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작가는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전업 작가다. 그는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를 거쳐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 박사과정 수업 중이다. 1990년 월간 『한국시』에 시 「억새풀」이 당선되었다. 2002년에는 『실천문학』에서 장편소설 『하루』로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이무영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활』은 문화예술 진흥위원회에서 우수도서로 선정이 되었다. 장편소설 『파두』는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선정되어 출간된 작품이다. 2014년 원고지 2만여 매 분량 대하장편소설 『금강』15권을 12년 6개월 만에 완간했다. 현재 한국문예창작진흥원 원장으로 재임하며 ‘문예창작실기지도사’를 배출하고 있다.

1.대하장편소설 『금강』은 원고지 2만매 분량에 15권의 적지 않은 분량이다. 쉽지 않은 분량인 『금강』을 쓰게 된 계기는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의 창작활동을 하는 분들은 누구나 역사에 남을만한 작품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을 감동 깊게 읽었다. 이후 박경리의 『토지』를 읽었는데 소설가라면 그 정도의 역작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라서 독자들이 좋아 할 만한 원고를 쓰는 데만 급급했다. 백여 권 정도 책을 내고 났을 때 출판사에서 사기를 당했다. 그 충격으로 잠시 쉬고 있을 때 이러다 결국 『대지』같은 역작은 못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2000년도 들어서 본격적으로 현대사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2.기존의 대하소설과 다르게 ‘금강’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무엇입니까?

『금강』은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 『한강』과 『변경』과 시대적 배경이 겹친다는 점에서는 유사점을 찾을 수가 있다. 그러나 좀 더 파고 들어가 보면 『한강』은 6.25후부터 70년대 말까지, 『변경』은 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이나, 60년대가 주요 배경이 되고 있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월북한 아버지를 둔 자식들이 겪는 이념적 번뇌라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금강』은 1956년부터 2000년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1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제 강점기부터 2000년도까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점을 두고 있다. 또한 『한강』과 『변경』이 주인공이 있는 이념적인 소설이라면, 『금강』은 충북 영동에 있는 ‘모산’이라는 50여가호의 사람들이 동시대를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조명한 소설이다.

세 번째로 특징을 잡을 수 있다면 앞의 소설들이 단순히 시대적 사회상과 정치적 사건을 언급한 것에 비해서, 『금강』은 1956년대부터 2천 년도까지의 물가, 정치, 사회적 사건, 풍습 등이 교과서로 봐도 될 만큼 정확하게 재현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3. ‘금강’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영동군 학산 면의 ‘모산’이란 동네에 사는 50여 가구가 반세기를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그대로 재현했다는 점이 눈에 뜁니다. ‘모산’이란 동네와는 어떤 인연이나 관계가 있는지, 왜 작품의 주 무대를 그곳으로 했는지 궁금합니다.

소설의 중심이 되고 있는 ‘모산’ 이라는 마을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동네 이름이다. 지금은 공식 명칭이 상지, 하지 마을이다. 예전에는 윗모산, 아랫모산으로 불렸는데 소설에서는 아랫모산은 존재하지 않고 윗모산만 배경으로 선택했다. 이곳은 내가 태어 난 동네이며 선산이 있는 곳이다.

중요한 점은 왜 굳이 ‘모산’이라는 지명을 차용했느냐 하는 점인데, 내가 어렸을 때 본 모산 마을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인 묘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우선이다. 두 번째로 ‘모산’ 마을 정도의 규모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산재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소설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모산은 충북 영동에 있는 마을이지만, 그러한 마을 형태를 하고 있는 지역은 전국에 수도 없이 많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마을의 구성원, 풍습, 역사, 시대적 변화가 거의 비슷할 것이라는 점을 착안했다. 처음부터 『금강』은 작가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4. 『금강』은 50년대 전후(戰後) 세대 작가가 쓴 최초의 현대사 소설이다.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강’의 조정래, ‘변경’의 이문열, ‘혼불’의 최명희 작가가 모두 40년대 전·후반에 태어난 작가라는 점과 비교되는데 작품 구상에 도움이나 힘들었던 점은 어떤 점이었습니까?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40년대 작가들은 아무래도 이념과 환경에서 50년대 작가들처럼 자유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강』은 이념과 동족간의 갈등이라든지 금기시해야 할 지역 간의 갈등, 종교적 문제 같은 것이 자유스럽게 노출이 되었다. 『금강』은 주인공들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다룬 소설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 억압 받거나,

