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 대표 양문규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여여하였다』가 ‘詩와에세이’에서 나왔다. 양문규 시인은 ㈜실천문학사 기획실장으로 일하다가 1999년 낙향한 이후 천마산 중화사와 천태산 영국사에 머물다 2008년 천태산 은행나무 옆 자락 작은 토담집을 얻어 ‘여여산방(如如山房)’이라 스스로 이름 붙이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꿈꾸며 살아왔다.

양문규 시인의 여여산방 생활은 “애원하지 않아도 농사가 시와 노래가 되는 풍경”으로 “살아가는 길이 한평생 꽃만 같아서 벌 나비도 훨훨 붕붕거”(「텃밭」)렸다. 또한 “천 년 은행나무 아래 은행잎처럼 쌓이고/쌓이고 쌓인 책을 잠을 자다가 읽고/밥을 먹다가 읽고/똥을 누다가 읽고/신발을 신다가 읽고/읽고, 읽다가 또 책을 쌓고/또 하루가 쌓이고/몸의 중심에 쌓인 또 다른 책이/또 나를 불러 또박또박 읽”(「적독(積讀)」)는 생활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을과 절집과 우편배달부와 등산객이 한데 어우렁더우렁 꽃이 되고 별이 되고 흥성흥성 노래가 되는”(「맨드라미」) 이웃이 있었으니 “돌아갈 곳이 어딘가 묻”지 않아도 “소담하게/꽃이 열”(「구절초」)리는 무한공간이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아니, 죽어 살과 뼈가 녹아

꽃이 될 때까지

천태산 은행나무

언덕에 기대어

살았으면 좋겠다, 골백번

같은 말을 되새겼다

누추한 삶이지만

외롭지 않을 만큼 살다가

슬픔이 마를 때 떠나리라

절, 하진 않았지만

절이 보이는 산모롱이 홀로 앉아

가만 절할 때 많았다

―「찔레꽃」 전문

양문규 시인이 천태산 은행나무를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온 여여산방은 천태산과 절집을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2009년부터 2015년 여여산방을 떠난 이후에도 매년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를 열고 있다. 그것은 고귀한 생명을 내일처럼 기뻐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나아가 자신과 이웃, 대자연의 뭇 생명을 지켜내고 가꾸는 것을 소명으로 살아냈다. 천태산 은행나무 곁에서 “죽어 살과 뼈가 녹아/꽃이 될 때까지” 천태산 은행나무 곁에 살고 싶었지만 각박한 세태의 풍랑를 피해가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절이 보이는 산모롱이 홀로 앉아/가만 절”하면서 “천태산 은행나무/언덕에 기대어/살았으면 좋겠다, 골백번/같은 말을” 수없이 되새겼다 고백한다.

동국대 교수로 재직 중인 박형준 시인은 이번 양문규 시집에 대해 “시인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천태산 은행나무 언덕에 기대어 살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 크고 선하고 맑다. 그러나 안타깝고 서러워라. 이 시집은 그 여여(如如)한 나무 밑 공동체를 떠나야만 하는 ‘나무 사람’의 만가(輓歌)인 것”이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양문규 시인은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1989년 『한국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을 펴낸바 있다. 현재 계간 『시에』, 반년간지 『시에티카』 발행인, 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 대표로 활동하면서 삼봉산 자락에 새로운 여여산방을 들이고 시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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