 봄빛을 쫓아 목을 길게 빼고 창가를 서성이다가 우산을 들고 나섰다.

빗속을 걸었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제법 경쾌하게 들렸다.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줄기를 받아보았다. 부드럽게 젖어 든다. 차도를 벗어나 공원에 이르니 채 녹지 않은 잔설이 빗물에 녹아들고 있다. 운동장을 도는 사람도 없고 공을 차는 사람도 없는 텅 빈 공원. 그런데 운동장 울타리에 어머나! 꽃이 피어있다. 한두 송이 개나리가 며칠 따뜻했던 햇볕의 속삭임에 눈을 떴다. 그리고는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 비바람에 젖어 떨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잠시라도 서서 우산을 같이 쓰고 내 온기로 감싸주었다. 그렇게 서 있는 내 신코가 빗물에 젖어 들고 양말이 축축해져 왔다.

그러니까 지난 시절 나의 삶 속에 봄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이런 봄이면 홀로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노래도 자작곡 해서 불렀다. 동화책과 교과서 어떤 책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막연히 작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해찰도 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쉬지 않고 연마하며 활짝 꽃피울 날을 꿈꾸어 왔다. 묵묵히 자신의 꽃대를 밀어 올리듯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온몸으로 밀어 왔다.

봄이면 산에는 진달래가 연분홍 꽃망울을 터트리며 분분히 번져 온 산하를 물 들린다. 담장위에는 노란 개나리가 치렁치렁 치마폭으로 담장을 넘는 봄의 눈부심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사계절 중 유독 봄을 좋아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노랗고 연분홍의 황홀한 세상을 마냥 좋아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삶을 살면서 화려한 봄날보다 회색빛 겨울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암담했던 어둠이 엄습해오고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쫓기듯 동동거리며 살았다. 옆도 볼 여유도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긴 그림자를 끌며 안절부절 해야 했다. 때로는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해 걷다가 쏜살같이 뛰어 꽃들의 경계 밖으로 달아나야 했다. 수시로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조여들었다. 불안감에 시달리고 귀에서는 ‘삐이이’ 기계소음소리와 매미 울음소리가 났다. 이명과 얼굴이 달아오르며 병명 없이 온 몸이 아팠다. 돌이켜보면 나를 옭아매었던 그 곡절은 성장통 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가 가난하면 나도 가난했다. 학업을 접고 일을 해야 했던 설움과 불안의 주름을 어찌 감당하랴. 아마도 자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불투명했던 미래는 나에게는 깊은 두려움의 그늘이었다. 울퉁불퉁한 나날이었다. 내 인생 역시 이대로 날아가 버릴 수 있다는 깊은 두려움에 화사하고 따뜻했던 봄을 더 갈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지금은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다.

어느 해 봄날 열망해오던 그 꿈은 반세기를 넘긴 어른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망했던, ‘한국농어촌공사주관 문학상을 받고, 시집도 냈다. 그 찬란한 봄빛을 더욱더 빛나게 함은 지난겨울의 폭설과 혹한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가늠할 수 없는 그늘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절실한 열망이 용광로 불덩이처럼 이글거렸다. 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으니까. 가고 싶은 길이 있었으니까.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시간을 뒤돌려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하나 떠올려 눈 맞추어본다. 모든 순간순간 고통스러웠던 날까지도 지금 이 자리에서 바라보니 꼭 필요했던 나의 일부였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과의 인연이 한 장면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거기에 스며있다. 나의 시간이 누구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아프지만 기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나의 시간이 단단하기를.

그렇게 쉽게 떠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도 저만치 꽁무니를 빼고 있다. 지난 계절이 암담하고 아픈 구석도 많았지만 봄은 어김없이 오고 또 오듯이 내 성장통 또한 앞으로도 반복을 더 해 갈 것이다. 아무리 그 그늘이 짙다고 해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막막하지만은 않다. 나는 꿋꿋이 삶의 봄을 찾고 또 찾는 끝없는 그리움으로 이 봄을 찬찬히 읽어나가리라. 봄의 생동은 기다림에 바쳐 있기 때문이다.

배정옥

충북 옥천 출생

2011년 월간 문학저널 시 신인문학상

2014년 한국 영농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작품상

2014년 시집: 시간의 그늘,

2019년 수필집: 바람은 왜 한쪽으로만 부는가,

2019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시 낭송 부분 금상

202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문학 부분 예술인상

한국 문인협회 옥천지부 이사, (현)

문정문학 회원,

옥천 향토사연구회 현 감사

옥천 신문, 향수신문 칼럼연재

지용 시낭송 협의회 감사 (전)

월간 문학저널 청주지부 회원

옥천군 문화해설사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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