작품 구상에 가장 힘들었던 점은 시대적 변화에 따른 물가이다. 가령, 지금은 추억의 산물이 되어 버린 석유곤로가 처음에는 취사도구가 아닌, 취사와 등불의 역할을 겸용한 ‘호야’ 비슷한 용도라는 점, 66년도에 연탄 한 장 가격은 얼마인지, 라면은 언제부터 나왔는지, 우리나라에 처음 국산 라디오는 언제 어느 회사에서 만들어 얼마에 판매를 했는지, 독립문에서 종로까지의 전차 요금은 얼마인지, 지하철은 언제 개통이 되어서 요금은 얼마씩 받았는지 하는 따위를 정확하게 고증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5. 『금강』은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서사문학으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금강’을 통해 작가가 추구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요?

『금강』은 전통적인 맥을 잇는 서사문학이다. 요즈음 젊은 작가들이 즐겨 쓰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적인, 혹은 어떤 기교를 부리지 않은 야생의 서사소설이라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소설가인 서종택 선생님이 평 한 바가 있다.

『금강』은 어느 한 꼭짓점을 향하여 사건을 해결하려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 갈 수밖에 없는지,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하는 문제점과 방향 점을 제시해 주는 소설이다.

예컨대 우리는 해방 이후 너무 바쁘게 살아가느라 앞만 보고 달려 왔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70년대의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부터 상품백화점 붕괴라든지, 성수대교 사고 등 비슷한 유형의 사고가 터지고 있다. 최근의 세월호 사건도 그렇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1993년 10월 10일 낚시꾼 등 362명을 태우고 가다가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침몰해 승객 292명이 숨진 대형 참사가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해방이후 수많은 국회의원들을 자신이 선택하고 나서, 막상 당선이 되면 갑과 을의 관계로 변하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여전히 진행형이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역사라는 거울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봤다. 거울을 보지 않으면 얼굴에 오물이 묻었는지 검댕이가 묻었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외국인의 시선으로 철저하게 고증을 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장르를 월드문학이라 부르고 싶다.

『금강』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고 『금강』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점 들이다.

6. 『금강』은 12년 6개월 동안 쓴 작품이다. 그동안의 창작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과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12년 6개월이라는 기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강산이 변하는 동안『금강』에 올인을 하면서 몇 권의 단행본을 썼다. 그 중 출간을 한 책은 장편소설『활』과 소설작법책인 『마법의 소설쓰기』가 전부였다. 그 밖에 주간신문이며 인터넷 들 여기저기 연재를 하는 것으로 생활을 하며 공부도 했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금강』을 쓰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10권짜리 소설을 썼는데, 출판사로부터 많은 금액의 인세를 받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경제적 어려움이다.

두 번째로는 박사 과정을 2학기만 하다 중단한 점이다. 박사 학위를 따고 『금강』을 완결하느냐, 『금강』을 완간 한 후에 학위를 따느냐 일생일대에 고민을 했다. 결국 대학원 지도교수님이었던 서종택 선생님의 뜻처럼 소설가 쪽을 택하기로 하고 금강에 매진하기로 했던 점이 어려움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역시 원고를 끝낸 날이다. 지난 8월 하순에 내 손에서 원고가 떠났다. 11월 하순 쯤 마지막 교정지를 출판사로 보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7. 한만수 작가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을 통해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그 모습들을 관통하는 무엇인가를 어떻게 말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소설을 쓰면서 일관되게 밀고나가는 캐릭터의 특징은 보통사람들이다. 특별한 인물이 아니고 보통사람들이 보통의 삶을 통해서 사건을 만들어 가고, 엮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보통사람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축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해 갈수록 보통사람들의 역할이 커지지만, 그 반대 일 경우 보통사람은 영화의 엑스트라 역할 정도에서 끝이 난다. 더 심한 경우 보통사람이 인간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어느 특권층이나 지식층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입을 통해 사회를 고발하고 싶다. 그것이 곧 개혁이라고 믿는다.

8. 글 쓰는 일은 고통과 스트레스를 가지고 가지만 한편으로 그 고통과 스트레스를 극복해주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좋은 길이라고 셰퍼드 코미나스는《치유의 글쓰기》에서 말했습니다. 작가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작품에서 어떤 힘으로 작용하는지요?

나는 전업 작가이다. 내가 글을 써야만 빵을 살 수 있고, 내가 글을 써야만 생을 이어 갈 수 있다. 곧 생업인 것이다.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장사꾼이 장사를 접는 것과 같고, 농사꾼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어떠한 고통이 감수되든지 계속 글을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면 이 직업을 계속 이어 갈 수가 없다. 때로는 희열을 주기도 하고 기쁨을 주기고 한다.

다시 말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기 전에는 물에 빠지지 않고 건너야 한다는 스트레스 내지 절망적 상황이 되지만, 일단 다음 돌을 내딛고 나면 성취감에서 비롯되는 희열을 느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이처럼 절망과 희망이 교차되는 것의 연속이라 할 수가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글을 쓰는 직업이라고 해서 특별 난 것이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직업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더구나 이런저런 상업적인 글이 아닌 순수하게 문학적인 글을 쓴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직업과 분명히 차별성이 있다. 그 차별성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초대하는 쪽은 사회가 아니고 자아이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것도 내 자신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스트레스가 내 작품에서 어떤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 보다는, 얼마나 치열하게 글을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9. 한만수 작가의 작품의 바탕에 깔려있는 원초성은 어떤 것입니까?

『금강』의 예를 들겠다. 금강에는 약 150여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 중에 주요 인물들이 50여 명이다. 작품의 원초성이라는 것은 곧 캐릭터의 본성이라고 갈음할 수 있다고 본다. 『금강』에 등장하는 인물은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다.

나는 악인이라고 해서 천편일률적으로 악인으로 묘사를 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선인이라고 해서 착한 면만 보여주지 않는다. 악인도 인간이고 선인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선인도 때로는 악마를 꿈꾸고, 악인도 때로는 천사가 되기도 한다. 곧 인간은 누구나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野性)이 있다고 믿는다. 그 야성이 내 작품들의 원초성이라고 볼 수 있다.

10. 우리 삶 중에서 술만큼 가까이 하는 것도 없을 것 같군요. 한 작가는 술과 작품과의 관계에서 어떤 연관이 있으신지요?

술은 엄청 마셨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지는 모른다. 그냥 마셨던 것 같다. 그렇다고 알코올중독자는 아니다. 그런데도 기회가 있으면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90년도 초에서 부터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나는 약 10년 동안 하루 열세 시간 이상 글을 썼다.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매일 글만 썼다. 그 당시 고향에서 살고 있었는데 평균 삼 개월에 한번 정도 술을 마셨던 것 같다. 그 덕분에 고질적인 위장병도 완전히 치유가 됐다.

나의 겉모습만 보는 분들은 내가 지금도 술을 굉장히 많이 마시는 걸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지금도 일단 작품을 시작하면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부득이 술을 마셔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그 전날 밤을 꼬박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술을 마시는 시간만큼의 원고 분량을 채운다. 그 습관은 요즘도 이어지고 있다.

만약 내가 술 마시는 모습만 본 분들의 상상대로라면 『금강』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1. 다수의 문학 작품이 우리 삶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쓰면서 혹시 울어 본적이 있나요. 만약 있다면 왜 눈물을 보여야 했나요?

『금강』을 쓰면서 분노하고 절망하고 눈물을 흘린 적이 많다. 『금강』을 쓰면서 뼈저리게 느낀 점인데, 지난 반세기를 조명하다 보니까 우리는 너무 어수룩하게 살았고, 너무 나약하게 살았고, 너무 슬프게 살았다는 점이다.

『금강』의 등장인물 중에 ‘들례’ 라는 여자와 ‘상규네’라는 여자의 심리를 묘사 할 때 어머니 생각이 겹쳐질 때가 많았다. 또 ‘철용’이라는 등장인물에 대해서 쓸 때는 어렸을 때 고생하던 때가 겹쳐져서 가슴이 아팠다.

12. 한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요.

이론적인 측면은 배제하고 내가 생각하는 소설은 넓은 의미로는 그 시대의 반영이자 거울이다. 좁은 의미로는 작가의 문학적 사상이다. 그 방법론에 있어서 여러 가지 표현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소설은 무조건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서사가 없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소설은 창조적인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13. 한 작가는 시로도 등단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 지금도 시 창작을 하고 있는지요? 그러시다면 시와 소설 중 어떤 것이 더 매력이 있으며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시는 시로서 매력이 있고, 소설은 소설로 매력이 있다. 따라서 어느 부분이 더 좋다는 단정은 하고 싶지가 않다. 다만 시집을 내게 된 배경이 소설을 쓰지 못한 절망감에서 비롯됐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백일장에서 “운동장”이라는 주제로 산문부 장원상을 받은 적이 있다. 산골 중학교에 다니는 중학생이었던 나는 전교생이 보는 가운데 상을 받았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 이전에 지금의 초등학교인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노트에 연필로 소설을 썼다. 6학년 때는 내가 쓴 소설을 동네 형들이 빌려다 읽을 정도였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만화책에서 영향을 받아서 해저도시에 대한 공상과학 소설이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백일장을 받은 날 밤에 나중에 반드시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중학교 삼학 년 때부터 문예반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산문을 쓰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때도 혼자서 글을 썼다. 상을 많이 탔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을 하면서 글쓰기를 중단하고 독서를 많이 했다.

내가 은행에 다닐 때는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항상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서, 직장이 좋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결국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사표를 냈다. 일 년 동안 책만 보다고 다시 현대해상화재보험에 들어갔다. 그곳에 들어가서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6시면 출근을 해서 8시까지 소설을 썼다. 퇴근 후에는 오전에 쓴 소설을 타자기로 치다가, 나중에 컴퓨터가 보급되고 나서는 직접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시는 거창한 대작을 쓰겠다는 각오를 하고 제주도에 둥지를 틀면서 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신춘문예나 여러 문예지에 응모를 하면 항상 본선에서 떨어지거나, 이름 석 자가 심사평에서는 항상 거론이 됐다. 그러던 중에 처음으로 장편을 썼다. 그 장편을 소설을 지도 받던 선생님에게 보여 줬다. 선생님께서 작품의 화자를 여자에서 남자로 바꾸어 “문학정신”이라는 문예지에 응모를 하자고 했다.

화자만 바꾸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는데 이상하게 고치기가 싫어서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응모를 하지 못했다. 그 일로 충격을 받아서 그때까지 쓴 습작품을 모두 버리고 제주도로 갔다.

제주도에서 거창한 작품을 쓰겠다고 매일 컴퓨터 앞에 앉기는 했지만 왜 그런지 써지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시간만 보낼 수가 없어서 고등학교 때 배운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한국시』에 당선이 되고, 어찌어찌 하여 시집을 냈는데 그 시집이 좀 팔렸고, 그 뒤에 박우사라는 출판사에서 “물 한 컵의 사랑” 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더 많이 팔렸다. 그 당시는 시집이 잘 팔리는 때라서 풀잎이라는 출판사에서 “너”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걸 믿고 전업 작가로 나섰다.

전업을 선포하고는 시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독자들이 원하는 시를 쓰다 보니 이건 시도 아니고, 낙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먹고 살기 위하여 출판사가 원하던 시를 보면 얼굴이 화끈 거릴 정도로 부끄럽다.

어느 날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는 접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가 1990년도이다. 그렇다고 시를 완전히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소설을 쓰는 틈틈이 써 둔 시가 1백여 편이 된다. 내년 3월쯤에 출간을 하기로 출판사와 약속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14. 한 작가의 기억의 흔적 중에서 트라우마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나타납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트라우마가 없다는 글을 쓸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내가 소설가로 성공을 해야 한다는 집념의 핵심에는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숨어 있다.

부모님들은 내가 글을 쓰겠다고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돌아가셨다. 은행이며 보험회사에 잘 다니던 자식이 글을 쓰겠다고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제 정신으로 보시지 않으셨다. 형제들까지도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형제로 여길 정도였다. 당연하다. 시골 상고 출신이 무슨 신춘문예에 당선이 된 것도 아니고, 소설을 몇 권 낸 것도 아니고, 어쭙잖은 시집 몇 권 낸 거 믿고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눈을 감는 그 날까지 내 걱정을 하셨다.

지금도 글쓰기가 힘이 들 때나, 내가 나태해 졌다고 생각 할 때는 부모님 생각하면 내가 지금 이렇게 시간이 보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에게 채찍질을 한다.

15. 소설가들은 저 혼자서 세상을 감당하는 사람 같습니다. 이건 나의 주관적 생각이지만 지금까지 한 작가를 감동시킨 작품이나 아니면 힘이 되어준 작품은 어떤 것이며 무엇이라 생각됩니까?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중학교 2학년 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책 읽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산골 면소재지에 있는 서점에 읽을 만한 책이 있을 리 없다. 학교 도서관에는 위인전이며, 세계 단편전집, 사상전집, 한국문학전집 등의 책이 많았다. 하지만 일 년을 넘길 분량은 되지 못했다. 읍내로 나가서 교육청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많이 읽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헌책방을 자주 이용했다. 현대해상화재에 다닐 때는 교보문고가 코 앞에 있어서 점심시간 때 마다 교보에 가서 책을 읽었다. 그 결과 소설책만 2천여 권을 모았다. 하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그 책을 도로 헌책방에 넘기고 말았다. 헌책방 사장이 책 2천 권을 모두 가지고 가면서 삼성출판사에서 출간한 『제 3세대 한국문학』36권짜리는 갖고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까 나중에 반드시 이 책을 다시 사게 될 것이다. 우리 가게 단골이니까 특별히 생각해서 이 책은 남겨두겠다. 라며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해서 그 책은 가격도 비싸고 새 책이기도 해서 서점주인 의견에 따랐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본격적으로 소설쓰기를 시작하고 나서였다.

중학교 때 감동 읽게 읽은 작품은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펄벅의 『대지』이다. 열다섯 살의 어린나이지만 모름지기 소설가가 되면 『대지』의 수준을 벗어 날 수 있는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습작을 하면서 이외수와 오정희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 그 후로 우연히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이라는 작품을 읽고 나서 그 세 분의 장점, 예를 들어 이외수의 ‘햇살이 이빨에 박살이 나는’ 같은 진부와 순수를 오가는 감각적인 묘사,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에서의 오줌이 잘금잘금 나올 것 같은 묘사, 박완서의 끈질기게 이어지는 서술 같은 점을 필사하거나, 패러디를 많이 했다. 그러한 습작 방법이 글쓰기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16. 앞으로의 소설 집필 계획이나 구상 중인 소설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나요.

『금강』에 빠져 있다가 보니 언젠가부터 내가 과연 글을 잘 쓰고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금강』을 중단하고 『천득이』라는 장편소설을 써서 한겨례문학상에 응모를 했다. 그랬더니 급하게 쓴 소설임에도 본선에 들었다. 그 원고를 고쳐서 ‘김만중 문학상’에 응모를 했더니 3등에 당선이 됐다. 상금이 천만 원이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포기를 했다. 그 『천득이』를 내년 2월에 출간하기로 했다.

『천득이』외 장편으로 써 놓은 원고가 단행본으로 7권이 있다. 그 원고들을 손 봐서 『금강』을 출간한 도서출판 글누림에서 출간 할 계획이다. 또한 『금강』6부작 2010년까지를 쓸 계획도 가지고 있다.

17. 전업 작가로서 가장 힘든 부분은 무엇이며, 지금까지 학업 과정이 작가에게는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자유는 억압 받는 상황을 전재로 존재한다는 말이 있다. 전업작가는 무한정 시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면 추락 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고, 절제 된 생활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여기저기서 술 먹자는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 것부터,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을 자제해야 하는 것 등이 여간한 결심이 없는 한 쉽지가 않다.

이 부분에서 다시 술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를 평가 할 때 겉으로는 술이나 마시고 흥청망청 사는 쪽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 정반대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 공부도 하고, 자식들을 가리키고, 등단 작품도 써야 하고, 먹고 살 글도 써야 하고, 내 학비도 벌려면 술 먹고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밤잠을 줄여가며 글을 써야 가능하다.

나는 최소한 『금강』을 완성시킬 계획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다룰 정도의 소설을 쓰려면 최소한 석사 정도의 배움은 있어야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희사이버대학교에 입학을 할 때 두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그 중 하나는 학점을 최소한 4.2 이상 유지해서 3학년 조기졸업을 한 후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서 2년 만에 끝내겠다는 계획이다. 또 하나는 경희사이버대학교에 재학을 하는 동안 소설가로 등단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래야 『금강』의 정통성을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이다.

18. 예비 작가들을 위해 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며 소설 창작의 지름길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나요?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정도이다. 그 점에다 소설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쓰는 것이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 아무리 좋은 주제, 뛰어난 필력이 있더라도 완성을 시키지 않으면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니다. 또한 소설은 시와 달라서 매일 쓰지 않으면 쉽게 포기 할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켜 주고 싶다.

나는 지금도 하루 여덟 시간 이상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글을 쓰다가 내가 평소 사용하지 않은 어휘가 튀어 나올 때 마다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단편 보다는 장편에 도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우리의 소설 문학이 뒷걸음치고 있는 것도 단편 중심의 글쓰기가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19. 올해 초에 설립한 ‘한국문예창작진흥원’은 어떤 곳입니까.

오래전부터 문학과 문예(文藝)는 구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나라는 춘원 이광수가 ‘내가 쓰는 글은 문학이다’ 라는 명제를 던진 후에 문예를 문학이라고 여기는 풍토가 강하다.

문학은 텍스트의 집합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글(文)을 매개로 하는 모든 장르는 문학이다. 2016년에 미국의 가수 밥딜런이 노벨상을 탔다. 영국의 수상 처칠은 자서전으로도 노벨상을 탔다. 외국에서는 이처럼 문학과 문예를 구분 짓는다.

우리나라에서 주는 문예상은 없다. 모든 상이 취지가 불분명한 문학상이다. 문예교육이 국어 교육의 하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도 ‘문예’에 대한 모호한 해석 때문이다. 나는 그 동안 3권의 작법 책을 출간했다. 작법 책을 쓰면서 절실하게 느낀 점은 문예, 즉 시나 소설 수필을 쓰면서 예술을 별개로 생각하는 통념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나 소설에서 말하는 미적표현이 예술을 총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문예창작대학에서 ‘예술’ 과목이 필수과목으로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예술을 바탕으로 한 시작법이며 글짓기 방법을 새롭게 연구를 했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문예를 세상 널리 퍼트리기 위해 민간자격증인 “문예창작실기지도사”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등록했다.

교육부에서는 지난 1월에 등록번호를 받았지만 이런저런 준비 관계로 8월부터 자격증 수강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문예창작실기지도사 자격증을 따려면, 글짓기, 시 창작, 소설 창작, 수필창작, 문예이론 과목을 교육받아야 한다. 이번에 출간한 “문예창작의 정석”이 “문예창작실기지도사” 자격증을 따려는 분들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현재 도서출판 “한국문예창작진흥원”을 등록했고, 문예지 “한국문예” 도 등록을 해서 내년 5월 창간호를 준비 중이다. 이 밖에 외국의 저명작가들이나 노벨상 수상자들을 초청하여 문예세미나 등을 개최하거나, 소설을 영화사나 연극계 등으로 연결시켜 주는 “문창기획”도 운영할 예정이다.

문예창작실기지도사 자격증을 따게 되면 초중 고등학교 방과 후 수업 지도를 할 수 있다. 신 개념 작법이라서 일반 대중들도 쉽게 문학에 접근할 수 있어서 문화원이나 문화센터, 평생 교육원 등에서도 강의가 가능하다.
(전화 02-2636-3765 한국문예창작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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